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다 - 신의손

신의손의 또 다른 이름은 사리체프. K리그에서 그의 등장은 하나의 역사로 기억되고 있다.

1992
년 일화(現성남)에 입단하며 K리그 무대를 처음 밟은 사리체프는 1992년부터 1995년까지 0점대의 실점률을 기록하며, 일화의 3연패를 이끌었다. 빼어난 활약에 그는 "신의손"이라는 애칭을 팬들부터 선물 받았고, 라데와 함께 역대 K리그 최고의 용병으로 평가받고 있다
.

사리체프의 활약은 일화의 3연패만 이끈 것은 아니었다. K리그의 변화도 이끌었다. 사리체프의 영입으로 일화의 골문이 매우 탄탄해지자 다른 K리그 팀들도 앞 다퉈 외국인 골키퍼 영입에 나섰고, 90년대 중반 K리그는 외국인 골키퍼 전성시대를 열게 되었다. 그 결과 국내 골키퍼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되었고, 국내 골키퍼 출전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

그래서 K리그는 국내 골키퍼들의 출전 기회를 보장하기 위해 1996년부터 외국인 골키퍼 영입 제한 정책을 실시했다. 1996년부터 1998년까지 3년간 순차적으로 외국인 골키퍼 출전 기회를 줄였고, 1999년부터 국내 골키퍼만이 K리그 팀 골문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

결국 사리체프는 자신의 뛰어난 활약으로 하나의 규정을 만들었고, 덩달아 자신의 설자리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

하지만 사리체프는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한국에 대한 애정이 그를 한국에 머물게 했다. 1999년 안양 LG(현 FC서울) 골키퍼 코치를 역임한 그는 2000년 귀화를 선언. 한국의 국적을 취득하며 "신의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자신의 별명을 이름으로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

이로써 그는 K리그 외국인 용병 가운데 최초로 한국으로 귀화한 선수가 되며 다시 한 번 K리그 역사 속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고, 다시 그라운드를 뛸 수 있게 되었다
.

2000
년 복귀한 신의손의 기량은 여전했다. 그는 40살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기량을 펼치며, 안양의 우승을 이끌었다. 이듬해 35경기에 출전해 29골을 실점하며 5년 만에 0점대 기록했다. 40대에 마지막 전성기를 활짝 펼친 그는 2004년 서울에서 명예롭게 은퇴하며, 많은 팬들과의 이별을 고했다
.

그러나 신의손의 축구 인생은 은퇴가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는 이후 안양 골키퍼 코치에 이어 경남 FC 골키퍼 코치를 거치며, 후배 양성이 힘을 쏟았다. 그리고 2008년 여자 실업 축구팀인 대교 캥거루스의 수석 코치 겸 골키퍼 코치를 맡으며, 여자 축구에도 큰 공헌을 하고 있다.

 


그의 친정팀인 서울이 울산과의 삼성 하우젠 K리그 2008 플레이오프를 치르던 11 30. 경기도 시흥시에 위치한 대교 캥거루스 숙소에서 만나볼 수 있었다. 그는 절대 변하지 않는 축구에 대한 열정을 표현하며, 자신의 축구 인생을 담백하게 전했다.

특별한 아이 사리체프
1960 2월 타지키스탄에서 태어난 사리체프. 어린 시절 그는 조금 특별한 아이였다. 그는 스포츠에 관심이 없었던 그의 가족들과 달리 스포츠를 좋아해, 매일 친구들과 볼을 차며 놀기에 바빴다.

"
가족들 모두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저는 조금 달랐어요. 모든 스포츠를 좋아했어요. 친구들과 함께 땀을 흘리며 뛰는 것이 좋더라고요. 특히 축구가 좋았어요. 친구들과 마당에서 볼을 찰 때, 가장 즐거웠고, 행복했어요
."

축구에 대한 애정이 커지자, 축구 선수라는 직업을 조금씩 그리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은 밑그림에 불과했다. 지인들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었다
.

"
당시 타지키스탄(당시 구소련)에서는 유소년 축구 학교가 있습니다. 물론 그 때 시스템이 완벽하게 구축된 것은 아니었죠. 축구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분들이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나 가르침을 주는 분들이 많지 않았어요. 우리 팀에는 골키퍼 코치가 없었어요. 그래서 선배들을 통해서 많이 배웠습니다. 선배들과 같이 훈련을 자주했어요, 선배들의 훈련 방법과 플레이를 반복해서 실시하며 발전을 모색했죠."


어릴 적부터 사리체프는 훈련에 매진했다. 다른 것을 볼 여유조차 없었다. 그는 "게을렀어요."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는 분명 보통의 아이들과는 달랐다. 다른 것에 호기심을 같기보다는 축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꾸준히 정진했다.

"
우선 '저 자신이 축구를 좋아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답을 구했어요. 답은 '좋아한다.'였죠. 축구를 좋아하기 때문에 축구만을 보고 달려갈 수 있었고,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재능이 있는 선수도 축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발전하는 데 한계가 있어요
."

