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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1.09 K리그 레전드 - 김동해

저에겐 오로지 축구, 그것뿐이었어요. - 김동해


그를 향해 던진 질문들 중에서축구를 좋아하기 때문에라는 문장은 빠진 적이 없다. 축구를 너무나도 좋아하다 못해 사랑했던 어린 소년은 30년이란 세월이 흘러 지도자가 되어서 아직도 축구와 사랑에 빠져 살고 있다. 꽤 긴 시간을 그라운드에서 보냈으면서도 앞으로도 계속 그 곳을 지키겠다는 그. 바로 대구FC김동해 코치이다.


그는 럭키금성, 안양 LG, 수원삼성을 걸쳐 7년간 프로 생활을 하는 동안 139출장, 9골이란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올림픽대표, 아시안컵대표, K리그 베스트 11에도 선정되었던 그가 이제는 K리그 전설이 되어 그의 축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축구를 좋아합니다

축구를 좋아해서 무작정 시작한 축구선수의 길. 그를 축구부로 인도하기까지 누구의 손길도 없었다. 단지, 11살 어린 아이의 마음속엔 어느 샌가 축구가 들어왔고 그때부터 축구와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제가 대구 시문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초등학교 3학년 때 축구부가 창단을 했어요. 제가 유난히 축구를 좋아했어요. 누가 들어와서 해보라고 시킨 것도 아니었어요. 그리고 축구를 하면 빵이랑 우유도 줬어요. 방학 때는 복도에서 라면도 끓여주기도 했죠. 당시가 75년 정도였으니깐 빵 같은 것은 엄청 먹기 힘들었거든요. 먹을거리의 유혹도 있었고 제가 운동신경이 있기도 해서 자연스럽게 초등학교 4학년 때 축구부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시문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청구중학교와 청구고등학교를 거치며 승리와의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축구를 하면서 승리의 기쁨까지 맛보니 그에겐 더 없이 행복한 시절들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키가 자라는 만큼 그의 실력과 자신감도 점점 자라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는 창단팀이라서 많이 졌지만 중, 고등학교 때는 우승도 많이 했어요. 특히 고등학교 때는 전국 대회 3개 나가서 다 우승할 정도로 상대에게 져 보는 축구를 한 적이 없어요. 항상 이기는 축구만 해왔죠. 그리고 청구고등학교 축구부가 워낙 전통이 있는 곳이다 보니 학교에서 대우도 잘 해줬어요. 그래서 정말 운동만 하면 됐어요. 그 당시에는 저의 목표는 오로지 축구! 축구! 그것 뿐이었어요. 축구 아니면 인생이 캄캄 할 정도였으니깐요. 제가 또래들 보다 나이가 한 살이 많은 상태였거든요. 그래서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나이가 한 살 많아서 경기를 뛰지 못했어요. 그것 때문에 운동을 못한다는 생각에 밥맛도 없었고 슬럼프가 왔었어요. 하지만 다행히 학교에서 도와줘서 한양대로 진학할 수 있었죠.”

특별히 힘든 시절은 없었어요. 원래 주위 사람들은 운동하면서 선배들이나 선생님들에게 혼도 많이 나고 많이 맞는다고 하잖아요. 저는 그 때 운동을 하면서 상대적으로 많이 맞지는 않았어요. 워낙 스스로 알아서 하는 편이었거든요. 제가 좋아서 스스로 시작한 일이다 보니 축구 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은 가족들에게 실망을 안주기 위해서 더 열심히 했죠. 그리고 나이도 동기들 보다 한 살 위라서 제가 막 나서서 이리저리 하기보다는 말없이 묵묵하게 제 일을 했죠.”


성실함, 노력파. 그의 학창 시절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던 말이다. 그런 그에게도 사춘기 시절 소위 나쁜 일을 해봤을까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는 어린 시절 소심해서 그런 일은 없었다고 손사래를 친다.

