영리한 수비수의 대명사였던 조영증 ⓒ스포탈코리아
현재 대한축구협회(KFA) 기술교육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조영증(55)은 1970년대 중반과 80년대 중반에 걸쳐 한국수비를 대표했던 선수 중 하나이다.

조영증은 스피드나 순발력 등에서는 약점을 보였지만, ‘영리함과 센스’로 이런 약점들을 커버했다. 상대 공격을 미리 예측하고 맥을 끊는 플레이와 동료들과의 연계 플레이, 탁월한 위치선정 등으로 수비진의 리더 역할을 수행했다. 여기에 예전 선수들과는 달리 우람한 체구를 바탕으로 힘에서 절대 밀리지 않았고, 태클과 몸싸움 등에서도 강점을 드러냈던 수비수이기도 했다.

중앙대 3학년이었던 1975년부터 대표팀에서 뛰기 시작했으며, 1981년에는 북미축구리그에 진출해 새로운 경험을 쌓기도 했다. 은퇴 후에는 LG(현 안양)와 U-16/U-19 대표팀 감독 등을 역임했으며, 이후 지도자 교육에 큰 관심을 KFA의 지도자교육체계를 재구축하는데 일조했다.

축구를 위해 파주에서 서울까지 통학

파주초 5학년 시절부터 축구를 시작한 조영증은 처음에는 공격수로 뛰었다. 파주초의 중심 공격수로서 활약하면서 이름을 알렸고, 그것을 계기로 축구명문인 중동중의 러브콜을 받았다.

“중학교 때까지는 공격수로 뛰었죠. 파주초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기에 중동중에 입학할 수 있었어요. 당시에는 중동중에 들어가려면 축구를 꽤나 잘해야 했습니다.(웃음) 사실 그 무렵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가야 성공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저 역시도 그랬고요. 당시 중동중이나 배재중, 한양중 등이 명문이었는데, 전국에서 축구 잘한다는 아이들이 몰려왔죠. 저도 테스트를 받고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에 친척이 없었고, 중동중 역시 숙소가 없었기에 조영증은 매일 통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파주에서 서울역까지 가고, 거기서 다시 중동중이 있는 무교동까지 버스로 가는 생활이었다. 물론 집에 돌아올 때도 똑같은 과정을 거쳐야 했다.

“더군다나 학교에 운동장이 없어서 오전수업을 마치고 오후에는 미아리까지 이동해 훈련하곤 했어요. 집에 돌아오면 밤 10시쯤 되는데, 거의 하루 종일 차를 타고 다니는 셈이었죠.(웃음) 한창 성장기에 잠도 제대로 못자고, 고생하다보니까 키가 엄청 작았죠. 나중에 중대부고 입학해서 학교 숙소에서 잘 먹고 잘 자면서 급격하게 성장했던 기억이 납니다.”

3년간의 파주-중동중 통학 과정에서 조영증은 이영무(현 안산할렐루야 단장)라는 ‘호적수’를 처음 대면하기도 했다. 당시 이영무는 파주와 가까운 능곡에서 경희중까지 통학을 했었다. 학교를 가는 시간과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비슷해 기차에서 자주 만나곤 했다.

“거의 매일 기차에서 만났던 것 같아요. 제가 먼저 파주에서 타고, 능곡에서 그 친구가 탔었죠. 서울역까지 동행하고, 거기서 헤어지곤 했어요. 그 때부터 서로 ‘저 친구는 보통이 아니구나’라는 감이 왔죠. 이영무는 작지만 악바리였고,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청소년 시기부터 친구이자 라이벌이었습니다.”

중대부고로 진학..수비수로 포지션 바꾸다

중동중을 졸업한 조영증은 중동고가 아닌 중대부고를 선택했다.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중대부고의 감독이었던 이우진 선생의 존재였다. 조영증은 이우진 선생의 지도법에 크게 감명 받았다고 밝혔다.

