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의 포스트 플레이어였던 김재한 현 KFA 부회장 ⓒ스포탈코리아
현재 대한축구협회(KFA) 상근 부회장을 맡고 있는 김재한(61세)은 70년대 한국축구계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공격수 중 한명이다. 지금도 장신에 속하는 190cm의 키는 1970년대에는 그 어떤 선수도 감히 대적을 하지 못할 정도의 높이였다.

김 부회장은 이러한 압도적 높이를 이용해 한국 대표팀의 주축 스트라이커로 자리 잡아 아시아 무대를 주름잡았다. 1979년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10여년간 지도자 생활을 거쳐 주택은행(현 국민은행)에서 은행 업무를 맡아 영업본부장까지 오르기도 했다. 2005년부터 KFA 이사로 축구계에 돌아와 2007년부터는 부회장으로서 축구 행정에 힘쓰고 있는 중이다.

다양한 종목을 섭렵했던 운동소년

경북 김천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신체조건이 월등했던 김 부회장은 워낙 운동을 좋아해 축구 뿐 아니라 배구, 야구, 육상 등을 섭렵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특히 대구고에서는 야구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만약 그가 2학년이던 시절에 대구고 야구부가 해체되지 않았다면 축구선수 김재한은 볼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결국 김 부회장은 고3이 될 무렵, 전문적으로 축구를 하기 위해 대구 성광고로 전학을 가면서 본격적인 축구인생을 시작했다.

“어렸을 때는 키가 커서 배구 대표로 나가기도 하고, 육상대회에 높이뛰기 선수로 나간 적도 있었죠.(웃음) 당시에는 전국체전에 경북대표로 참가하기도 했고, 이후에 야구와 축구, 육상도 하고 그랬죠. 학교 다닐 때는 워낙 운동을 좋아해서 여기저기 불려 다녔습니다. 중학교 시절부터 축구를 하긴 했지만, 감독-코치의 제대로 된 지도를 받는 것은 아니었어요. 대구고 시절에는 삼성 라이온즈의 초대 감독이셨던 서영무 선생님이 감독이셨는데, 2학년 말에 야구부가 해체되어 결국 축구를 하게 됐습니다.”

“고3이 되면서 전문적인 축구를 하기 위해 대구에 있는 성광고로 전학을 갔죠.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전문가들의 지도를 받으며 축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대구는 축구에 있어서는 불모지였다. 자연히 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1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던 김 부회장은 대학 진학에 실패하고 말았다. 다행히 그의 가능성을 인정했던 제일모직에 연습생으로 들어가 축구를 계속 할 수 있게 되었다. 제일모직에서 1년간 축구를 했던 그는 장경환 감독의 눈에 띄어 건국대 유니폼을 입게 됐다.

“대학에 진학 못한 상황에서 제일모직 축구팀이 대구로 동계훈련을 왔는데, 제가 눈에 띄었나 봅니다. 연습생으로 들어가서 1년간 훈련을 같이 하는데, 건국대 장경환 선생님이 저를 좋게 보셨어요. 그래서 1년 만에 건국대에 입학하게 된 거죠.”

건국대에서 축구인생의 전환점 마련

건국대에서의 4년은 김재한 부회장에게 더없이 소중한 시절이다. 키만 컸지 축구의 기본은 갖추지 못했던 그는 장경환 감독의 철저한 조련 속에 무서운 스트라이커로 성장했다. 장 감독은 특히 헤딩연습을 집중적으로 시키며 김 부회장을 포스트 플레이어로서 키웠다.

“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 늦긴 했지만, 신체조건이 워낙 좋아서 그런지 지도자 분들이 저를 키워보려고 하셨습니다.(웃음) 무엇보다 건국대에서 장경환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면서 축구에 눈을 떴죠.”