조금씩 아주 조금씩 성장 곡선을 그렸던 사리체프. 그러나 그가 걷는 인생이라는 길은 항상 곧지 않았다. 고속도로처럼 쭉 이어진 직선 주로를 달리다가도 비탈길처럼 꾸불꾸불한 길을 걸으며 성장통을 겪어야 했다
.

"15
살 때 1년 정도 쉬워야 했어요. 제가 다닌 축구 학교가 문을 닫게 되면서, 운동을 할 수 없는 곳이 없어졌어요. 처음 겪는 시련이었죠. 그래도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좋은 시설을 갖춘 다른 축구 학교가 있었는데, 예전부터 이곳에서 불러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전에 다닌 학교에서 나오게 되자, 그 곳에서 골키퍼가 없다며, 한 번 같이 해보자고 했어요. 정말 운이 좋았죠."

시련이 성장을 이끌다.

사리체프는 18살 나이로 프로에 입문했다. 그 출발점은 정상권에 도달한 선수들이 뛸 수 있는 1부 리그가 아니었다. 바로 정상과 조금 거리가 있는 2부리그였다. 그 역시도 쉽지 않았다. 그는 1978년 당시 구소련리그 2부리그 팀인 파미르FC 팀에 테스트를 거쳐 입단하게 되었다
.

"18
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개월 정도 대학교를 다녔어요. 대학교를 다니면서, 파미르팀 입단 테스트를 받았습니다. 저 혼자 받는 것이 아니었어요. 골키퍼 포지션에는 저 포함해서 2명의 선수가 있었어요. 두 선수 중 단 한 명만이 파미르 팀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어요
.
테스트를 받는데 좋지 않았어요. 입단 결정 일주일을 앞두고, '저가 아닌 다른 선수가 입단할 계획.'이라는 정보가 흘러나왔어요. 1주일 안에 저는 결과를 바꿔야 했어요, 정말 절실했죠. 그래서 정말 모든 힘을 다해 뛰었어요. 저 자신 자체를 바꿨어요. 1주일 동안 정말 '안 되는 것은 없다.'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뛰었어요. 노력의 결과는 좋았어요. 팀이 저와 다른 선수. 두 선수 모두 입단하게 되었죠."


사리체프는 파미르FC에서 3년 반 정도 뛰는 동안 100경기 넘게 출전하며, 작은 성공을 거두었다. 비록 1부 리그에는 오르지 못 했지만, 2부 리그에서 자산의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정상은 아니지만, 작은 봉우리에 도달한 것이다.

그리고 1981년 군복무를 위해 1년 정도 체에스카 팀에 뛰게 되었다. 체에스카 팀은 구소련리그 1부 리그 팀으로, 그는 이 기회를 통해 1부 리그에서 자신의 능력을 검증할 수 있게 되었다
.

"
파미르에서 3년 반 정도 뛰고, 체에스카 팀으로 옮겼어요. 체에스카 팀은 쉽게 설명하면 군대 팀입니다. 체에스카는 중앙 군사팀이었어요. 군사 팀이기 때문에, 분위기가 상당히 억압적이었죠. 제약이 많았어요. 더욱이 팀 전력 자체가 좋았어요. 제가 뛰기엔 무리가 따랐죠. 그래서 1년 동안 뛴 것이 5경기에 불과해요
."

이듬해 사리체프는 체에스카 팀에서 나와 1부 리그에 속한 토르피토로 이적했다. 토르피토에서의 출발. 역시 좋지 않았다
.

"
체에스카 팀으로 이적하기 전 토르피토에서 이적 제의가 왔어요. 그러나 군문제 때문에 저는 그 팀으로 이적할 수 없었죠. 1년이 지난 뒤에도 토르피토는 저를 포기하지 않았어요. 제가 체에스카에서 나오니, 바로 입단 제의를 했어요. 기다릴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요. 그래서 바로 토르피토 팀과 계약했죠입단 후 바로 2군 골키퍼였어요. 감독님은 저를 2번 골키퍼로 생각하셨어요. 제가 부족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주로 2군에 머무르며, 공식 경기는 전혀 출전하지 못 하했습니다. 주로 2군 리그에서만 뛰었죠."


팀 전력에서 이탈하며 만년 2군 골키퍼에 불과했던 사리체프. 후보 골키퍼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 역시 좋지 않았다. 만년 후보와 따가운 시선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며 힘든 나날을 보낸 사리체프는 성공을 위해 반드시 이 위기를 넘겨야 했다.

"2
년 동안 경기에 거의 나서지 못 했어요. 그저 훈련에만 묵묵히 매진해야 했죠. 주변의 시선 역시 좋지 않았어요, 주변의 따사로운 시선이 절 힘들게 했어요. 위기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변화였어요. 변화를 위해 우선 전 저 자신에 대해 생각을 했어요. '사리체프라는 골키퍼가 1부 리그에 뛸 수 있는가, 좋은 선수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았어요. '부족하다.'라는 답이 나오더라고요. 반드시 노력으로 저 자신을 발전시켜야 했어요. 이후 독한 마음을 가지고 정말 최선을 다해 훈련에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

후보에만 머무른 사리체프는 절대 토르피토를 떠나지 않았다. '토르피토에서 반드시 성공하겠다.'라는 오기를 가지고 훈련에 매진했다. 훈련의 성과는 바로 나타나지 않았다. 서서히 나타났다. 그는 입단 후 4년 만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으며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다
.