도망은 딱 두 번 가봤어요. 이건 단체로 나가니깐 안 나갈 수가 없어요. 처음에는 고등학교 1학년 때였는데, 이틀 만에 돌아왔어요. 도망 나왔다가 형수님이랑 같이 다시 학교로 갔는데 교문에 감독님이 서 계셨어요. 그리고 저를 보시면서 축구를 하고 싶으면 교문 안으로 들어가고 아니면 돌아가라고 하시더라구요. 어쩌겠어요. 당연히 안으로 들어갔죠. 그리고 또한번은 대학교 1학년 때였어요. 선배 한 분이 다 함께 도망가면 학교에서 후원도 더 잘해줄꺼라고 하셔서 다 도망을 갔는데 주도하셨던 그 분만 도망을 안 갔어요.(웃음) 참 재밌는 분이셨어요. 그 분이 키가 작으셨는데 허리가 굵었어요. 그래서 키 큰 선수 바지 입으면 허리가 맞으니깐 그 바지 입고 나가셔서 수선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돌아오시기도 하셨죠. 아쉽게 지금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참 순진하시고 착하고 재밌고 말도 잘하셔서 덕분에 학교생활을 재밌게 했었죠.”


나의 꿈, 프로행

그렇게 그의 첫 시작은 럭키금성에서 시작되었다. 자신감 넘치던 그에게 트래프트 2차는 너무나도 아쉽기만 한 결과였다. 돈보다 그에겐 자존심의 문제였던 것이다.

대학 졸업을 하고 실업팀에서도 스카우트 제의가 많이 왔었어요. 하지만, 축구를 했다면 누구나 프로에 가는 것이 꿈이잖아요. 저도 당연히 프로에 가고 싶었고 트래프트로 럭키금성에 입단하게 되었죠. 그때가 12 17일었나? 처음엔 1차로 들어가기로 서로 약속이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아쉽게 2차로 들어가게 되었죠.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까지 축구를 하면서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왔는데, 정작 제일 중요한 순간에 와서 2차로 가게 되니깐 조금 실망을 하게 되었어요.”

그 때 당시에는 연고지명, 우선지명이 있었어요. 경북은 포항제철이었죠. 제가 대구 출신이니깐 포항제철로 갈게 될 줄 알았죠. 한양대학교 1학년 때 감독님이셨던 이회택 감독님이 포항제철 감독님으로 가시면서 저희를 데리고 가시려고 하셨어요. 그래서 포항제철에서 동기였던 한양대학교의 박근형 감독과 저 중에 한 명을 1차로 뽑기로 했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잘못되어서 럭키금성으로 가게 되었어요.”

아쉬움이 컸어요. 내가 노력을 많이 했는데, 이것밖에 안되나 싶었어요. 그 때 딱 제가 결혼을 하려고 할 때쯤이었어요. 처가댁에서는 제가 안정된 은행팀으로 갔으면 하셨어요. 은행팀에서도 6개월 정도 돈을 미리 주겠다고 했었구요. 그래도 제 꿈이 프로에 가는 거니깐, 실패를 하더라도 한 번 가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지금 후회는 없어요. 제가 좋아하는 운동을 할 수 있잖아요.”

안정된 생활을 위해 다른 곳을 선택 할 수도 있었지만 그의 축구를 향한 사랑은 식을 길 없었다. 꿈이 있었기에 포기 할 수는 없었다. 프로행, 축구 선수 김동해의 출발은 그 곳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첫 술에 배부를 수가 어디 있으랴. 평탄했던 학창시절에 비해 그의 초기 프로 생활은 화려하지만은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대학교 때까지 베스트 11로 계속해서 뛰었어요. 그런데 정작 제일 중요한 프로에 와서 많이 못 뛰었죠. 교체되어서 조금 뛰기도 했지만 스스로 만족할만한 정도는 아니었어요. 당시에는 최순호, 조민국등 쟁쟁한 선수들이 많았으니깐요. 대신에 1군과 2군을 번갈아 가면서 뛰었는데 2군에서 첫해에 득점왕을 받았어요. 12경기에 7골을 넣었거든요.”

20년 가까이 지난날의 이야기. 가물가물하지만 그 느낌만은 잊혀 지지 않는 그날의 이야기. 바로 축구 선수 김동해가 처음으로 프로 데뷔전을 치르던 그날. 그의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얼굴에선 벌써 그날의 감회가 젖어 들기 시작했다.
   