“펜듈볼이라는 훈련기구가 있어요. T자형으로 기구를 세우고 줄에 축구공을 달아서 헤딩연습을 하는 기구인데, 독일 분데스리가에 코칭스쿨을 다녀오신 분이 권장해서 학교에 설치했었거든요. 그 기구로 헤딩연습을 상당히 많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건국대에서 축구의 기본을 익혔던 김 부회장은 졸업 후 제일모직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러나 2년 만에 제일모직이 해체하고, 그 와중에 금융팀들의 창단 러시가 일어나면서 주택은행 유니폼으로 갈아입게 되었다. 당시 주택은행 사령탑이었던 민병대 감독 밑에서 김 부회장은 최고의 플레이를 펼쳤고, 1972년에 주택은행이 전국대회 4관왕을 달성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결국 김 부회장은 그 해에 25세의 나이로 국가대표팀에 선발되는 기쁨을 맛봤다.
1973년 대표팀 시절 동료였던 차범근-박이천(왼쪽부터)과 함께
잊지 못할 호주와의 서독월드컵 예선

1972년부터 국가대표팀에 붙박이 멤버로 자리 잡은 김 부회장은 1973년 서독 월드컵 아시아예선을 통해 축구팬들의 기억에 남을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기 시작했다. 특히 호주와의 최종예선 플레이오프 2차전은 김 부회장으로서는 절대 잊을 수 없는 경기였다. 태국, 홍콩, 말레이시아, 이스라엘 등을 모두 물리치고 최종예선에 오른 한국은 호주와 홈 & 어웨이로 대결을 펼치게 됐다. 호주에서 열렸던 원정 1차전을 0-0으로 비긴 한국은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다.

“당시 멤버가 정말 화려했죠. 차범근, 박이천, 이차만, 고재욱, 김진국, 김호곤, 김호, 김정남, 정규풍, 이세연, 변호영 등 최고의 선수들이었습니다. 부담스러웠던 호주 원정에서도 비겼기 때문에 기세도 좋았고요.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2차전에서도 전반에만 2골을 넣으며 앞서나갔어요. 더군다나 전반 20분에 제가 선제골을 넣었죠. 35분경에 고재욱이 2번째 골을 넣었고요. 그 때만 해도 후반에 2골을 내주고 2-2로 비길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결국 선수들의 국제대회 경험이 부족했던 탓이었어요. 홈에서 전반에만 2골을 넣은 상황에서 비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죠.”

다 잡은 토끼를 놓치고 2-2 무승부를 기록한 한국은 3일 후에 제 3국인 홍콩에서 재대결을 펼치게 됐고, 이미 기세가 꺾인 상황에서 0-1로 패하고 말았다. 서독 월드컵 진출의 꿈이 무산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홈에서 다 이긴 경기를 놓쳐 분위기가 가라앉은 상태였고, 호주는 그 반대였죠. 더군다나 부상으로 박이천, 정규풍 선수가 뛸 수 없었습니다. 경기내용은 거의 5:5였는데, 상대가 30m 거리에서 중거리슛을 터트려 실점을 했죠. 이세연 골키퍼가 손 쓸 수 없는 슛이었어요.”

“재미있는 것은 당시 호주 대표팀 감독이었던 분이 작년에 여자축구 교류 때문에 한국을 방문하셨어요. 제가 축구협회에서 근무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오셨는데, 그 분이 ‘당시 한국에서 생각나는 선수는 당신과 미스터 차(차범근)밖에 없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러면서 ‘당시 한국은 투지와 파워가 좋았다. 아시아에서 수준 높은 경기를 했다’고 칭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서독 월드컵 참가로 호주축구가 한 단계 성장했다는 이야기도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아쉬움이 크더군요. 당시 한국 멤버들은 대단했었고, 그 선수들이 월드컵을 경험했더라면 한국축구의 수준은 더 높은 단계로 발전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공권으로 아시아를 호령하다.

