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위협적인 측면공격을 선보였던 한정국 ⓒ스포탈코리아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 신화를 쓰는 ‘대기만성’의 스타는 많다. 하지만 탄탄대로를 달리다 좌절을 겪은 자리에서 다시 희망의 꽃을 피워낸 사례는 흔치 않다. 지금까지 ‘나의선수시절’에 소개된 인물들이 전자에 가깝다면 이번 호의 주인공은 후자에 속한다. 호쾌한 질주에 이은 돌파력과 수려한 외모로 90년대 초중반 각광받았던 축구 스타, 한정국(39, 부산아이파크 전력강화팀장) 이야기다.

타고난 재능, 굴곡 없던 성장기

부산에서 나고 자란 한정국은 사하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축구와 연을 맺었다.
축구를 권유하는 주변인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축구에 빠지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남보다 좀더 빠른 다리를 갖고 있고,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놀기 좋아했던 천성이 축구팀과 조우하도록 이끌었다.

2년간 초등학교에서 기본기를 익힌 그는 집에서 다소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장평중으로 진학하면서 본격적인 축구 인생의 길에 올랐다. ‘낭중지추’라고 했던가. 타고난 재능은 그를 ‘신생팀’ 장평중에서 돋보이게 만들었고, 동래고와 쌍벽을 이루는 부산의 축구명문 부산상고(현 개성고) 진학으로 이어지게 했다.

“그 시절에 좀 잘 한다 했던 동기들은 모두 부산상고로 진학했어요. 부산상고와 동래고는 전통적인 라이벌 관계였는데, 우리가 뛰었던 당시에는 항상 부산상고가 우위를 지켰죠(웃음). 당시 동래고에서 뛰던 또래 선수가 최용수(FC 서울 코치), 김태완(광주 상무 코치), 박형주(현 동래고 감독) 등이었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본선에 참가했을 때(뒷줄 맨 왼쪽) ⓒFIFA
대학 1학년 때 올림픽대표팀 선발, 탄탄대로 질주

소속팀의 강세를 주도하며 고교무대를 평정하고 청소년대표에도 선발되었던 한정국은 대학으로 진학할 때도 별다른 장애물을 만나지 않았다. 고교 은사의 조언에 따라 한양대 유니폼을 입은 후에는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준비하는 올림픽대표팀에도 발탁되며 탄탄대로를 달렸다. 당시 그의 나이 만 19세. 신범철, 나승화, 서정원, 신태용, 임근재, 이문석 등이 발탁된 초기 멤버에서 그는 막내뻘에 속했다.

“기본적으로 2, 3년 터울이 나는 선배들이 있었고, 동기 몇 명과 제가 가장 어렸습니다. 올림픽대표팀은 수 차례 소집되고 해산하는 과정을 반복했는데, 저는 92년 올림픽 본선에 나갈 때까지 단 한번도 소집 명단에서 제외된 적이 없었어요.”

한정국은 올림픽대표팀 일원으로 친선경기와 예선경기, 본선 경기를 거의 모두 소화하며 5골의 기록을 남겼다. 올림픽대표뿐만 아니라 대학 선발로도 그의 이름이 빠진 적은 없었다. 태극마크를 달고 뛰었던 시간이 한양대 유니폼을 입고 뛴 것보다 더 많을 정도였다.

“사실 대학시절을 회고하려 해도 딱히 기억나는 사건이 없어요. 대표팀에 소집됐다가 잠깐 팀에 들어와 한두 경기 뛰는 식이었거든요. 동기들은 대학 축구팀 특유의 기강에 고생 좀 했다고 하던데 저는 비교적 편하게 지낸 셈이었죠.”

94년 드래프트 1순위로 일화 입단

엘리트 코스를 거친 한정국은 프로 무대에도 무난히 입성했다. 93년 프로축구에서 첫 우승을 일궈낸 일화(현 성남)가 다음 시즌 신인 드래프트에서 한정국을 1순위로 지명한 것.

당시 일화에는 사리체프(신의손), 안익수, 고정운, 신태용, 김경범, 이상윤, 박남열, 이영진 등 호화 멤버들이 포진해 있었다. 쟁쟁한 선배들 사이에서 입단 첫 해부터 주전으로 올라선 한정국은 94년, 95년 우승 주역으로 활약하며 일화의 ‘리그 3연패’ 위업에 일조했다.

“신인이었지만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던 때인 것 같아요. 대표팀에서도 계속 부름을 받는 상황이었고, 박종환 감독님도 저를 이뻐해주시니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이었죠.”