교체로 들어가서 많이 뛰지도 못했어요. 대선배들도 많아서 설렘 반, 걱정 반이었죠. 전체적으로 경기를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요. 다만 들어가서 1분이든 2분이든 감독님에게 열심히 한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마음으로 들어갔어요. 그 때는 정말 앞만 보고 뛰었어요. 정신이 없었죠. 그 시절 제가 뛰었던 경기 중계해준 것은 다 녹화해놨는데, 지금 다시 보면 어찌나 촌스러운지 모르겠어요.”


축구인생의 변환점, 상무

91, 프로 무대에서 그를 찾아 볼 수 없었다. 사랑하는 부인과 눈에 밟히는 갓난아기를 남겨 놓은 채 그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상무로 옮겼다.

지금은 상무가 프로팀이지만 그때는 아마추어 팀이었어요. 처음 시작은 방위였어요. 대학교 때 군대를 방위로 가게 되었는데 조금 미뤄두었죠. 그러다가 나중에 신검이 나와서 결국은 방위로 가게 되었어요. 처음엔 가기 엄청 싫었죠.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에요. 그래서 최대한 안 갈 수 있으면 안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5 출근해서 5 퇴근을 해야 하는데, 배운 게 축구뿐이다보니 그런 생활자체가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러다가 자대배치를 받은 후였는데, 제가 대대장님을 좋은 분으로 만났어요. 같은 지역에 사셨던 분을 만나게 된 거에요. 그 분이 제가 운동할 수 있도록 시간을 많이 배려해주시면서 도움을 많이 주셨어요. 남들은 5 퇴근하는데 저는 2 퇴근해서 운동했죠. 그렇게 한 6개월을 보냈었어요. 그리고 중간에 체육대회를 하잖아요. 우리가 우승도 하고 잘하니깐 주위에서 가지 말라고 그런 말씀도 많이 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처자식도 있다 보니 계속 그곳에 얽매여 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상무로 가겠다고 말씀을 들렸어요. 제가 방위인데다가 그런 경우도 없었지만 결국은 이리저리 이광조감독님 덕분에 잘 되어서 1년을 상무에서 보낼 수 있었어요. 그 당시에 상무에서 결혼을 한 사람이 저 혼자였어요. 그래서 감독님께서 많이 배려를 해주셨죠. 원래 외박은 안되는데 저는 가끔 아이들 보고 오라고 하시면서 허락해주셨어요. 이광조감독님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참 감사하게 생각하고 좋아하는 분이세요.”

그에게는 꿈이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주춤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힘차게 달려왔다. 힘든 시간들이었지만 그는 울지 않았다. 아니 눈물을 참았을 것이다. 더 큰 목표를 위해


남들은 상무에서 보낸 시간을 1년이라고 하지만 갓난아기를 못 봐서인지 정말 10년을 보낸 거 같았어요. 아기가 사람을 알아볼 때쯤이었는데, 시커먼 사람을 보니깐 아기가 저만 보면 울면서 도망을 갔어요. 그러다가 조금만 있으면 또 친근감이 생겨서 같이 놀다보면 몇 시간 안되서 다시 가야했죠. 그리고 2주 뒤에 다시 집에 가면 아기는 또 울면서 도망을 갔어요. 그때는 그게 마음이 굉장히 아프더라구요. 그리고 금전적인 부분도 많이 힘들었어요. 하지만 좋아하는 축구를 할 수 있으니깐 다 참을 수 있었어요.”

제가 상무가기 전에는 거친 몸싸움을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상무에 가서 바뀌었죠. 이런 부분은 좀 강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변하기 시작했어요그리고 상무를 다녀온 뒤에 축구를 알게 되었어요. 그 전에는열심히 하면 된다.’ 는 생각뿐이었는데, 상무를 다녀온 뒤에는 열심히 하는 것에 더해서 축구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죠. 상무시절이 축구를 할 수도 있었고 변화를 가져다주긴 했지만 외적으로 많이 힘들었어요. 그러면서 불면증을 가지게 되었어요.”

“ 92년도 9월쯤이었어요. 소집 해제를 하면서 상무가 저에게 코치제의가 했어요. 그런데 제가 한참 뛸 나이라서 거절했었어요. 그 다음에 94년도쯤에 다시 코치제의가 왔어요. 그때도 선수 생활을 하고 있었죠. 3~4일 고민을 하다가 제가 상무에 이력서를 냈어요. 지금 상무의 이주철 코치가 저랑 아주 오래된 친군인데 저보다 은퇴를 일찍 했었죠. 어쩌다가 결국은 그 친구가 코치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저는 뛰고 있던 시절이라 아쉽거나 후회는 들지 않았어요.”