“당시 이우진 선생님은 지도법이 남다르셨어요. 대부분 체력훈련만을 강조하던 시절이었는데, 이 선생님은 기술적인 부분을 많이 가르쳐주셨죠. 지도법 자체도 아주 세밀해서 많이 배웠습니다. 더군다나 숙소 등의 환경도 좋았었죠.”

“재미있는 추억이 있는데, 중대부고로 시험을 치러 가는데, 전날 중동고 선배한테 잡혀서 시험장에도 못 갔어요. 그래도 마음먹은 곳으로 가겠다고 해서 집에서 6개월을 쉬웠었죠.(웃음) 당시에는 등록이 까다롭지 않아서 학교에서 훈련도 하고 시합도 나가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결국 고교 1학년을 두 번 다닌 셈이었어요.”

중대부고에 입학해 안정적인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왜소했던 조영증의 키와 몸무게도 부쩍 좋아졌다. 그리고 이우진 선생의 조언에 따라 수비수로서 보직을 변경했다. 이것은 조영증의 축구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터닝 포인트였다.

“제가 볼 센스나 기술은 괜찮았지만, 스피드가 떨어졌어요. 그러다보니 공격수로서 능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웠죠. 그런 타이밍에 이 선생님께서 수비수로 전환하는 것이 어떠냐고 말씀하셨죠. 저는 선생님 말씀을 100% 믿었기 때문에 섭섭한 것 없이 수비수를 받아들였습니다. 머리를 써서 수비하는 제 스타일 역시 이 선생님의 영향이 컸죠.”

이러한 변신은 큰 성공이었고, 조영증은 고3 시절이었던 1972년에 처음으로 청소년대표팀에 선발되는 기쁨도 누렸다. 이 당시 멤버에는 허정무, 이영무, 신현호, 박창선, 최종덕, 유동춘, 박종원 등 재능 넘치는 선수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었고, 이들은 2년 후에는 화랑 대표팀의 주축으로 맹활약하게 된다.
1975년 박스컵에서 우승한 후 한국대표팀(윗줄 오른쪽에서 2번째가 조영증)
황금의 73-74학번 세대, 대표팀의 세대교체 이끌어

1973년에 중대부고를 졸업한 조영증은 자연스럽게 중앙대로 진학했다. 그리고 1975년부터는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하기 시작한다. 이 무렵 한국축구는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2차리그 탈락의 수모를 겪으며 세대교체의 바람이 불었고, 그로 인해 조영증을 비롯한 73-74학번 선수들이 1975년부터 대거 대표팀에 합류했다. 이른바 ‘황금세대’라고 불리던 재능 넘치는 유망주들이 빛을 보기 시작한 것.

“청소년대표팀 시절에는 대표팀 명칭이 ‘청룡’이었어요. 당시에 이회택, 김정남 선배님 등이 계셨죠. 그 때 2번의 연습게임을 가졌는데, 2번 모두 우리가 이겼어요. 그 다음에 공식경기도 한번 했는데 또 이겼고요. 결정적으로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성적이 좋지 않았고, 75년부터 우리 또래 선수들이 대거 대표팀에 합류하면서 ‘화랑’ 대표팀으로 불리게 됐죠.”

“많은 분들이 우리 세대를 황금멤버라고 하는데, 확실히 좋긴 했어요. 1년 선배로 차범근 감독이 있었고, 동기에 이영무, 신현호, 박상인, 1년 후배로 허정무, 박성화, 조광래, 김강남, 김성남, 최종덕, 박종원 등이 있었죠. 여기에 김진국 선배나 황재만-김호곤 선배 등이 가세해서 화랑 멤버를 이뤘습니다.”

이렇게 세대교체가 이뤄진 한국 대표팀은 강했다.
새로운 세대들은 자신들의 가치를 확실하게 입증했고,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비롯해 많은 성과를 올리며 한국이 아시아축구의 맹주임을 다시 한번 과시했다. 조영증은 대표팀의 수비라인을 이끌었고, 특히 박성화와의 호흡은 최고였다.

