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호 기술위원

한양공고-한양대, 그리고 국가대표 시절 유동춘과 함께 멋진 콤비를 이루며 1970년대 국내 축구계를 호령했던 신현호(53).
고2 때 청소년 대표팀에 선발됐고, 대학 2학년 때인 1974년 대표팀 1진에 발탁된 신현호는 줄곧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그는 스타였다. 하지만 그런 신현호가 대표팀에서만큼은 벤치를 지키는 나날이 많았다.
바로 차범근 때문이었다. 그 무렵 대표팀 주전 라이트윙은 다름아닌 차범근이었다.

제 아무리 날고 긴다는 라이트윙 신현호도 차범근은 넘기 힘든 존재였다. 하기야 그 시절 차범근을 넘을 수 있는 선수는 국내 뿐 아니라 아시아에는 없었으니까......

그래도 팬들은 신현호를 사랑했다. 한양대 졸업후 입단한 실업 최강 포철-육군(충의) 그리고 할렐루야에서 그는 언제나 전력을 다해서 플레이했다. 준족에 탁월한 개인기를 자랑했던 165cm의 신현호의 플레이는 늘 다이나믹했다. 그랬기에 백넘버 7번 신현호를 올드 축구팬들이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현재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으로 활동 중인 그를 만났다.

- 요즘 근황은 어떠신지요?

월드컵 전,후에는 많이 바빴는데 이제는 조금 한가해졌습니다. 현재 축구협회 기술위원으로 있고, 한국체육대학에 출강하고 있어요. 학생들에게 축구 이론과 실기를 가르치고 있는데 아직 여러모로 부족하긴 하지만 학생들 반응은 꽤 좋은 편입니다.(웃음)

- 출신학교가 서울인데, 원래 서울 출신이신가요.

부모님은 두분 다 고향이 이북이십니다. 아버님은 함경도, 어머님은 원산 분이신데 두 분이 1.4후퇴 때 거제도로 피난을 오셨어요. 거제도에서 만나 결혼을 하셨죠.
저는 서울 후암동에서 태어났구요. 위로 형님이 한분 있고 밑으로는 여동생이 한명 있습니다. 아버님이 전기 기술자셨는데 집안 형편은 어려웠어요. 매일매일 봉지쌀을 사서 먹었으니까요. 당시엔 봉지쌀이라는 게 있었거든요.

- 축구는 초등학교때부터 하셨습니까?

저는 중학교때부터 시작했습니다. 초등 6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 운동장(현 동대문 운동장)에 대표팀 경기를 보러간 적이 있어요. 그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표 선수들 뛰는 걸 직접 봤는데 정말 가슴이 뛰더군요.

그날 한국 대표팀이 이겼습니다. 경기가 끝나니까 관중들이 환호하면서 꼬마인 저한테 과자, 빵, 음료수 등 먹을 걸 마구 주는 거예요. 그때 제가 느낀게 '와! 축구를 하면 맛있는 것도 많이 먹을 수 있고 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해줄 수 있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그날부터 축구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지요.

초등학교 때 동네에서 골목 축구를 많이 했는데 실력이 굉장히 좋은 편이었습니다. 제 또래들 하고는 상대가 되질 않아서 중학생 형들하고 축구를 할 정도였거든요.
그래서 6학년 때 축구부가 있는 중학교에 진학하려고 서울에 있는 중학교 가운데 축구부 있는 학교를 찾아 봤어요. 그 중에 한양 중학교가 가장 마음에 들어서 축구 특기자 원서를 넣었는데 떨어졌어요. 같은 동네 사는 친구 중에 저보다 축구를 못하는 녀석은 합격이 됐는데 말입니다. 그 녀석은 당시 초등학교 축구 선수였는데 그애보다 제가 축구를 더 잘 했거든요. 어린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2차로 서울 중앙중학교에 축구 특기자 원서를 넣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중앙중에 근무하시는 어느 분이 말하시기를 “너는 초등학교 축구 선수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특기자 원서를 넣어도 떨어질 거다. 중앙 중학교에는 이미 은로 초등학교 축구부 아이들이 입학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원서를 넣지 않는 게 낫다!” 이러는 거예요. 그때 비로소 제가 한양 중학교를 떨어진 이유를 알게된 거지요.