뜬 눈으로 밤을 새우다

상무에서 안양LG, 다시 프로에 안착한 그는 경기 결과에 잔뜩 긴장하기 시작했다. 어느 축구선수들에게나 승부는 충분히 예민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 예민함이 어느 순간 그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면증. 그것이 오랫동안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상무가기 전에는 잠을 잘 잤어요. 그런데 상무에서부터 조금 못자기 시작하더니 프로에 돌아오면서 경기에 대한 예민함이 커진 탓인지 잠을 잘 못 잤어요. 성격도 조금 예민해서 큰 경기만 앞두면 잠을 아예 못 잤어요. 경기를 생각하다보면 거기에 몰두가 되어서 잠을 못자게 되더라구요. 하지만 경기가 없는 날에는 잘 잤기 때문에 훈련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요. 경기에서 못 뛰었던 것은 아니지만 컨디션에 많이 좌우되는 편이었죠.”

시즌 중에 잠을 2시간도 채 못자고 경기를 뛰었어요. 그러다보면 경기에서 한 20분 지나면 쥐가 나기 시작하죠바늘로 피를 내고 다시 들어가서 경기를 다 뛰기도 했어요. 그렇게 경기를 몇 년 뛰었어요. 그러다보니 몸에 힘이 없어지고 어깨도 많이 빠졌어요. 은퇴를 결정하게 된 것도 불면증이 하나의 원인이었어요. 그런데 이런 날도 있었어요. 잠을 정말 잘 잔 날이 있어요. 컨디션도 정말 좋아요. 그런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경기가 취소되는 날도 있었죠.(웃음) 저는 아침에 '동해 잠 잘 잤니?' 그게 인사였어요. 처음 한두 번은 고맙지만 나중에는 그게 오히려 더 스트레스가 되었어요. 몇 년 동안 2~3시간만 잠을 잤다고 생각해보세요. 사람이 잠을 못자면 옆에서 조금만 밀어도 넘어지고 붕 떠있는 느낌이에요. 아무리 공을 잘 차는 사람도 잠은 잘 자야지 좋은 경기를 펼칠 수 있을 거에요. 음식보다 잠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때 뼈저리게 느꼈어요.


일반인도 부족한 잠으로 일상생활을 하기에 버겁다. 그런데 축구선수가 2~3시간을 자면서 경기를 뛴다는 것은 철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대단한 것은 그가 절정의 기량을 선보이던 93, 94년 그리고 95년에도 그는 불면증과 싸움중이었다. 3년 내내 그는 1년에 약 30경기 가까운 출장수를 기록했고 골로도 팀 승리에 기여하였다.

당시 LG에는 좋은 선수들도 있었고 운도 많이 따랐죠. 그것도 열심히 했으니깐 가능하죠. 상무에서 LG로 복귀한 뒤에 골도 많이 넣고 주간 MVP도 많이 선정되었어요. 93년도에는 MF부분 베스트 11도 뽑혔어요. , 철인의 지구력 ? 그렇게 신문 1면에 많이 나기도 했죠. 사람이 자고 일어나니 매일 변화가 일어나는 기분이랄까? 아쉬움이 있다면 잠만 더 잤다면 이것보다 더 잘 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들어요.”


또 다른 시작을 위해 마무리 짓다

지독히도 괴롭히는 불면증은 그의 곁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결국 그는 은퇴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을 LG가 아닌 새로운 창단팀 수원삼성에서 매듭짓게 되었다.

솔직히 한 3년 정도는 더 뛸 수는 있었어요. 하지만 불면증 때문에 워낙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서 은퇴를 고려하게 되었어요. 은퇴시기를 고려하다보니 1년이든 2년이든 제가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당시에 김호 감독님이 이론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전술부분을 잘 가르쳐 주신다고 들었어요. 그 부분이 저를 움직이게 만든 것 같아요. 그래서 구단에게 이야기를 했고 결국은 수원으로 이적하게 되었죠.”
 
