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4강신화의 주역으로 황색 펠레로까지 불리웠던 신연호 ⓒ스포탈코리아
1983년 멕시코 U-20 월드컵은 한국축구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한국 U-20 대표팀은 ‘붉은 악마’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며 4강에 진출, 세계축구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리고 세계를 놀라게 한 ‘붉은 악마’의 10번 유니폼을 입고 종횡무진 활약한 신연호(45)는 3골을 몰아넣으며, ‘황색 펠레’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신연호가 기록한 3골은 아직도 한국 선수들이 FIFA 주관 대회에서 기록한 대회 최다골이다.

이후 현대(현 울산)에서 8년간 프로 생활을 했던 신연호는 선수 생활 내내 따라다녔던 류마티스성 관절염으로 인해 U-20 대표팀 시절 세계를 놀라게 했던 플레이를 재현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총 170경기에 나서 12골-7도움을 기록하며, 꾸준한 K-리거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 1995년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전북현대 코치와 호남대 감독, 대구 FC 수석코치 등을 거치면서 능력 있는 지도자로 인정받았으며, 현재 SBS 스포츠 축구해설위원으로 활약하고 있기도 하다.

축구공과 항상 함께 했던 어린 시절

여수서초를 다니던 신연호는 하루 종일 축구를 하고 다니던 ‘사커 보이’였다. 어린 아이들이 놀만한 거리가 없었던 당시로서는 축구는 최고의 놀이였다. 신연호 역시 동네 골목과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축구로 시간을 보냈고, 당시 여수서초 축구부를 만든 지 1년이 되었던 김성 감독(현 전남 교육위원)에 의해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하게 됐다.

“그 시절에는 동네 친구들과 할 수 있는 놀이가 축구밖에 없었어요. 자연히 축구를 접하게 됐는데, 제가 축구하는 것을 김성 선생님이 보시고 축구부에 들어올 것을 권유하셨죠. 그 때가 4학년이었는데, 김성 선생님께서 선수마다 각각 축구공 하나씩을 선물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 때만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항상 볼을 지니면서 감각을 익히라는 주문이셨고, 실제로 항상 볼을 지니면서 볼과 함께 생활했죠. 그것이 볼에 대한 감각을 높이는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당시 수비수와 미드필더를 오가며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했던 신연호는 팀을 소년체전과 전국 시도대항대회 우승 등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 선수들이 그대로 여수 구봉중으로 진학해 역시 전국의 강호로 군림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구봉중이 축구가 강한 학교가 아니었는데, 우리가 진학하면서 전국대회 준우승도 하고 그랬습니다.(웃음)”

금호고에서 황금시대를 보내다.

여수에서 초-중을 다닌 신연호는 광주 금호고로 진학하며 여수를 떠났다. 그리고 금호고는 호남 지역 최고의 유망주들이 모두 집결해 고교축구계를 평정했다. 당시 금호고에는 신연호를 비롯해 김상호(현 강원FC 수석코치), 김판근(현 김판근 축구아카데미 대표), 황영우(현 광주축구협회 이사), 최수용(현 금호고 감독) 등이 함께 하면서 대통령금배와 대구MBC배 등을 제패했다.

“당시 호남 지역의 유망주들 중에서 여범규 등이 광주 숭실고로 진학했고, 저나 김상호, 김판근, 황영우, 최수용 등이 금호고로 갔었죠. 우리가 8회 졸업생인데, 아마 그 때가 금호고 최고의 전성기 중 하나로 기록될 만 했습니다.(웃음) 전국대회에서도 상대와 연달아 3골차 이상으로 승리하는 등 정말 완벽하게 우승을 차지했으니까요.”

금호고에 진학하면서 미드필더로 확실히 자리를 잡았던 신연호는 고교 2학년말부터는 스트라이커로 보직을 변경했다. 그리고 폭발적인 득점력을 보여주며 순조롭게 포지션 변경에 성공했다. 그는 고교 3학년에 올라간 뒤 대구MBC배와 대통령금배에서 2대회 연속 득점왕에 등극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교 최강으로 손꼽혔던 금호고는 의외로 고전하며 대구MBC배 우승 하나에만 만족해야 했다.