- 그런데 한양 중학교에 결국 입학을 하셨네요.

당시 한양 중학교에 야간이 있었는데 2차였습니다. 그래서 한양 중학교 야간에 원서를 넣었어요. 축구 특기자가 아닌 일반 전형으로요. 그리고 나서 시험을 쳐서 합격을 한 겁니다.

중학교에 입학하니까 반 대항 축구 시합을 하더라구요. 그때 제가 기량을 발휘한 거지요.(웃음) 학교 선생님들이 보시고 놀랐나봐요.
당시 한양 중학교에 강창기 선생님이라고 계셨는데, 축구 국가대표 출신으로 학교 생활지도 주임을 하셨어요. 어느날 수업 시간에 저를 부르시더니 “'너 축구할 생각이 없냐? 축구하고 싶으면 내일부터 축구부에 나와라!”라고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축구를 하게 됐습니다.

당시 한양중 축구부 감독이 신유균 선생님이셨는데, 현재 배재고등학교 교감으로 계실 거예요. 신유균 선생님은 기본기 훈련을 많이 시키셨어요. 숏패스 같은 기본적인 연습을 한 시간 이상씩 시켰습니다. 그때 제가 기본기를 잘 닦은 것 같아요.

1977년 박스컵 대회 미들섹스 원더러스(영국)와의 경기. 심판 뒤쪽이 신현호.

- 한양중학교 졸업하고 한양공고로 진학하신 거네요.

그렇습니다. 동북 고등학교와 경신 고등학교에서 저에게 스카웃 제의를 했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한양공고로 진학을 했지요. 한양중 출신이 한양공고가 아닌 다른 학교로 진학한다는 건 그때로선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요.
당시 한양공고는 전국 최강 중 하나였어요. 대신고등학교와 양대 산맥을 이루었는데 제가 2,3학년 때는 한양공고 성적이 대단히 좋았습니다. 나중에 대표선수로 같이 뛴 유동춘하고 제가 공격을 이끌었어요. 동춘이는 중학교 3학년 때 군산에서 한양중학교로 전학을 왔습니다. 그 때부터 호흡을 맞추기 시작한 거지요.

- 고등학교 때 포지션은 어디였나요?

미드필더였습니다. 동춘이는 스트라이커였구요. 그 무렵 제가 키가 작아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제 키가 165cm거든요.
작은 키 때문에 늘 걱정을 했는데, 당시 한양공고 감독이신 故우상권 선생님께서 하루는 저한테 “현호야! 키 작은 건 문제가 될 게 없다. 내 키는 임마 160cm이야. 160cm인 나도 국가대표를 했는데 뭘 걱정을 해!“ 하시면서 저에게 희망을 주시더라구요.
우상권 감독님은 현역 시절에 국가 대표팀에서도 명성을 날리셨고 은퇴 뒤에는 대표팀 코치까지 역임하신 유명한 분이거든요.
선생님이 해주신 그 한 마디가 저에게는 큰 힘이 됐습니다. 우상권 감독님도 기본기를 잘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특히 개인기 위주의 연습을 많이 시키셨어요.

- 청소년 대표팀엔 언제 선발이 된 겁니까?

고2 때인 1971년에 선발이 돼서 고3 때인 72년에 태국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 축구 대회에 출전했습니다. 그 대회 결승전에서 한국이 이스라엘한테 져서 준우승을 했지요.

그때는 청소년 대표팀에 선발되기가 지금 보다 어려웠습니다. 우선 전국의 고등학교에서 우수한 선수들을 선발해 이 선수들을 두 팀으로 나눕니다. 그리고 나서 지방으로 전지 훈련을 가요. 거기서 합숙을 하면서 고등학교나 대학팀들과 시합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서울로 돌아와 대학 선발이나 국가대표팀과 평가전을 가진 후에 최종 멤버 18명을 추립니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거치는 겁니까.