팀 성적이 좋았던 것도 그의 자신감을 강화시켰다.
“요즘 축구는 한두 골을 먼저 넣어도 불안하지만, 당시에는 한 골만 넣으면 이긴다고 생각했어요. 사리체프라는 대단한 골키퍼가 있었고 수비 자체도 워낙 강하고 터프했거든요. 또 나이 많은 선배들이 잘 이끌어주셨기 때문에 저는 묻어만 가도 잘 하는 선수가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1995년 K-리그 챔피언결정전 승리 후(중앙이 한정국-좌우에 신태용과 고정운)
94년 아시안게임서 맹활약, 한정국 전성시대

그야말로 ‘한정국 전성시대’였다.
94년 여름 미국 월드컵이 끝나고 곧바로 소집된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대표팀에도 어김없이 그의 이름이 올랐다. 아시안게임 대표팀 구성을 위해 프로경기장을 찾았던 비쇼베츠 감독이 전북을 상대로 맹활약한 한정국을 눈 여겨 보고 발탁한 것.

“국가대표에 선발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무척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당연히 대표팀에 뽑힐 거라고 생각했던 때였어요.”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은 한정국을 진정한 스타로 등극시킨 무대였다.
오른쪽 측면을 돌파하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호쾌했고, 이어지는 그의 날카로운 크로싱은 수 차례 한국에 공격 기회를 제공했다. 동료들과의 2대1 패스에 이어 상대 수비진 사이의 빈 공간을 빠져나가는 한정국의 모습은 보는 이들을 짜릿하게 만들었다.

특히 ‘숙명의 대결’로 높은 관심을 모았던 일본과의 8강전에서는 그의 장점이 모두 발휘됐다. 고정운과 함께 오른쪽 라인을 맡아 공격을 지원했던 한정국은 경기 내내 가벼운 몸놀림으로 날카로운 크로스와 상대 수비라인을 흔드는 패스를 공급했다. 3-2 대역전승의 주역은 2골을 쏘아 올리며 화려한 날갯짓을 펼친 황선홍이었지만, 한국의 두 번째 역전골을 어시스트한 한정국의 유연한 몸놀림은 시종 축구팬들의 시선을 붙들었다.

“돌이켜보면 제일 영광스러웠던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역시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때의 일본전인 것 같아요. 내용 자체도 3-2로 역전승을 거둔 것이었고, 그 경기를 통해 축구팬들에게 많이 알려졌으니까요. 상대에 선제골을 내줬지만 선수들 모두 최선을 다해 결과를 뒤집었던 경기라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전성기에 상무 입대, ‘너무 편하게 지냈다’

95년 일화에서 리그 3연패를 달성한 한정국은 박남열, 이영진과 함께 돌연 상무 입대를 지원했다. 소속팀의 이장수 감독이 “1년만 더 팀에서 뛰고 가라”며 만류했지만 이왕 군 복무를 해야 할 거라면 빨리 다녀오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섰다.

“편법으로 군 복무를 피하려는 선수들도 있었습니다만 저는 굳이 그렇게까지 회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3년의 공백기간이 생겨도 돌아와서 얼마든지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거든요.”

당시 상무는 지금처럼 프로팀의 형태로 K-리그에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실업리그와 아마추어 대회에 참가하는 것으로 경기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선수들에게는 재충전의 기회가 될 수 있지만 자칫 이 기간을 잘못 활용할 경우 독이 될 소지도 다분했다. 한정국의 경우 안타깝게도 후자였다.

“너무 늘어져 있었어요. 편한 생활만 하려고 하고 제 실력을 믿고 안주하려고 했죠. 프로 무대로 돌아갈 준비가 안돼 있었어요. 상체가 약했기 때문에 웨이트 훈련을 하는 것 정도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했죠. 상무의 이수철 코치님이 ‘상무에 있는 동안 너처럼 몸을 안 만들고 나가는 녀석은 처음’이라고 할 정도였어요.”

군 생활을 함께 했던 최용수, 최성용, 박남열, 최문식 등은 오히려 기량이 향상된 상태로 제대했던 것과 대조되는 순간이었다.
1996년 일화 소속으로 아시아 클럽선수권 우승 후(오른쪽에서 2번째) ⓒKFA
제대 후 처음으로 겪은 시련

거칠 것 없는 듯 했던 한정국의 질주는 상무 제대 후 급제동에 걸렸다.
그가 제대할 즈음 친정팀 일화가 차경복 감독을 새로운 수장으로 맞아들였고, 한정국은 새로운 감독 아래서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에 변화를 줘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됐다.

“감독님과 계속 갈등이 있었어요. 감독님은 저를 풀백 위치에 뛰게 하셨는데 저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죠.”

감독의 요구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던 대가로 한정국은 반 시즌 정도 출장 기회를 잃었다. 궁지에 몰릴수록 오기가 생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수롭지 않은 자존심인데, 그때는 팀을 옮겨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감독님과는 코드가 맞지 않다고 느꼈어요. 일부러 훈련장이 있는 용인 근처로 이사하지 않고 서울에서 출퇴근을 하면서 새벽 훈련을 소화했습니다. 무언의 항의였던 셈이죠. 선수 입장에서는 감독의 요구에 충실한 경기력을 보여야 하는데, 그때만 해도 억울하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벤치에 앉을 기회마저 박탈당한 한정국은 출장 기회를 갈망했고, 결국 일화의 단장을 설득해 이적을 약속 받았다. 그렇게 김인완과의 맞트레이드로 전남 유니폼을 입게 된 것이 1999년 가을이었다. 나이 서른 줄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전남에는 한양대 시절 은사인 이회택 감독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다. 전남에서는 또 새로운 경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순발력이 떨어지는 상태였는데, 이회택 감독님은 스피디한 속도 축구를 구사하셨어요. 그러다 보니 감독님이 원하시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던 것 같아요. 교체 멤버로 뛰는 경우가 많아졌고, 그러다 출장 기회를 점점 잃게 됐죠. 다음해 겨울에는 ‘다른 팀을 알아보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사실상 방출 통보였다.