제가 고재욱 감독님, 조영증 감독님, 김호 감독님까지 3분 밑에서 선수생활을 하면서 참 많은걸 배웠어요. 하지만 선수시절에는 대부분을 놓치고 지나가길 마련이죠. 은퇴시기가 되어서야 조금씩 체크를 하면서 알게 되는 거 같아요. 그 중간에는 감독님들이 많은 이야기를 해주셔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고재욱 감독님은 현 고등학교 축구 시스템과 비슷하셨고 조영증 감독님은 새로운 것을 시도는 하셨는데 실패가 많았어요. 당시 4백을 썼는데, 실점을 많이 했었죠. 김호 감독님은 워낙 지도력과 노하우가 있으신 분이시라 많은 것들을 시도하셨어요.”


우아한 백조가 되기 위해선 물 밑에서 보이지 않는 발길질을 쉴 새 없이 해야 한다. 그 역시 축구 선수 김동해 이름 석자 알리기까지 수많은 노력들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 노력에 비해 그에게 프로선수 생활은 아쉬움이 너무나 많았다. 그 아쉬움과 미련은 아직도 그의 마음 한 켠에 자리 잡아 가끔 잔디만 보면 뛰고 싶은 욕구가 움직이기도 한다.    

저는 선수생활을 노력한 만큼 그 대가를 못 얻었다는 생각을 해요. 가끔은 제 능력이 이거 밖에 안되는구나 라고 느끼기도 하죠. 남들은 잘 자는 잠을 저는 왜 못자서 이럴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부인은 자신을 만나서 이것밖에 못했다고 자책하기도 해요. 점수로 따지면 65? 제가 노력한 거에 비하면, 너무나 아쉬움이 많아서 그래요. 조금 더 나이가 어리면 아직 프로생활을 더 할 수 있을텐데... ... . 이런 생각을 아직은 가지고 있어요. 대구 선수들도 저보고 다시 선수 생활 하라고 하더라구요. 언제까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쉬움이 남는 건 사실이에요.”


지도자로 다시 태어나다

선수생활이 끝난 후, 그는 지도자의 길을 선택하며 인생의 2막을 시작했다. 줄곧 가르침을 받아왔던 그가 드디어 누군가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다. 지도자 생활이 어떤지 알아보고 느껴보고 싶어서 시작하게 되었다는 그는 태성중, 태성고, 청구고, 재현고 그리고 경남FC를 거쳐 지금은 대구FC의 코치가 되었다


"
선수시절은 평생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이에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선수시절 때는 그 사실을 잘 몰라요. 저도 몰랐었어요. 선수시절에는 제가 할 일, 자기 관리만 하면 되요. 반면 지도자를 보면 내일 선수들 훈련을 위해 생각도 많이 하고 공부도 하고 이리저리 복잡하죠. 저는 아직 팀 내에서 막내라서 미팅에 있었던 일을 운동장에 나가서 전달하는 일 정도만 하지만 대체적으로 지도자 자리는 무척 힘들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선수시절이 정말 좋긴 해요. 남들이 우러러봐주고 관중들이 환호해주고 매일 사우나도 하고 밥도 영양식으로 건강관리 해주고 참 좋아요. 그런데 이 시절이 좋다는 것을 1~2명은 알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다들 잘 몰라요. 나중에는 알게 되지만 그걸 뉘우칠 때는 이미 늦어요. 이런 과정을 우리는 다 밟아 왔기 때문에 지금 선수들에게 이야기 하지만, 이건 선수들에게는 아직 잔소리같이 들릴 뿐이에요. "


지도자와 선수의 관계는 참으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닮았다. 그래서 자식을 키워봐야 부모의 마음을 안다는 말 역시 지도자와 선수 사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선수시절에 몰랐던 것들을 이제 지도자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스승님들이 하셨던 것처럼 그 역시 그 길을 따르고 있었다


제가 프로생활을 해보니깐 만만한 곳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제가 걸어온 길을 안 밟게 하기 위해서 아이들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치기 위해서 많이 노력을 했어요. 아이들 소원이 잠을 한번 푹 자봤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훈련을 많이 시켰죠. 사람이 앉아 있으면 눕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하루 쉬면 또 다음날 쉬고 싶은 건 당연하잖아요. 태성고등학교가 용인에 있거든요. 제가 서울에서 잠시 친구들을 만나도 새벽에 곧바로 용인으로 내려와서 아이들하고 같이 새벽 운동을 했어요. 아이들이 오전에 수업을 들어가면 그 때 잠시 잠을 잤죠. 그러고 나서 또 오후운동, 저녁운동을 했어요. 제가 운동을 너무 좋아하니깐 오히려  애들이 힘들어했죠. 어떤 때는 애들이 저 눈치를 보면서 어쩔 수 없이 운동하러 나오는 경우도 있었어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제가 나오니깐 어쩔 수 없이 나오기도 했죠.”