당시 청소년 대표팀에 선발된 선수 가운데 고등학교 2학년생은 저하고 유동춘, 그리고 경희고 다니던 이영무 셋 밖에 없었어요. 그때 (차)범근이 형은 경신고 3학년이었구요. 주장은 (황)재만 형이었습니다. 재만이 형은 중동고 출신이지요. 감독은 유광준 선생님이셨고, 코치가 박경화 선생님이었습니다.
사실 그 때 제가 지방에서 합숙할 때 맹장염에 걸려서 서울로 올라와 수술을 했습니다. 수술을 했으니까 당연히 선발이 될 수 없는 거였지요. 그런데 수술 후 실밥 뽑고나서 3일 뒤에 나가서 연습에 참가를 했어요. 아픈 데도 안아픈 척 하고 뛴 겁니다(웃음).

- 힘든 과정을 거쳐 청소년 대표팀에 선발됐으니 무척 기쁘셨겠는데요?

당연하지요. ‘심장이 터질 듯 하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 그 정도로 기뻤습니다.
저의 어릴 때 목표가 고 3때 청소년 대표에 선발되고, 대학교 4학년 때 대표팀 1진에 선발이 되는 거였거든요. '목표'라기 보다는 완전히 꿈이었지요. 이 두 가지 목표를 노트에 적어 놓았는데, 고2 때 청소년 대표팀에 선발이 됐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1979년 장경환 감독(맨왼쪽)이 지휘한 국가대표팀.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신현호.

- 그 이듬 해인 73년 아시아 청소년 대회에도 참가하셨지요?

네. 당시엔 세계 청소년 대회가 없었기 때문에 아시아 청소년 대회가 매년 열렸어요. 그 대회에서는 제가 센터포워드로 뛰었고 한국이 3위를 차지했습니다.

-한양공고 졸업후 한양대로 진학하셨지요? 그때(70년대 초~중반)부터 한양대가 강호로 등장을 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이유라기보다는 그 무렵 한양대 멤버가 좋았죠. 박병철, 유건수, 김철수, 이상엽, 유동춘, 김삼남, 그리고 1년 후배인 박용주, 김희천, 한문배 등.... 연세대와 고려대에 결코 뒤지지 않는 멤버였지요.
그때 감독님이 최은택 선생님이였는데 스파르타식 훈련을 위주로 하는 엄격한 분이셨습니다. 선수들에게 강한 근성을 심어주셨어요.

- 한양대 시절에는 유건수, 박병철 두 선수의 명성도 대단했지 않습니까?

건수 형도 잘했지요. 범근이 형만큼 빨랐으니까요. 병철이 형은 힘이 장사였습니다. 두 선배 모두 70년대 대표선수로 활약했구요.
재미난게 병철이 형이 저의 대학 2년 선배인데, 호적상으로는 1954년생으로 나이가 어리게 되어 있어서 저도 참가못한 74년 아시아 청소년 대회에 참가를 했다니깐요(웃음). 그 당시엔 그런 경우가 허다했지요.

- 한양공고와 한양대 시절 '신현호-유동춘 콤비 플레이'는 지금도 올드팬들에게는 전설로 남아있습니다. 당시 두 분은 ‘눈 감고도 패스를 주고 받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박자가 척척 잘 맞으셨죠.

유명했었죠(웃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동춘이가 중학교 3학년때 군산에서 한양중학교로 전학을 오면서부터 저하고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동춘이는 스트라이커였고 저는 스트라이커와 공격형 미드필더를 겸했습니다.

동춘이는 준족은 아니었지만 방향 전환이 대단히 좋은 선수였어요. 그래서 저의 패스를 잘 받았습니다. 주로 월(Wall) 패스를 주고 받으면서 플레이를 했지요. 독일 월드컵 때 브라질의 호나우도와 호나우딩요가 밀집 상황에서 월패스 주고받는 장면 보셨지요? 그러한 장면이 매게임 한두번은 꼭 나왔는데 저하고 동춘이가 그런 식으로 플레이를 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세련된 플레이였지요.

- 국가대표팀에는 언제 선발이 되었나요?

대학교 2학년 때인 74년에 뽑혔죠. 72년 고3 때 청룡기 고교축구 대회에서 저희 한양공고가 우승을 했는데 유동춘이 최우수 선수상을 받고 제가 득점상을 받았어요. 시상식 때 대한축구협회 장덕진 회장님이 저하고 동춘이한테 상을 주시면서 “내년(73년) 이란에서 열리는 아시아 청소년 대회에서 활약하고 오면 대표팀에 선발될 수 있으니 잘해라!”하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 듣고 정말 기뻤지요.