김재한 부회장이 국가대표팀에 자리 잡으면서 한국은 ‘포스트 플레이’를 활용한 공격에 많은 비중을 뒀다. 차범근이나 김진국, 정규풍, 박이천 등 좌우에 돌파력이 좋은 윙어들을 보유했던 한국은 중앙에 버티고 있는 김 부회장의 머리를 겨냥한 패스로 재미를 봤다. 당시 아시아에서는 김 부회장의 신장에 대항할 만한 수비수가 거의 없었다.

“당시 좌우 측면에 차범근, 김진국, 정규풍, 박이천 등 스피드와 기술, 킥력을 갖춘 선수들이 있었어요. 저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신장에 헤딩력이 있었고...아시아에서는 한국을 당할 나라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헤딩포착능력이 좋은 편이었는데, 낙하지점 찾는 것이 좋았고, 기본적인 키에다 점프력도 있었죠. 그래서 다른 선수들보다 상당히 높은 지점에서 볼을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또 체공시간도 긴 편이라 점프해서 좌우를 훑어보고 패스할 정도의 여유가 있었어요. 아시아에서는 저와 제공권을 다툴 만한 수비수가 거의 없었죠. 호주나 이스라엘 선수들 중에 저와 비슷한 신장의 선수는 있었지만, 점프력과 체공력이 제가 더 좋으니까 그 선수들도 애를 먹더군요.”

그렇지만 김 부회장이 머리로만 골을 넣는 공격수는 아니었다. 지금의 우성용(울산)도 마찬가지이지만, 김 부회장 역시 머리보다는 발로 넣은 골이 많았다.

“그래도 발로 넣은 골이 많았죠. 처음에는 헤딩으로 많이 넣었는데, 나중에는 바뀌었습니다. 제가 대표팀에서 36골인가를 넣었는데, 발로 골을 넣으면 ‘김재한이 발로 골을 넣었다’고 신문에도 나고 그랬었죠.(웃음) 키가 크니까 잔발보다는 성큼성큼 움직이는 스타일이었고, 헤딩을 중심으로 한 플레이를 많이 했었으니까요.”

“지금 우성용 선수처럼 발기술이 있지는 않지만, 몸을 이용해 문전에서 돌아서면서 슛을 하는 능력이 괜찮았던 것 같아요. 골에 대한 집착력도 있었고요.”

오랜 기간 대표팀 생활을 하면서 여러 선수들이 김 부회장과 전방에서 호흡을 맞췄다. 무엇보다 김 부회장의 신장을 활용할 수 있는 날카로운 크로스를 가진 선수들이 그와 찰떡궁합을 이뤘다.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김진국(현 KFA 기획실장)이다.

“김진국 선수와 가장 호흡이 좋았죠. 요즘 축구는 시간과 타이밍을 맞춰서 낮고 빠르게 크로스를 올리지만, 예전에는 문전으로 곱게 띄우는 스타일이었어요. 제가 키도 크고 점프력과 체공력이 있기 때문에 낙하지점을 빨리 찾아서 공중볼을 따냈죠. 기억을 돌이켜보면 김진국과 정규풍 선수가 저에게 크로스를 잘 올려줬던 것 같습니다. 특히 김진국 선수와는 콤비로 유명했죠. 키 차이도 많이 나는데 서로 호흡이 잘 맞았었거든요.”

“진국이와는 다른 추억도 있는데, 1978년에 동대문운동장에서 페루 클럽팀과 친선경기가 있었어요. 그 때 내가 헤딩을 하려는 순간에 진국이는 솟아올라서 광대뼈가 함몰되었던 적이 있죠. 그 때 이대부속병원으로 이송되어 수술을 했는데, 지금도 그 쪽 뼈가 조금 무너져 있습니다.(웃음)”

국가대표팀에서의 추억들

1970년대는 한국축구의 황금기라고 할 만 했다. 축구 대표팀은 국민적인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또한 지금과는 달리 모두 아마추어 선수들이었기 때문에 소속팀에 있는 시간보다 대표팀 훈련을 하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로 합숙을 오래 하곤 했다.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재미있는 추억들이 탄생했다.