“사실 우리가 고3이 됐을 때는 전국대회를 휩쓸 거라는 예상도 많았었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선수들이 많다보니까 서로 간에 약간씩의 미묘한 경쟁이 있었던 것 같아요. 대구 MBC배에서 우승한 다음에 U-19 대표팀에 저를 포함해서 3명이 차출됐는데, 다녀와서 동료들과 약간의 서먹함 등이 생긴 것 같더군요. 그러면서 미묘하게 팀이 흔들리면서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고는 했어요. 그것을 경험하면서 팀웍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1983년 멕시코 4강 신화의 주인공들 (윗줄 왼쪽에서 4번째가 신연호) ⓒ월간축구
청소년대표팀에 발탁, 멕시코 4강 신화의 시작

멕시코 4강 신화로 아직까지 기억되는 1983년 U-20 대표팀(감독 박종환). 그 신화의 시작은 1982년 U-19 대표팀이 출범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신연호 82년에 역시 생애 첫 대표팀 발탁의 기쁨을 맛보며 박종환 사단에 합류했다.

“고3때 팀이 처음으로 출범했습니다. AFC U-19 챔피언십에 참가하기 위한 팀이었죠. 사실 제가 대표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전통적으로 호남 쪽에서는 대표가 많이 나오지 않았고, 그 때문에 호남 지역 선수들은 소외됐다는 생각을 많이 갖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대표에 뽑히고나니까 정말 어안이 벙벙했죠. 대표팀 유니폼을 몇 번씩이나 쳐다보곤 했습니다.(웃음) 지금 돌이켜봤을 때 우리 세대가 호남 지역 대표 발탁의 선두주자 역할을 해줬다는 자부심이 생깁니다.”

그러나 신연호의 대표팀 생활이 처음부터 순조롭지는 않았다. 당시 AFC U-19 챔피언십은 동-서 아시아로 나눠 지역예선을 치렀고, 각 지역 1-2위팀이 본선에 올라 4개국이 풀리그로 우승팀을 가리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U-19 대표팀은 중국, 북한에 이어 동아시아 지역예선 3위를 차지하며 본선티켓을 획득하는데 실패했다.

“북한과 4강전에서 맞붙었는데, 우리가 졌어요. 결승 진출에 실패하면서 본선행이 좌절됐죠. 그래서 사실 3-4위전에 대한 의욕이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당시 박종환 감독님이나 오완건 단장님께서 여기까지 왔는데 3위라도 해야 한다고 선수들을 독려했고, 결국 3위를 차지했습니다.”

일이 잘 풀리려고 그랬는지 북한이 아시안게임에서 난투극을 벌이는 바람에 AFC의 징계를 받았고, 결국 북한 대신 3위를 차지했던 한국이 중국과 함께 U-19 챔피언십 본선에 진출하게 됐다. 또한 신연호를 비롯한 금호고 선수들은 고려대로 진학해 대학축구에 발을 내딛었다.

“북한 대신 우리가 나가면서 동아시아에서는 한국과 중국, 서아시아에서는 이라크와 UAE가 올라왔어요. 우리가 UAE, 이라크를 꺾으면서 2승 1무로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죠.”
멕시코 고지대를 대비해 마스크를 쓴채 훈련을 했던 U-20 대표팀 ⓒ월간축구
멕시코에서 기적을 일궈내다.

우여곡절 끝에 아시아챔피언에 오른 U-19 대표팀과 신연호는 이듬해인 1983년 멕시코에서 열리는 U-20 월드컵을 대비한 훈련에 돌입했다. 잘 알려졌듯이 고지대인 멕시코에 적응하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훈련을 펼치는 등 강도 높은 훈련이 이어졌다.

“당시 태릉선수촌에서 정말 훈련을 많이 했습니다. 멕시코가 2,500m 고지대여서 적응훈련이 필요했는데, 재정적으로 힘드니까 국내훈련만 했었어요. 고지대의 호흡곤란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체력훈련을 했고, 그 중에 마스크 훈련도 있었죠. 어찌 보면 현대 스포츠과학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훈련들이었지만, 그 훈련들을 이겨내면서 선수들의 정신력이 엄청나게 강해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경기 열리기 보름 전에 멕시코 현지로 들어갔는데, 생각해보면 정말 현명한 선택이었어요. 현지에 도착해서 1주일간은 시차와 고지대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코피도 쏟고, 뛰다가 공이 바운드되는데 얼굴에 맞아 쓰러지고, 새벽에 잠 깨고...1주일 정도 지나니까 조금씩 적응되기 시작하더군요. 또 서로 보이지 않는 선의의 경쟁심이 있어서 밥도 많이 먹고, 훈련도 죽기 살기로 하면서 힘든 것을 이겨냈어요. ”

그러나 처음 세계무대에 서보는 한국 선수들은 스코틀랜드와의 1차전에서 0-2로 패하고 말았다. 국제경기경험의 부족에서 나온 패배였다.