그런데 이란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 대회 때 제가 부진했습니다. 상대 수비수들의 태클에 제가 번번히 걸렸거든요. 그 때문인지 저는 대표팀에 선발이 못되고, 동춘이만 대학 1학년 때 대표팀에 선발이 됐습니다.

74년 9월에 일본 도쿄에서 한일정기전이 벌어졌는데 그날 우리 대표팀이 일본한테 4대1로 대패를 당했어요. 당시 일본 대표팀에 가마모토와 스기야마라는 유명한 선수가 있었지요. 그 때의 패배는 우리 축구계로서는 정말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 일본한테 3골차 이상으로 진 적이 없었거든요.

그날 오픈게임이 한국 대학선발 대 일본 대학선발 경기였어요. 저는 대학선발 선수로 참가했습니다. 대표팀과는 반대로 우리 대학선발팀은 일본을 4대1로 이겼는데 제가 3골을 터뜨렸어요. 그 경기 후에 제가 대표팀에 선발된 거지요.



1978년 신혼여행을 떠나는 이영무 선수를 환송하기 위해 서울역에 나온 차범근(왼쪽)
차범근 부인, 이영무 부인, 이영무, 신현호, 홍성호


- 한양대 졸업후 실업 최강인 포철에 입단하셨지요?

네. 당시 포철은 한홍기 감독이 계실 때인데 선수 구성이 화려했어요. 제가 입단했을 때 김호, 이회택, 최재모, 박영태 선배 같은 분이 계셨으니까요. 포철에서는 국가대표 선수들도 후보 멤버로 있는 경우가 많은 정도로 선수층이 두터웠습니다.

선수들에 대한 대우도 다른 실업팀들보다는 좋은 편이었죠. 하지만 장래를 생각했을 때는 금융팀이 훨씬 나았던 것 같아요. 금융팀은 축구를 그만둔 후에 은행에서 근무를 할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포철은 은퇴 뒤에 회사에서 근무하기 힘든 점이 있었습니다.

- 1975~6년 쯤엔 박성화, 허정무, 최종덕, 조광래, 조영증 같은 1954,55년생 또래 선수들이 대표팀에 대거 발탁되어서 분위기가 좋았겠습니다.

참 좋았죠. 대표팀이 마치 소속팀 같았고, 오히려 소속팀에 가면 낯선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그 시절 대표팀은 1년이면 7개월 가량은 함께 합숙을 했기 때문에 선수들끼리 친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 대표팀에서 포지션이 라이트윙이셨는데, 그 포지션에는 ‘차범근’이라는 거대한 산이 가로막고 있지 않았습니까.

범근이 형은 누가 뭐래도 한국 최고의 선수죠. 신체 조건도 좋고 무척 빨랐잖아요. 범근이 형은 축구도 잘했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장점은 성실한 선수였다는 겁니다. 너무도 성실했어요. 그건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 만일 차범근 선수가 당시 없었다면 신현호 선생님이 대표팀 붙박이 라이트윙으로 활약하지 않았을까요? 차범근 선수에 대한 원망 같은 건 없으셨나요?

원망은 없었고 부러움은 있었지요(웃음). 당시에 이런 생각은 몇 번 해봤습니다. '감독님은 왜 나를 범근이 형과 같은 포지션에 놓으시나? 나는 다른 포지션에서도 뛸 수 있는데...'라는 생각이요(웃음). 아까도 말씀 드렸다시피 저는 미드필더와 센터포워드 위치에서도 플레이가 가능했거든요.
레프트 윙으로도 간혹 뛰었는데 당시 대표팀 레프트윙이 (김)진국이 형하고 (허)정무였죠. 범근이 형이 부상일 때는 제가 라이트윙으로 출전을 했구요. 골도 제법 많이 터뜨렸습니다.

- 1978년에 화랑팀이 박스컵 대회를 비롯해 메르데카컵,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연이어 우승을 차지했는데 그 때가 화랑팀의 최고 황금기였지요? 당시 화랑이 강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장 큰 요인은 팀웍이 좋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베스트 멤버와 리저브 멤버의 차이가 거의 없었어요. 그리고 오랜 시간을 합숙을 했기 때문에 조직력이 좋았습니다.