이대로 무너질 순 없다… 대전서 명예 회복 후 은퇴

한정국의 축구 인생에 최악의 암흑기였다.
전남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한데다 몸값이 높았던 그를 선뜻 불러주는 국내 팀은 없었다. 잠깐 방황했던 그는 곧바로 짐을 싸 독일로 건너갔다. 친구의 집을 거처 삼아 2부리그 팀 입단을 타진했다. 그러나 비유럽권 선수인 한정국에게 입단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다시 국내로 돌아온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는 의지 하나였다.

“이미 금전적인 보상이나 팀의 환경, 자존심 같은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어요. 뛸 수 있는 팀이 있다면, 그곳에서 제가 가진 걸 모두 쏟아내 보이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도 다른 삶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어요. 실업리그에서 뛴다고 해도 축구를 포기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죠.”

각별한 의지 때문이었을까. 한정국은 대전에서 뛸 기회를 얻었다.
열악한 환경의 시민구단 대전은 그에게 넉넉한 보상을 제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선수로 불꽃을 피울 수 있는 기회를 보장했다. 살벌한 경쟁 구도에 지쳐 있던 그에게, 대전의 가족 같은 분위기는 또 다른 위안을 안겨 주었다.

“전성기 때만큼의 기량이 아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축구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최선을 다해 뛰었던 시절이에요. 대전에서 보냈던 시간은 명예와는 거리가 멀었어도 가장 소중하고 의미 있었던 시기로 기억이 돼요. 패배의식을 갖고 있던 팀 분위기와 축구 인생의 내리막길에서 뭔가 해보겠다고 했던 제 의지가 맞아떨어졌던 것일 수도 있고요.”

달라진 자세로 K-리그에 복귀한 한정국은 대전 입단 첫해 팀과 함께 하나은행 FA컵에서 ‘우승 신화’를 만들어내는 감격을 누렸다. 또 대전에서 뛰는 동안 일화-전남 시절보다 더 많은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며 팀의 도우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명예롭게 은퇴하고 싶다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낸 것이다.

부산 아이파크 구단의 프런트로 변신

2004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난 한정국은 대전의 스카우터로 최윤겸 감독을 1년간 보좌한 뒤 호주로 떠났다. 지도자 수업을 위한 언어 연수와 재충전의 시간을 가 진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 2006년 가을. 이번에는 부산 아이파크의 프런트로 ‘깜짝 변신’한 모습이었다. 축구 선수 출신이 구단 실무를 수행하게 된 드문 사례다. 스카우터 겸 유소년 육성-관리의 책임을 맡는 것으로 업무를 시작했던 한정국은 현재 단장, 감독과 함께 부산 ‘전력증강위원회’의 한 축으로 팀의 전력 증대를 꾀하고 있다.

“일본 프로축구의 강화부장과 비슷한 역할입니다. 유소년들을 잘 키워 팀의 전력으로 만들어내고 원활한 선수 수급을 끌어내면서 감독이 선수단 운영과 전략 전술을 준비하는 데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죠. 특히 선수 수급 과정에서 감독에게 전권을 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리스크를 최소화 할 수 있는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적에 대한 책임도 전력증강위원회에서 나눠지기 때문에 감독도 부담을 덜 수 있고요.”

“부산이 좋은 성과를 만들어내면 K-리그에 발전적인 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선수단과 프런트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잘 해내고 싶습니다. 아직은 배워야 할 것이 더 많아요. 하나하나, 앞으로 제 축구인생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줄 자산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부산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마음의 평온함을 찾고 있다는 한정국은 후배들에게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의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자만을 경계하고 축구에 집중해줄 것을 당부하는 그다.

“정상에 있다 좌절을 겪고 있는 선수들이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일생을 뒤집을 만한 기회가 몇 차례는 오기 마련입니다.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게 필요해요.”

“큰 굴곡이 없었다면 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도 없었을 겁니다. 저는 그러지 못했지만, 최고의 위치에 있을 때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특히 어린 시절에 부와 명예를 일궈낸 선수들은 그 상태에 안주하지 않고 더 넓은 무대를 바라보는 시야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곳으로 분산될 열정을 축구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더 큰 무대로 나갈 수 있는 시대가 됐거든요. 제가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저는 정말 겸손한 자세로 축구에만 매달릴 거예요.(웃음)”


인터뷰=배진경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08년 4월호 '나의 선수 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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