“스코틀랜드전에서 0-2로 패하면서 우리는 박종환 감독님께 단단히 혼날 각오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의외로 경기가 끝난 뒤에 감독님이 경기내용으로 봤을 때 잘했다고 칭찬해주시더군요. 2년여 동안 감독님과 함께 하면서 경기력에 대해 칭찬을 받은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어요. 그 이야기를 듣자 자신감이 확 생기더군요.(웃음) 그러면서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죠.”

결국 U-20 대표팀은 홈팀 멕시코와의 2차전에서 2-1 역전승을 일궈냈다. 멕시코에게 전반 10분 만에 선제골을 내줬으나 전반 29분에 노인우의 동점골이 터졌고, 경기 종료 1분을 남기고 신연호가 극적인 역전골에 성공하며 기적을 만들어냈다. 그 여세를 모아 조예선 마지막 경기였던 호주전에서도 2-1 승리를 거두며 2승 1패를 기록, 스코틀랜드에 골득실이 뒤진 2위를 차지하며 8강행에 성공했다.

“홈팀인 멕시코에 역전승을 거두면서 불씨를 살렸어요. 그 승리 덕분에 탄력을 받아 호주전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죠. 그렇게 8강에 오르게 되니까 자신감이 더욱 상승했고, 8강부터는 단판승부니까 더 변수가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멕시코전에서의 신연호 ⓒFIFA
U-20 대표팀이 8강에서 만난 상대는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였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신연호는 혼자 2골을 몰아넣으며 우루과이를 2-1로 격침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고, 세계 언론으로부터 ‘황색 펠레’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우루과이와 막상 경기를 하니까 큰 차이가 없더라고요. 우리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죠. 제가 후반 초반에 선제골을 넣고, 이후에 동점골을 허용했어요. 연장전에서 제가 다시 골을 넣었는데, 그것이 결승골이 되었습니다.(웃음)”

그러나 거칠 것 없었던 U-20 대표팀이 4강에서 만난 상대는 브라질이었다. 베베토와 둥가, 조르징요 등 이후 세계축구를 호령했던 빅 스타들이 포진해 있던 브라질을 상대로 U-20 대표팀은 김종부가 선제골을 넣는 등 선전을 펼쳤다. 그러나 역시 브라질의 벽은 높았고, 1-2 역전패를 당하며 4강에 만족해야만 했다.

“확실히 브라질은 다르더군요. 8강 상대였던 우루과이와 비교한다면 공격력에서는 별 차이가 없었어요. 그런데 브라질의 수비력이 뛰어났습니다. 우루과이는 우리가 공격을 하면 많이 흔들리는 모습이었는데, 브라질은 수비가 단단했어요. 결국 그 대회에서 브라질이 우승을 차지했는데, 역시 성과를 내려면 수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기적을 함께 만들어낸 박종환 감독

멕시코 4강 신화를 일궈낼 수 있었던 것에는 박종환 감독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신연호 역시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부분. 박 감독은 강렬한 카리스마와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신연호를 비롯한 선수들을 조련했고, 이들은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사실 굉장히 무서운 분이신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밖에서 보는 시선과는 조금 달라요. 엄하고 무서운 점은 있으시지만, 같이 생활해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에요. U-20 대표팀은 아니고 국가대표 시절 메르데카배에 참가했을 당시인데, 경기가 끝나고 동료 몇 명과 감독님 몰래 빠져나와 밤늦게까지 논 적이 있었어요. 당시 저는 부상으로 경기에 못나가는 상황이라 따라 나갔었는데, 감독님에게 딱 걸리고 말았죠.”

“생각 끝에 단체로 감독님께 찾아가서 죄송하다고 빌었어요. 그러자 감독님이 의외로 ‘이 따위로 할 거야? 오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다. 누구나 실수는 있다. 앞으로 잘해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너무 감사하고 미안하고 그랬습니다.(웃음) 이후 경기에서 정말 집중력을 갖고 최선을 다하면서 메르데카배 우승을 차지했죠.”