1979년 한일정기전에서 돌파를 시도하는 신현호(빨간 유니폼) / 스포츠동아

- 1979년 6월 서울 운동장(현동대문 운동장)에서 벌어진 한일 정기전 때 통쾌한 오른발 발리슛으로 골을 터뜨리셨지요? 기억하고 계신가요?

당연히 기억하지요. 그날 우리가 일본을 4대1로 이겼잖아요. 박성화가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제가 후반전에 한골을 넣었구요. 제가 일본 페널티 에리어안 오른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성화가 왼쪽 측면에서 저를 보고 길게 크로스를 해주더라구요. 그 볼을 제가 오른발 논스톱 슛으로 때린 겁니다. 볼이 오른쪽 발 약간 아웃 프런트 쪽에 맞았는데 볼이 발등에 닿는 순간 느낌이 좋았습니다. 발등에 볼이 제대로 맞으면 발이 시원한 느낌이 들거든요.

그날 일본의 왼쪽 풀백이 저에 대한 연구를 안하고 나온 것 같더라구요. 그전까지 우리 대표팀 주전 라이트윙이 범근이 형이었잖아요. 그러니까 그 수비수는 범근이 형에 대한 연구만 했던 것 같아요. 발이 몹시 빠른 수비수였거든요. 그런데 그날 저를 잡지 못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저는 범근이 형하고는 다른 스타일의 윙이었기 때문이지요.

- 순간적인 스피드가 대단히 빨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특히 사이드 라인을 따라 드리블 치고 나간후 터치라인 부근까지 가서 넘어지면서 크로스 올리는 게 특기였지요?

네. 제가 발은 빠른 편인데 몸의 유연성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근육 부상이 유독 많았어요. 돌파까지는 자신이 있었는데 센터링 능력이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슬라이딩 센터링’, 말 그대로 넘어지면서 센터링하는 연습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수비수에게 걸리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79년 일본과의 그 경기 때 슬라이딩 센터링이 큰 효과를 봤지요.

- 드리블 하면서 돌파할 때 고개를 약간 비스듬이 하고 마치 땅을 보고 뛰는 듯한 폼이 었는데 그 걸 스스로도 느끼셨나요? 그리고 어깨 싸움에 무척 능하셨던 걸로 기억이 됩니다. 마치 독일의 루디 푈러처럼요.

제가 키가 작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몸의 중심이 상당히 낮은 편이어서 그런 폼이 나온 것 같아요. 그리고 체구가 작기 때문에 수비수들과 정상적인 몸싸움을 하면 이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깨를 먼저 끼워 넣는 걸 많이 연습했지요. 축구에서는 어깨 싸움이 굉장히 중요한데 체격이 큰 선수라도 어깨싸움에서 밀리면 고전을 하게 돼있죠.

- 70년대에는 신현호 선생님을 비롯해서 김진국, 박용주 등 단신이면서 빠르고, 재치있는 윙플레이어들이 많이 있었지요?

그랬었죠. 진국이 형하고 용주도 저처럼 단신이면서 발이 빠른 윙이었지요. 윙플레이어는 아니었지만 수비수였던 김희태도 비슷한 스타일의 선수였습니다. 김희태는 공격수 이상으로 빨랐어요. 희태도 축구를 잘했는데 안타깝게도 무릎 부상 때문에 현역 생활을 길게 못했습니다.

- 측면에서 크로스 올렸을 때 헤딩을 가장 잘했던 공격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전형적인 센터포워드는 아니지만 제가 볼 때는 박성화가 헤딩을 가장 잘했다고 봅니다. 성화는 원래 수비수인데 센터포워드로도 간간히 뛴 적이 있거든요. 서전트 점프력이 대단히 뛰어났습니다. 체공 시간도 길었구요. 공을 머리에 갖다대는 기술이 정말 좋았어요.
김재한 선배의 경우는 190cm의 장신이었기 때문에 누가 크로스 올려주더라도 해결을 해줬지요. 워낙 키가 컸으니까요(웃음).