“요즘은 개개인이 좋은 기술을 갖췄고 전술이해력이 좋기 때문에 짧은 합숙기간에도 전술적 지시를 듣고 응용해서 풀어나갈 수 있지만, 당시에는 그러지 못했죠.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는 3개월간 합숙하고 그랬습니다. 월드컵 예선을 앞두고는 거의 5~6개월을 합숙했던 것 같네요. 태릉선수촌을 보고는 오줌도 안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어요.(웃음)”

“당시에는 기합도 심했는데, 감독-코치들이 기합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선배들이 줬어요. 훈련도 힘들고 선배들도 무섭고 해서 합숙 중에 도망치는 선수들도 있었고..”

“그 때는 지금의 파주 NFC 같은 훈련장이 없어서 떠돌아다니면서 훈련을 해야 했습니다. 잔디구장 자체가 많지 않아서 당시 구리 부영아파트 부근에 원진레이온 공장이 있었는데, 그 안에 있는 잔디구장을 사용한 적도 많아요. 석유화학공장 안에 있는 거라 냄새가 아주 독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서울 이문동 중앙정보부 안에 있는 잔디구장에서도 많이 훈련했고요. 거기 들어갈 때는 신체검사를 받고 주민등록증 제출하고 방문목적도 기재하고 그래야 했어요.”

또한 김 부회장이 대표 생활을 하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외국 선수로 꼽은 것은 말레이시아 선수들이었다. 말레이시아는 한국과 가장 자주 맞부딪쳤던 팀이기도 하고, 한국을 많이 괴롭혔던 팀이기도 했다. 김 부회장은 자주 대결을 펼치면서 우정이 싹텄다고 추억한다.

“대표 생활을 하면서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메르데카배를 4번 나가서 모두 우승했었어요. 골도 많이 넣었죠. 그래서 그런지 말레이시아 팬들도 있었습니다. 당시는 말레이시아도 아시아에서 축구강국이었는데, 스위퍼를 봤던 소친온과 골키퍼인 아르무감 등은 아시아 톱클래스의 선수였어요. 그 선수들과 대회를 치르면서 친해졌고, 손짓발짓으로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몇 년 전에 그 선수들을 봤는데, 다들 잘 지내고 있다고 하더군요. 다만 아르무감은 세상을 떠났다고 해서 안타까웠습니다.”
인터뷰 중인 김재한 부회장 ⓒ스포탈코리아
대표팀 생활을 하면서 김 부회장은 민병대, 문정식, 최영근, 최정민, 함흥철 감독 등 여러 지도자들을 거쳤다. 각자 스타일이 다른 만큼 김 부회장에게 요구하는 플레이도 조금씩은 달랐다.

“민병대 선생님은 4-2-4 시스템을 사용하셨는데, 측면에서 크로스를 올려 헤딩을 떨어트려주는 플레이를 선호하셨죠. 제 포스트 플레이를 많이 활용하셨습니다. 굉장히 엄하고 무게감이 있으신 분이었고요. 최정민 선생님은 스트라이커가 빠르고 민첩하고, 해결능력이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함흥철 선생님은 선수들을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고 포용해주시는 분이셨어요. 선수가 아프면 직접 맛사지도 해주고, 선수들과 스킨쉽을 통해 신뢰를 쌓아 가시는 분이셨죠. 당시에 함 선생님을 김정남 코치님이 보좌하셨는데, 전술적인 부분은 김 코치님이 많이 담당하셨어요. 굉장히 합리적인 축구였고, 평소 훈련도 담백했어요. 몇 가지 패턴에 따른 반복훈련이 많았고요.”

“개인적으로는 민병대 선생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죠. 주택은행 감독도 하셨기 때문에 항상 같이 있었거든요. 당시에 그 분이 저에게 모델로 삼으라고 주문했던 선수가 있는데, 포르투갈의 토레스라는 선수였어요. 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에우제비오와 함께 뛰었던 선수인데, 헤딩능력이 대단했습니다. 그 선수가 헤딩으로 떨궈주면 주위 선수들이 볼을 잡아 골을 넣는 패턴이 많았어요. 민 선생님이 저에게 그런 플레이를 많이 요구하셨죠.”