“이 때 멤버들이 대략 75년부터 80년대초까지 함께 호흡을 맞췄어요. 특히 수비라인은 거의 바뀌지 않았죠. 처음에는 김호곤 선배가 있었고, 그 후에는 저와 박성화, 황재만, 최종덕이 오랜 기간 함께 했습니다. 서로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의 콤비네이션이었어요. 특히 1년 후배인 박성화와는 서로 잘 맞았어요. 그 친구가 제공권이 탁월하고 성실했거든요.”
1977년 2월 친선경기에서의 한국 대표팀. 윗줄 왼쪽에서 3번째가 조영증
미국축구에 도전하다

중앙대 졸업 후 제일은행과 해병대를 거치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조영증은 1981년, 미국으로 진출했다. 펠레, 베켄바워 등을 끌어들이며 미국축구의 중흥을 외쳤던 북미축구리그(NASL)에서 러브콜이 온 것이었다. 조영증은 포틀랜드 팀버즈에 입단했다.

“당시에는 해외진출이 정말 어려웠어요. 모두가 해외진출을 꿈꿨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몇몇 선배들이 홍콩으로 진출한 정도였죠. 그러다가 78년에 차범근 감독이 독일로 진출하고, 허정무 감독도 네덜란드로 나가면서 우리도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렇지만 저는 수비수였기 때문에 해외진출이 더 어려웠죠. 그 무렵에 미국 초청경기를 자주 가졌고, LA에서 멕시코와 경기를 하기도 했어요. 그 과정에서 북미축구리그를 유심히 지켜봤고, 펠레나 베켄바워 등이 뛰는 것을 보고 나도 가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를 통해 각 클럽들에게 저를 소개했고, 4~5개 팀이 관심을 보였죠. 그 중에서 포틀랜드가 가장 적극적이어서 가게 됐습니다.”

물론 처음 경험하는 해외에서의 생활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일단 언어가 통하지 않았고, 대부분 잉글랜드 선수들이었던 리그의 특성에도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장시간의 이동 역시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국내에서는 대표선수로 활약했지만, 미국은 낯선 곳이었어요. 프로 생활도 처음이었기에 생소했죠. 미국이었지만, 대부분이 잉글랜드 선수들이었는데 체력과 체격이 우수하니까 막아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다가 말도 안 통하고, 미국이 워낙 큰 나라라 경기를 위해 이동하는데도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했죠.”

“그래도 나름대로 위기를 극복하고, 적응을 했어요. 처음에는 동료들이나 상대 선수들이 동양인 선수라고 무시했는데, 경기를 통해 인정을 받았고, 주축 선수로 활약할 수 있었습니다.”

1년을 포틀랜드에서 보낸 조영증은 팀이 해체되면서 82년부터 83년까지는 시카고 스팅즈에서 활약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프로축구가 시작되자 1984년에 귀국, 럭키금성(현 서울)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또한 1986년에는 멕시코 월드컵에 참가해 세계무대에 도전하기도 했다.

“미국에서의 3년은 저에게 매우 소중했습니다. 세계 톱리그는 아니지만, 좋은 선수들이 많았고, 세계축구를 접할 수 있는 기회였죠. 다양한 선수를 만날 수 있었고, 영어를 익힐 수 있었고, 축구 외적으로도 많은 축구계 인사들을 사귀면서 인맥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프로페셔널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었고, 이것이 제가 86 멕시코 월드컵까지 뛸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어요. 한국에 복귀한 이후에도 후배들에게 최고참으로서 프로 선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수해줄 수 있었죠.”

“당시 슈퍼리그가 시작되면서 럭키금성도 새로 창단했는데, 해병대 시절 지도해주셨던 박세학 감독님이셨어요. 간판 스타가 필요하다면서 저에게 와달라고 부탁하셨죠. 럭키금성 말고도 현대(현 울산)가 그 때 창단했는데, 제가 럭키금성으로, 허정무 감독이 현대로 갔었던 기억이 나네요.”
인터뷰 중인 조영증 기술교육국장 ⓒ스포탈코리아
영리한 수비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조영증은 한국축구 역사상 가장 영리한 수비수 중 하나로 꼽힌다. 순발력과 체력에서 약점을 보였지만, 영리함과 센스로 그것을 극복했다.