“무엇보다 워낙 상대팀 분석을 잘하시고, 우리 팀과 전체 경기의 맥을 짚는 것이 탁월하셨어요. 경기 중에도 감독님이 지시를 내리시면 딱 들어맞아요. 보통 사람은 절대 넘볼 수 없는 경지이셨던 것 같아요. 다만 대표팀에서는 모두들 특급 스타들이다보니 의사소통이 잘 이뤄지지 않아 감독님과의 충돌이 일어나신 것 같습니다. 어쨌든 박 감독님이 그냥 성적이 내는 것이 아니에요. 다 이유가 있는 거죠. 우리가 혼날 짓도 많이 했지만, 서로 신뢰가 있었고, 감독님이 무섭긴 해도 제자들 챙기는 의리가 있으신 분이셨습니다.”
88올림픽대표팀에서 박종환 감독과 다시 만난 신연호(가운데줄 오른쪽에서 3번째) ⓒ월간축구
멕시코 영웅의 귀환, 그러나 부상 악몽의 시작

기적을 일궈내고 한국에 돌아오자 신연호는 축구영웅의 대접을 받았다. 88 서울올림픽에 대비해 구성된 88대표팀에도 선발되면서 성인 국가대표로도 발돋음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그 해 겨울에 발목을 다친 신연호에게 축구인생 내내 따라다니며 고통을 준 부상의 악몽이 모습을 드러낸 것. 당시 병원에서는 선수생명이 힘들다는 말을 했을 정도로 심각했다.

“양 쪽 발가락에 류마티스성 관절염이 처음 왔는데, 그것 때문에 고려대 병원에 1년 사이에 7번을 입원했어요. 어린 시절부터 혹사를 해서 관절에 퇴행성이 빨리 온 것이었죠. 관절마디가 윤활유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그 부분이 메마르니까 마찰이 생기고 손상이 온 거예요. 이게 정말 사람을 미치게 하더군요. 차라리 부상을 당해서 뼈가 부러지거나 하면 언제 뼈가 붙고 회복될 수 있는지 알 수 있는데, 이건 시간을 기약할 수 없었어요. 의사도 운동하기 쉽지 않을 거라고만 이야기하고...”

“그래도 축구선수가 아닌 다른 길은 생각한 적도 없기 때문에 무리를 했죠. 살을 태우는 뜸도 들이고, 민간요법도 하고, 병원도 꾸준히 다녔어요. 통증이 오면 쉬고, 조금 원활해지면 다시 뛰고 그랬습니다. 프로에 가서도 3년 주기로 나타나더군요. 그 때문에 다른 부위도 부상이 오고, 몸에 점점 탄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도 걸을 수만 있으면 아픈 것을 참고 뛰곤 했었는데, 결국은 고통이 너무 심해져서 32세에 은퇴를 결심했어요.”

신연호가 말했듯이 발가락의 고통이 심한 가운데에도 그는 매년 일정 경기 이상을 소화하며 꾸준한 활약을 펼쳤다. 프로 데뷔 첫 해인 1987년에 9경기 출장에 그쳤으나 2년차부터는 매년 20경기 이상씩 소화했다. (은퇴연도인 1994년에만 15경기에 출장) 포지션도 예전 화려했던 시절의 스트라이커나 공격형 미드필더가 아니라 수비적인 역할을 많이 맡았다. 신연호는 최종 스위퍼까지도 커버했다. 그러나 결국 부상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1995년 전북이 창단되면서 코치로 부임해 새로운 축구인생을 살게 되었다.

지도자로서의 능력 인정받아

전북에서 오랜 기간 코치 생활을 했던 신연호는 최만희 감독이 그만둠과 동시에 전북을 떠나 2002년에 호남대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신인 감독답지 않은 노련함으로 전임 서현옥 감독에 이어 호남대를 대학축구의 강자로 확고히 자리 잡게 만들었다. 수도권의 축구명문대학들에 비해 힘든 스카우트 여건이었지만, 신 감독은 조직적이고 빠른 축구를 통해 성공을 거뒀다.