또 하나, 김 부회장에게 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1978년 재팬컵이었다. 초대 대회에 초청받았던 한국은 한번도 맞붙은 적이 없었던 유럽과 남미의 명문 클럽들과 경기를 펼치며 새로운 경험을 얻었다. 서독의 보루시아 뮌헨글라드바흐(MG)와 브라질의 팔메이라스와 한 조에 속해 선진축구의 세계를 몸으로 느꼈던 것.

“ 그 당시에는 팔메이라스가 얼마나 대단한 팀인지도 몰랐어요.(웃음) 0-1로 졌는데, 별로 크지도 않은 선수들이 개인기가 대단하더군요. 그래도 경기내용은 대등했고, 저에게 몇 차례 기회가 오기도 했는데 득점에 실패했던 기억이 납니다. 보루시아 MG와는 전반에만 3골을 허용했어요. 후반에 저와 차범근, 김호곤이 만회골을 넣은 뒤 한골 허용해 3-4가 되었는데, 5분 정도 남겨놓고 계속 몰아부쳤습니다. 팔메이라스도 그렇고 보루시아 MG도 탑클래스 팀인데 그렇게 혼냈으니 우리도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다만 이런 것은 있었어요. 패스가 우리와 다르다는 느낌, 굉장히 빠른 스피드로 연결되더군요. 우리는 받기 좋게 굴려서 느리게 보내는데, 그 팀들은 패스가 정말 빨랐어요. 그러니 볼을 받은 이후에 시간-공간적으로 여유가 생길 수밖에 없죠. 고급축구였습니다. 우리에게도 값진 경험이었어요.”

다시 축구계로 돌아오다.

1979년, 32세의 나이로 현역에서 은퇴한 김 부회장은 10년간 주택은행 감독으로 활동했다. 이후 축구계를 떠나 은행 업무에 종사한 그는 성공적으로 적응하며, 주택은행(현 국민은행) 본점의 영업본부장까지 하게 됐다.

“은퇴한 뒤에 영업 파트에서 1년 정도 근무하다가 축구 감독을 맡으라고 해서 다시 축구계로 돌아왔었죠. 10년간 지도자 생활을 한 뒤에 다시 은행 업무로 돌아왔습니다. 운동장에서만 뒹굴다가 양복을 입고 근무하는 것이 낯설기도 했지만, 재미있기도 했어요. 가는 곳마다 성과가 좋아서 나중에는 본점의 영업본부장까지 하게 된 것이죠.”

이후 신용정보(주) 부사장으로 3년간 근무했던 김 부회장은 2007년부터 KFA 상근 부회장에 취임하면서 다시 축구계에 복귀했다. 이제 축구 행정 업무를 하게 된 김 부회장은 한국축구의 저변을 넓히는데 일조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분야는 다르지만, 행정 경험이 많다보니까 협회에서 도와달라고 요청이 왔어요. 이제 2년 정도 됐는데, 행정이란 것이 뒤에서 소리 없이 하는 것이지만 보람 있는 일이죠. 국내 각급 팀들의 발전을 위한 업무 지원도 해야 하고, 유소년 축구가 어떻게 발전해야 하는지도 고민해야 합니다. 보람 있고, 재미있게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후배 공격수들에게 조언한다면, 이제는 공격수가 신장이 좋은 것은 기본인 시대입니다. 과거처럼 포스트 플레이만 잘해서는 안 되죠. 그것은 기본으로 가지고 있고, 거기에 득점력, 위치선정능력, 예측능력, 볼이 없을 때의 움직임 등을 다 갖춰야 합니다. 그만큼 많이 노력하고, 생각도 많이 해야 하죠.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찬스를 놓치지 말고 움켜질 수 있게 준비해야 합니다.”


인터뷰=이상헌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08년 5월호 '나의 선수 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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