벌써 그가 지도자 생활을 한 10년 가까이 된 시간 동안 그의 손을 수많은 선수들이 거쳐 갔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냐만 그래도 그의 마음 속 한 쪽에 자리 잡은 제자들이 있었다. 유난히 혼을 많이 냈었던 제자 그리고 지금은 뛰고 있지 못하는 제자가 못내 마음 쓰이는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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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성중학교에서 지금 상무에 있는 전광진을 만나게 되었어요. 중학교 때 광진이가 잘했거든요. 청소년 대표도 했었어요. 그때 선배였던 감독님이 광진이를 굉장히 좋아해줬어요. 대우도 다른 아이들에 비해 잘해줬죠. 일단 축구를 잘 했으니깐. 그런데 제 생각은 달랐죠. 선수면 똑같이 대해 줘야하고 잘못하면 혼도내야지 선수가 더 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광진이가 고등학교 와서 점점 태도가 더 나빠졌어요. 그때 제가 혼도내고 설득도 하고 때리기도 해보고 정말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바로 잡으려고 노력했어요. 결국은 나중에 그렇게 해서 조금씩 나아졌어요. "

이관희라고 수원공고 갔다가 수원삼성으로 간 선수가 있어요. 수원은 워낙 화려한 선수가 많잖아요. 2군 경기 조금 뛰다가 거의 못 뛰더라고요. 그러다가 방출이 됐어요. 그 때가 제가 경남 있을 때라서 창원시청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관희에게 운도 안 따라줬던 것 같아요. 운동을 하다가 아킬레스건이 끊어졌어요. 관희가 신경이 쓰여서 가끔 안부전화를 하는데 운동하기 힘들겠다고 하더라고요.”


축구에 미치다

축구로 기뻐했고 슬퍼했고 화도 났고 아파하기도 했다. 축구가 가져다주는 상처보다 그 희열이 더 컸기 때문에 그는 아직도 축구화를 벗지 않았다. 축구가 좋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아무런 이유가 없단다. 그저 마냥 축구가 좋단다.

" 운동장에 나가면 이상하게 모든 것이 좋아요.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더라도 축구화만 신고 잔디만 보면 힘든 일들이 싹 사라지고 행복해지죠.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으면 호흡이 턱 끝까지 차 올라오잖아요. 그 때 그 기분은 말로 표현 못하죠. 몸이 찌뿌드드하더라도 땀을 짝 흘리는 그 순간이 참 좋아요. 활기차잖아요. 그렇게 운동을 하는 게 보약 몇 첩 먹은 것 보다 훨씬 나아요."


그는 선수들과 같이 뛰면서 훈련을 한다고 한다. 이제 40대에 접어든 그가 젊은 선수들과 함께 뛰는 것이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는 너무나도 축구를 좋아하기에 그렇게 같이 뛰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 선수들하고 그라운드에서 같이 뛰는 것이 제 체질인 것 같아요. 앉아서 보는 것보다 그게 더 편해요. 선수들하고 같이 뛰기 위해서 선수시절에 했던 몸 관리를 계속 하고 있어요. 대단하다 할 정도로 제 관리를 철저하게 하는 편이에요. 아직까지 그 흔한 커피도 안마시고 운동도 시간 날 때마다 계속해서 하고 있거든요. 변병주 감독님이 절 보면 항상 '으이구, 저 놈의 몸 관리... 저 놈의 몸 관리' 하실 정도에요."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는 하루라도 운동을 하지 않으면 몸에 가시가 돋는 모양이다. 지난 긴 세월동안 운동을 하며 살았고 선수시절에는 지겹게나 했을 운동인데도 그는 아직도 운동을 즐긴다. 아니 이제는 습관처럼 운동이 몸에 베여버렸다.