“사실 민첩성이나 순발력, 지구력이 좋지 않았어요. 그것을 커버하기 위해 제 나름대로 많이 연구하고 노력했죠. 경기 전체와 상대 공격수의 움직임을 읽기 위해 많이 연구했고, 제공권을 위해 점프 훈련도 많이 했어요. 예측을 통해 대처를 빨리 해 스피드의 약점을 커버하려고 했죠. 또 제가 몸은 좋은 편이라 몸싸움도 적극적으로 했고요.”

“후배나 제자들에게도 항상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선천적인 재능도 중요하지만, 결국 성공하려면 후천적인 노력이 더 중요하다. 반복훈련과 인내심, 노력이 따라줘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말이죠.”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제 경우에는 상대가 엉망인 플레이를 하면 오히려 당할 때도 있었다는 거예요. 제가 예측 플레이가 장기인지라 상대가 축구의 관점에서 볼 때 정상적인 플레이를 하면 거기에 맞춰 예측하고 막을 수 있죠. 그런데 상대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엉망진창 플레이를 하면 오히려 예측이 안 되어 곤혹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지도자교육체계 구축에 일조

1987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후 조영증은 LG(현 서울) 감독과 U-16/U-19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 그리고 1997년 잉글랜드축구협회(The FA)가 주관하는 프리미어코스를 시작으로 2000년에는 아시아축구연맹(AFC)의 A코스, 2001년에는 최고단계인 프로페셔널 코스(P 코스)와 인스트럭터 코스를 이수했다. 2002년에는 AFC 지도자 강사 자격까지 획득했다. 2002년부터 2006년까지는 국제축구연맹(FIFA) 기술위원으로 활동하며 세계축구의 흐름을 익히기도 했다. 그리고 2002년 8월부터는 KFA에 들어와 기술교육과 관련된 행정업무를 계속해서 해오고 있다.

“지도자 교육을 받다보니 이게 한국축구 전체에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2002 월드컵이 끝난 뒤 KFA에 들어왔고, 계속해서 지도자 교육체계를 만들어 가는데 힘을 쓰게 됐습니다. 또한 유소년교육 역시 관심이 많아 권역별 유소년시스템을 구축하는데도 노력하고 있어요.”

“당시 회장님의 지시로 지도자 교육, 유소년 교육, 인프라를 축구 발전을 위한 3대 과제로 설정하고, FIFA나 AFC로부터 교육 커리큘럼을 적극 받아들여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그래도 각급 지도자 교육이 자리를 잡고, P코스 역시 자체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수준이 됐다는 점에 대해 뿌듯함을 느낍니다.”

이렇듯 지도 현장이 아닌 행정을 택한 조영증. 이 선택에 대한 후회는 없다. 앞으로도 한국축구 발전을 위한 행정적 지원에 힘쓰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 한 가지 덧붙인다면 그가 운영하고 있는 ‘조영증 축구교실’을 확대시켜 ‘조영증 축구 아카데미’로 발전시키고 싶다는 것이 그의 마지막 목표였다.

“지도자 복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사실 축구인들은 대부분 현장만을 선호해요. 그러나 행정 역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행정을 통해 한국축구의 발전을 꾀하고 싶어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현재 고향 파주에서 운영하고 있는 축구교실을 더 발전시켜 조영증 아카데미를 만들고 싶습니다. 15세 정도의 연령대까지 팀을 만들어 유소년들을 키워내고 싶어요. 그 이후에는 어디에 가서도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인터뷰=이상헌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09년 9월호 '나의 선수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신고
Posted by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BLOG main image
by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공지사항

카테고리

전체보기 (125)
사진으로 보는 한국 축구 (4)
K리그 역사 바로 알기 (9)
K리그의 전설 (42)
K리그 꿈의 구장 (2)
축구인 인터뷰 (68)
K리그 역대 순위표 (0)
K리그 역대 수상 내역 (0)
K리그 역대 엠블럼 (0)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Total : 117,367
Today : 55 Yesterday : 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