- 차범근-신현호 이후 이정일-변병주-정해원-김석원-김주성-심봉섭-고정운-서정원 등 우수한 윙플레이어들이 연이어 배출됐는데 이들 선수 가운데 가장 뛰어난 윙은 누구라고 보시나요?

어려운 질문인데요?(웃음) 정해원이는 체격도 좋았고 스피드 변화를 잘 줬습니다. 즉, 강약 조절 능력이 좋았다는 거지요. 등도 잘 지었어요. 수비수와의 1대1에서도 강했구요. 또 볼을 받으면 멈추질 않고 바로 진행을 시키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선수들끼리는 그것을 '볼을 살려서 간다'고 표현하는데 해원이는 그게 장점이었습니다.

김석원은 저의 후암 초등학교 후배예요. 석원이는 화려한 플레이를 했습니다. 빠르고 또 페인팅이 기가 막혔지요. 역대 국내 윙 가운데 석원이가 가장 화려한 플레이를 했을 겁니다. 그런데 성격이 너무 온순했어요. 체력에서도 조금 부족한 면이 있었구요. 자질은 굉장히 뛰어났습니다.

전형적인 윙은 아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김주성을 가장 높이 평가합니다. 주성이의 특징은 상체의 밸런스는 높고, 하체의 밸런스는 낮은데 상체의 밸런스가 높다는 것은 바꿔말하면 시야가 넓다는 거예요. 즉, 수비수들의 움직임과 주위 상황을 정확히 볼 수 있다는 거지요.
그리고 주성이는 수비수가 따라 붙을 때 이동 트래핑을 해 놓는 특징이 있었어요. 이동 트래핑은 보통 선수라면 웬만해서 하기가 어렵거든요. 이동 트래핑을 해 놓으면 수비수들이 방향을 잃게 됩니다.
말씀드린 세 선수 외에 나머지 선수들도 다들 훌륭한 윙이지요.

- 70,80년대의 윙플레이어와 지금의 윙플레어는 다른 점이 많지요?

많이 다르지요. 과거에 윙이라는 포지션은 공격수에 해당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비에 대한 개념과 의식이 거의 없었어요. 하지만 지금의 윙플레이어는 미드필더나 수비수로서의 역할도 해야만 하잖아요.

- 대표팀에서는 언제 물러났습니까?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예선까지 뛰고 대표팀에서 나왔습니다. 무릎과 발목에 심한 부상이 있었어요.


1980년 미국 전지훈련 도중 동료 대표선수들과. 맨 왼쪽이 신현호

- 할렐루야 프로팀 창단 멤버이신 걸로 알고 있는데.

할렐루야가 1980년에 창단됐습니다. 국내 최초의 프로 축구팀이었지요. 저하고 이영무, 조병득 등이 창단 멤버였고, 감독은 故김용식 선생님이었습니다. 김 감독님은 대단히 강직한 분이셨어요. 영어로 연설이 가능할 정도로 지적(知的)인 면도 갖고 계셨구요. 축구에 대한 열정이 정말 대단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때는 국내에 프로축구가 생기기 전이라 할렐루야는 주로 외국을 돌며 경기를 했어요. 외국 클럽팀을 국내로 초청해서 경기를 가진 적도 있구요. 그러다가 1983년 프로축구 수퍼리그가 생기면서부터 정식으로 경기를 했지요.

- 할렐루야 창단 멤버이지만 83년 수퍼리그 개막 때는 이영무 선수와 함께 신현호 선생님 모습을 한때 볼수 없었는데요?

80년에 할렐루야가 창단된 뒤 얼마 안 있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서 저하고 이영무가 할렐루야팀을 나왔습니다. 그후 이영무는 임마누엘팀을 만들었고 저는 83년 수퍼리그 개막되고 나서 몇 개월 후에 다시 할렐루야에 입단을 했습니다. 그리고나서 한 시즌 뛴 후에 현역에서 완전히 은퇴를 한 거지요.'