" 이상하게 저는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더 몸이 찌뿌드드해요. 운동을 안 하고 쉬고 있으면 오히려 몸살이 날 정도에요. 그래서 쉬는 날에도 운동할 곳을 찾아요. 운동하는 것을 많이 좋아하죠. 저는 아직도 축구 조기회를 나가거든요. 조기회를 나가서 축구를 하는데, 생각해보세요. 저는 프로 선수 생활도 했고 지금도 프로 축구 코치까지 하고 있는데 축구를 못 해봐요.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에요. 그래서 매일 저녁마다 운동장에 가서 몰래 연습을 해요. 그럴 때마다 집에서 부인이 운동에 미친 사람이라고 해요. 휴가 때도 헬스 끊어서 운동을 하다보니깐. 휴가 받아서 오랜만에 집에 와도 나가서 운동을 하니깐 부인이 막말로 "저 짓한다고 " 안 좋게 보기도 해요. "


고맙고 미안한 나의 가족

지금 그는 대구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가족들은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다. 거리가 멀다보니 자주 얼굴 보기도 힘든데 그는 집에 와서도 운동을 하니 부인의 핀잔은 당연한 일. 그래서 그는 언제나 부인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잊지 않는다.

" 미안하기는 하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축구는 저에게 생활이니깐 어쩔 수 없죠. 예전에는 운동하지 말고 같이 있어달라고 많이 그랬는데 요즘은 부인이 일을 하니깐 바빠서 예전보다는 괜찮은 편이죠. 부인의 성격이 워낙 좋아서 친구들이 좋아해요. 집에 놀러오면 편하게 잘해주니깐. 그래서 더 고맙고 미안하죠. 부인이 일을 해서 경기가 있을 때만 내려오거든요.
지난 경남 전 때 왔어요. 일요일 경기라서 월요일 출근해야하니깐 경기 끝나고 간단히 식사만 하고 아쉽게 바로 다시 올라갔어요. 그런데 올라가는데 그러더라고요. 오랜만에 봤는데 손도 못 잡고 그냥 간다고. 너무 미안했죠. 아직도 문자하고 지내요. 결혼한 지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연애의 감정이 남아 있어요. 떨어져서 지낼 때는 뭐든지 다 해줄 것 같은 마음인데 막상 또 만나면 그게 잘 안 돼요. 부인이 항상 그래요. 떨어져 있으면 뭐해준다 뭐해준다 말만 한다고. "

그에게는 부인 말고도 사랑하는 여자가 두 명이나 더 있다. 바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두 딸이다. 중학교 3학년과 초등학교 6학년인 어린 두 딸 이야기를 늘어놓는 동안 그의 눈가에는 그리움이,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
큰 아이는 저를 많이 이해를 해줘요. 아빠 같은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는데 기분이 참 좋더라고요큰 아이가 노력파인건 저를 조금 닮은 거 같고 리더십도 있는 거 보면 부인을 닮은 거 같기도 해요. 큰 아이가 운동신경도 정말 좋아요. 남자였으면 시켰을 텐데……. 주위에서 딸도 시키라고 하는데 딸이 넘어지고 다치고 하는 거 보면 너무 마음 아플 거 같아서 못 시키겠어요. 아들이 있었다면 당장 축구 시켰을 테지만, 그냥 제가 축구를 하면서 제자를 키우는 게 낫죠. 막내는 막내다워요. 아무생각도 없어요. 막내는 항상 문자가 와요. 파이팅 하라고 문자도 자주오고, 엄마를 닮아서 똑똑해요. " 

그는 부인과 두 딸들의 사랑 그리고 응원으로 지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을 만나기 전까지 그에게는 또 다른 든든한 후원자들이 존재했다. 지금의 그가 있기까지 도움을 준 많은 사람들 중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 제가 4 1녀 막둥이로 사랑을 듬뿍 받고 지내왔어요. 형님 3명과 누님 1분이 계세요. 큰 형님이 저랑 나이차이도 20살 가까이 나요. 그래서 제가 집에 가면 왕 노릇을 조금 해요. 뭐 워낙 저에게 잘 시키지도 않으시고 또 제가 잘 하지도 않고 (웃음) 어릴 때 어머니는 시골에 계시고 저는 형님들과 살았어요. 어머니, 아버지의 역할을 형님과 형수님이 다 해주셨어요. 학창시절에, 집안 사정이 넉넉하지 못했지만 운동화가 너무 사고 싶어서 형수님에게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형수님이 사주셨죠. 그러고 나서 조카가 형수님에게 뭐 사고 싶다고 했는데 형수님이 돈 없다고 못 사주셨어요. 그러더니 조카가 삼촌은 사주는데 왜 우리는 안 사주냐고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그걸 듣고 ', 내가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서 꼭 갚아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더 열심히 했죠. 참 감사한 마음뿐이에요. "