“호남대에서 5년을 보냈는데, 감독을 하다보니까 팀의 전체적인 훈련 일정이나 선수 구성, 조화 등에 대해 총괄하면서 축구에 대한 눈이 더욱 넓어졌어요. 제 나름대로 추구하는 축구를 하려고 많이 노력했죠. 아무래도 스카우트에서 수도권 대학에 밀리긴 하지만, 이 연령대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선수들이잖아요.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것을 만회할 수 있는 것은 2명-3명-4명-11명이 힘을 합치는 방법밖에 없어요. 조직 훈련에 중점을 두면서 선수들 각자가 제가 주문한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1명의 생각이 11명의 생각과 같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선수들에게 도전적인 플레이를 주문했어요. 성적이라는 것은 제가 짊어진 문제이지만, 도전정신은 선수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에요. 사실 대학에서 매년 몇백명의 졸업생들이 나오지만, K-리그 드래프트에 뽑히는 선수들은 일부입니다. K-리그의 빠른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죠.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학 시절부터 현대축구가 원하는 빠른 축구를 해야 했어요. 프로팀 코치로 오래 일했기 때문에 프로의 훈련 시스템을 도입해 선수들의 미래를 준비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전북에서 오랜 기간 코치 생활을 했던 신연호는 프로에서의 훈련 시스템을 많이 도입했고, 그것은 선수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K-리그에 진출할 때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염기훈(울산)-황지수(포항)-김동찬(경남)-최성현-문민귀(이상 수원) 등의 K-리거들을 배출한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호남대 감독 시절의 신연호 ⓒ스포탈코리아
후배들에게 조언 - 기본기 훈련에 집중, 철저한 자기관리 필요

신연호는 축구선배로서 후배들에게 조언하고 싶은 것은 2가지라고 밝혔다. 첫 번째는 기본기 훈련에 집중하라는 것.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볼을 갖고 다니면서 볼 다루는 기술을 연마했어요. 그리고 금호고 시절 김상구 감독님께서 기본적인 패스와 킥, 정확한 자세 훈련을 많이 시키셨는데, 그것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항상 기본에 충실해야만 좋은 선수가 될 수 있습니다.”

신연호가 조언하고 싶은 두 번째는 철저한 자기관리. 신연호 스스로도 83 멕시코 4강 신화 후 쏟아지는 관심과 인기로 인해 자기관리에 소홀했던 시절이 있었기에 후배들에게 더욱 진지하게 조언했다.

“저도 한창 때는 하루에 팬레터만 100통 이상이 오곤 했었어요. 거리에 나가 택시를 타도 택시비를 받지 않겠다는 기사 분도 계셨고, 식사를 해도 그냥 가라고 하시는 분도 계셨죠.(웃음) 그러다보니 조금 나태해진 부분도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에이전트나 언론에서 선수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하지 못하는 시절이었으니까 더욱 그랬죠.”

“지금은 각급 대표팀들이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지만, 그 시절에는 대회 마치고 해산하면 끝이었어요. 또 에이전트가 있어서 선수관리를 해주는 것도 아니었고요. 선수들도 스스로 자기관리를 할 수 있는 마인드가 아니었고요. 이런 부분은 요즘 선수들에게도 마찬가지예요. 그 때보다 여러 여건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위로 올라가는 것은 쉽지만, 그 자리에서 철저한 자기관리를 하지 못한다면 금방 추락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소속팀을 옮기는 과정에서 너무 무리수를 두는 경우가 많아요. 물론 상황에 따라서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고, 자신에게 합당한 대우를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선수가 자신의 현재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채 팀을 옮겨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사라져가는 경우가 많아요. 주위에서는 다른 팀으로 이적할 경우 생기는 이득이 있다보니까 이적을 권유하고, 무리하게 이적을 추진하곤 하는데, 결국 그 부작용은 선수가 떠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 역할에 충실한 선수로 기억되고 싶어

어찌 보면 아쉬움도 많이 남는 선수 생활이었지만, 신연호는 담담하다. 그저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던 선수’로 기억되고 싶을 뿐이다. 이것은 지도자로서도 마찬가지이다.

“저도 한때는 최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었죠. 그러나 최고라는 찬사보다는 항상 저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어요. 멕시코 U-20 월드컵 당시 3골을 넣고 스타가 되었지만, 그것은 당시 11명의 라인업 중에 제가 골을 넣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욕심을 내기보다는 저에게 주어진 임무에 충실한 선수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사실 축구를 아는 사람은 보입니다. 누가 팀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선수인지 말이에요.”

“지도자로서 최고 레벨인 K-리그에서 최고의 팀을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그 무대에서 인정받는 지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아직은 더 많이 노력해야겠죠.”


인터뷰=이상헌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09년 3월호 '나의 선수 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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