- 프로 생활을 길게 안하셨던 이유가 있으셨습니까?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고질적인 무릎 부상이 있었습니다. 78년 경에는 오른쪽 발목도 부러졌었구요. 그 당시 선수들은 부상을 당하면 웬만해서 수술을 받질 않았어요. '메스를 대면 선수 생명이 끝난다!'는 말이 있었거든요. 그 때 만일 외국에 나가서 무릎 수술을 했다면 완치가 돼서 조금 더 길게 현역 생활을 했을 지도 모르지요.

- 골을 넣으면 기도를 하셨나요?

대표선수로 있을때는 골을 넣어도 기도를 안했습니다. 그때는 이영무만 기도를 했지요. 저는 할렐루야 입단후에 골넣고 기도를 했고요.

- 이영무 기술위원장님과는 평생지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것 같은데요.

네. 이영무와는 청소년 대표 시절에 처음 만났고 대표 선수 생활을 같이 하면서 친해졌습니다. 이영무의 전도로 제가 크리스챤이 된 거예요. 제 인생에 있어서 큰 영향을 끼친 세 사람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이영무입니다. 이영무는 친구로서도 그렇고, 축구인으로서도 그렇고 너무도 훌륭한 사람입니다.

이영무 외에 저에게 큰 영향을 끼친 친구가 또 한 명 있습니다. 한양 중학교 1년 후배인 석동완이라는 친구인데 동완이는 학창 시절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 5시에 일어나 운동을 했어요. 후배였지만 제가 그 친구에게 많은 걸 배웠습니다. 동완이의 영향으로 인해 저도 성실하게 운동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아쉽게도 동완이는 고등학교 때까지만 운동을 하고 그만뒀어요.

마지막 한 분은 제가 대표선수 시절 감독을 하셨던 함흥철 감독님이십니다. 함 감독님은 선수들에게 늘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18명이 뭉치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떤 팀이든 부술 수 있다’라구요. 이런 식으로 동기부여를 해주셨지요. 또 선수들을 편하게 지도하셨어요. 저희들을 믿고, 선수들을 한 데 잘 묶으셨지요.

- 운동하실 때 종교의 힘이 컸는지요?

절대적이었죠. 종교 때문에 자기 절제를 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정신력이 강해졌습니다. 또 건전한 생활을 할 수 있었구요.

대표팀 시절에 선수들에게 보너스가 지급되면 저는 그 돈을 갖고 서울 상계동에 있는 자애원이라고 하는 고아원에 갔습니다. 통닭을 사가지고요. 당시에 통닭집에서 닭을 사면 비싸니까 양계장에 가서 샀습니다. 그 양계장에서 500원을 주면 닭을 튀겨줬거든요. 지금까지 28년째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린 아이들을 아주 좋아해요.

- 여담입니다만, 1983년 축구팬 인기투표에서 멕시코 4강 주역이었던 신연호 선수와 이름이 비슷해서 신현호 선생님이 당시 인기선수 1위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 에피소드를 알고 계십니까?

알다마다요. 지금도 저를 멕시코 4강의 주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웃음). 그때마다 제가 그러지요. '그 신연호보다 내가 10년 선배다'라구요. 허허허...


할렐루야팀 소속으로 일본에 원정가서 요미우리팀과 경기하는 모습

- 현역에서 은퇴한 뒤에 할렐루야 감독과 숭실대 감독을 하셨네요.

은퇴하고 나서 바로 할렐루야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어요. 당시 할렐루야 감독은 황재만 선배님이셨습니다. 그 후 재만이 형이 몸이 불편하게 되셔서 90년대 중반부터 제가 할렐루야 감독을 했지요. 그 뒤 98년부터 2003년까지는 숭실대 감독을 했습니다. 현재 K-리그에서 활약 중인 서덕규, 도화성, 이정렬, 정종관, 양상민이 제가 숭실대 있을때 가르친 제자들이죠.

- 축구협회 기술위원으로서 독일 월드컵을 어떻게 보셨는지요?

독일 현지에서 한국의 3게임을 포함해 총 17게임을 직접 관전했습니다. 기술위원 중엔 제가 가장 오래 현지에 남아 있었어요. 제가 깨달은 건 이제는 기술 축구가 아니면 정말 힘들다는 겁니다. 첫째도 기술, 둘째도 기술, 셋째도 기술입니다.