더 큰 꿈을 위해

그가 K리그 무대를 뛰어다녔던 시간이 벌써 10년이 지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K리그 역시 많이 변했다. 그는 축구환경이 많이 좋아졌다며 잔디와 효과적인 훈련시스템을 K리그의 변화로 꼽았다.

그때만 해도 태클을 하면 허벅지가 다 까져서 상처를 입을 정도로 잔디가 안 좋았어요. 그리고 비가 조금 오면 물이 안 빠져서 경기를 못했어요. 비오면 걱정해요. 물 위에서 축구를 해야 하니깐 비가 온 뒤에 공을 딱 차면 공이 잔디에 딱 붙어 버리거든요. 찰흙처럼... 요즘은 물도 잘 빠지고 잔디가 참 좋더라구요. 우리 선배님들은 우리보다 더 안 좋은 환경에서 축구를 하셨잖아요. 더 훗날에는 지금 선수들이 미래의 선수들 환경을 보면서 부러워 할 정도로 축구 환경이 더 발전했으면 좋겠어요.”

" 우리는 3시간씩 훈련을 했어요. 효과 없이 2시간 반 정도 했어요. 요즘은 1시간 반을 넘어가지 않아요. 여름은 1시간 정도하죠. 최단의 시간동안 최대의 효과를 보면서 훈련을 해요. 그러기 위해선 그만큼 지도자들이 공부를 많이 해야 해요. 전체적으로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많이 올라섰죠. 축구문화를 많이 접했고 선수들도 해외로 나가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워오기 때문에 전술이나 시스템 , 구단관계들이 많이 발전을 했죠. 저도 시간이 되면 해외로 나가서 더 많은 것을 배워보고 싶어요."

그는 고등학교에서 지도자 생활하는 것이 참 재밌었단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꿈은 프로팀 감독도 국가대표팀 감독도 아닌 유소년을 가르치는 지도자이다. 그가 좋아하는 축구가 더 크게 발전할 수 있는 첫 번째 단계인 유소년 육성에 힘을 쏟고 싶단다.


, 고등학교 친구들하고 같이 뛰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제 정석에 맞는 것 같아요. 고등학교 지도자 생활 할 때 보니깐 부모님들이 같이 뛰면서 가르치는 걸 가장 좋아하시더라고요.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애들도 더 와 닿고 빨리 따라오는 거 같아요. 요즘 애들이 저희 때 보다 워낙 영리하다보니깐 말만 설명하면 '또 말만... ... .'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체력이 되는데 까지 아이들과 함께 뛰면서 가르치고 그 아이들이 무럭무럭 성장하는 걸 보고 싶어요.”

유소년을 가르치기 위해선 지금부터 제가 준비를 많이 해야겠죠. 아직은 제가 많이 배우는 입장이에요. 감독님과 선배코치님들에게서 좋은 것들을 다 듣고 메모하면서 공부하고 있어요. 지금 저에게 가장 큰 재산인 셈이죠. 좋은 것만 뽑아 제 경험과 접목 시켜서 제 것으로 만들어 나중에 아이들에게 잘 가르쳐 줘야죠. 선수시절과 프로팀 지도자 생활동안 한 경험이 공부에 가장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축구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한국 축구의 발전을 위해서는 유소년들이 잘 커야 한다고 생각해요. 10년 사이에 한국 축구가 많은 발전을 했어요. 이제는 앞으로 10년 동안 그 배의 발전을 또 해야겠죠. 그 시작을 유소년 육성에 힘을 쏟아야 해요. 유소년 육성은 한국 축구 발전의 시초죠. 그들은 미래의 한국 축구를 이끌어 나가는 재목들이에요. 제가 앞으로 더 공부를 많이 해서 그 재목들의 뿌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고 싶어요.”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구웹사이트
편집 :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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