우리 대표팀이 독일 월드컵에서 1승 1무 1패를 기록했는데 세 게임 모두 선전은 했지만 매 게임 힘들게 경기를 풀어 나가지 않았습니까. 간단히 말해서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에 경기를 어렵게 풀어나가는 거예요.

한국 선수들의 정신력은 정평이 나 있습니다. 체력도 좋은 편이구요. 외국 지도자들도 한국 선수들의 강한 정신력과 체력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력과 체력에 기술만 가미된다면 한국 축구는 지금 보다 훨씬 강해질 겁니다.

그러나 상식적인 얘기지만 기술이란 건 성인이 돼서 가르칠 순 없습니다. 유소년 때부터 집중적으로 가르치지 않으면 안 돼요. 여기에 대해선 축구협회도 깨닫고 있고 계획도 세워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한국 축구도 유소년부터 대표팀까지 시스템이 하나로 정립이 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A대표팀이 4-4-2 포메이션을 쓴다면 유소년 대표팀도 4-4-2 포메이션을 써야 돼요. 프로팀들도 톱팀이 4-3-3을 쓰면 그 아래 연령팀들도 4-3-3을 써야된다는 거지요. 축구 선진국들을 보면 거의 다 그렇게 운용되고 있거든요. 이런 식으로 시스템이 정립이 되어야 대표 선수들이 모였을 때 혼동을 하지 않고 편하고 빠르게 전술 훈련을 받을 수 있어요.

- 신임 핌 베어벡 감독에게 거는 기대가 상당히 큽니다. 반면에 우려되는 점도 없지 않아 있는데요.

베어벡 감독의 가장 큰 장점이자 잇점은 한국 선수들에 대해서 많이 안다는 거지요. 감독이 선수들을 알면 일 하기가 상당히 편합니다. 어느 감독이 새로운 팀을 맡게되면 선수들 파악 하는데 시간이 꽤 걸립니다. 국내 감독이라도 자기 색깔을 내려면 2~3년은 족히 걸려요. 하물며 국내 감독도 그런 시간이 필요한데 외국 감독은 어떻겠습니까. 그 걸 축구팬들이 기다려줄 줄 알아야 돼요. 그런 점에서 베어벡 감독은 다른 외국 감독 보다는 유리할 겁니다. 베어벡 감독의 또 하나 좋은 점은 기술위원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 말을 경청할 줄 안다는 거예요.

감독으로서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나치게 그 점만을 생각해서는 안될 것 같아요. 내용과 결과를 보고 평가를 해야지 처음부터 감독을 불신의 눈으로 보면 안 됩니다. 축구인들도 그렇고, 언론도 그렇고, 팬들도 그렇고, 감독이 대표팀을 잘 이끌고 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격려해줘야 돼요. 저는 개인적으로 베어벡 감독이 잘해줄 걸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 선생님께서는 음성도 무척 좋으시고 말씀도 논리 정연하게 잘 하시기 때문에 축구 해설을 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사실 몇년전에 모방송국으로부터 축구해설 권유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만 정중히 거절을 했어요. 왜냐하면 해설을 하려면 준비를 무척 많이 해야 합니다. 과거 경험만 갖고 해설을 할 수는 없는 거니까요.

그리고 요즘 축구 용어하고 저희때 사용하던 용어가 다른 게 많아서 안돼요(웃음). 예를 들어 저희 때는 '센터링'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크로스'라고 하잖아요. 만일 해설할 때 그동안 버릇대로 ‘센터링 올렸다!’고 하면 촌스럽다고 욕먹을게 분명하잖아요. 해설은 공부를 좀 더 한 후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 일선 지도자로 돌아오실 계획은 없으신지?

당연히 돌아와야지요. 저는 아마추어팀을 맡고 싶습니다. 프로와 아마추어가 같이 발전을 해야 그 나라 축구가 강해질 수 있는 건데 우리는 그게 좀 아쉬워요.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현역 시절 스타 출신들이 프로팀 지도자로만 가지 말고 아마추어팀을 맡아서 지도를 했으면 좋겠어요. 아마추어팀에서 경력을 쌓은 후 프로로 가도 괜찮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아마추어 선수들에게도 큰 힘도 되구요.
축구팬들께도 부탁 드리자면 아마추어팀 시합도 많이 오셔서 관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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