"1987
년 리그 막바지였어요. 3경기를 앞두고 있었어요. UEFA컵에 진출하려면, 반드시 좋은 성적을 그려야 했죠. 그런데 당시 주전 골키퍼의 실수가 많았고, 수비가 불안했어요. 이 때문인지 몰라도 감독님께서 마지막 경기에 저를 출전시키셨어요. 2군 리그에서의 안정된 플레이가 1군 경기 출전 기회를 준 것 같아요. 그 경기에서 저는 좋은 플레이을 펼치며 팀 승리를 이끌었고, 승리 덕분에 UEFA컵 티켓을 거머쥐었어요
."

사리체프는 단 한 번의 경기로 단숨에 주전 자리를 차지했다. 주전으로 올라서자 노력의 성과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경기를 치르면 치를수록 안정된 선방을 보이며 감독의 믿음을 얻었고, 1991년 구소련 리그 최고의 골키퍼로 선정되는 경사도 누렸다
.

"1988
년 시즌을 앞두고 우리 팀의 1번 골키퍼를 비쇼베츠 감독이 디나모 팀에 취임하면서 영입했어요. 이후 저는 알렉세이와 경쟁을 했어요. 알렉세이는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전북에서 뛰던 골키퍼입니다. 당시 그는 올림픽 대표였어요, 쉽지 않은 경쟁 상대였죠. 처음엔 한 경기씩 번갈아 뛰었어요. 몇 번의 테스트 끝에 주전 선수는 제가 차지했고, 이후 계속해서 경기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감독님도 저의 실력에 대한 믿음을 자주 표현해 주셨어요

정상급 실력을 가진 저 모습을 보는 것이 목표였어요. 그 목표를 이루었어요. 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이 즐거웠어요. 자신감도 생겼어요. 마음속에 항상 'I can do it.'을 가지고 뛰니 좋은 결과로도 이어지더라고요. 또 선수들의 믿음도 얻었어요
."

일화의 해결사로 새롭게 태어나다.

유럽 정상급 기량을 뽐내자 그를 원하는 구단들이 많아졌다. 현재 잉글리쉬 프리미어 리그(EPL)의 강호 아스널 감독을 맡고 있는 벵거 감독도 그를 노렸다.

"
프랑스와 이스라엘에서 이적제의가 왔어요. 특히 현재 박주영 선수가 뛰고 있는 AS 모나코의 이적 제의를 적극적으로 했어요. 1990년 프랑스 리그챔피언은 올림피코 마르세이유 팀과 연습 경기를 2차례 가졌어요. 그 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자, 당시 모나코를 이끌던 벵거 감독이 이적 제의를 해왔어요. 하지만 이적 시기가 잘 맞지 않아 이적하지 못 했어요
."

사리체프를 탐내던 국내 구단도 있었다. 바로 일화(現성남)였다. 1992년 초 이적을 모색하던 사리체프는 동료 선수 2명과 함께 한국으로 와 일화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

"
목동에서 테스트를 받았어요. 팀을 A팀과 B팀으로 나누어 연습 경기를 가졌어요. 저는 B팀에 포함되었죠. 그런데 B팀은 선수가 부족해 11명을 구성하는 것이 어려웠어요. 조기 축구회분들 몇 분 모셔서 뛰었던 것 같아요. 2경기를 치렀는데, 정말 열심히 막았어요. 결과도 좋았어요. 22 11였죠. 경기가 끝나자마자 박종환 감독이 계약하자고 제의하는 거예요. 그래서 바로 계약했죠."

 
32
살의 도전. 분명 쉬운 도전은 어려웠다. 그가 겪어야 하는 환경도 틀렸고,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줄 수 있는 친구도 없었다. 음식 역시 그랬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있었다. 실력도 있었고, 경험도 풍부했다. 힘들다고 푸념만 하는 어린 나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실점에 대한 책임감은 그를 더욱 강하게 키웠다.

"
뭐든 처음은 어렵잖아요. 한국 생활 역시 그랬어요. , 언어, 음식 등 모든 것이 달랐어요. 통역도 없어, 말을 할 수 있는 상대도 적었어요. 여러모로 어려운 요소가 많았죠. 하지만 저는 32살에 왔잖아요. 프로라는 경험을 10년 넘게 하고 왔잖아요. 이런 경험들이 K리그에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데뷔 첫 해 개막전을 여수에서 했는데요. 00으로 비겼어요. 2번째 경기는 10. 3번째 유공전은 21. 4번째 포항전은 11. 5번째 경기는 대우 40. 16년이 지난 이야기지만 다 기억나요. 실점 상황 역시 선명하게 기억나죠. 실점 상황 하나하나 기억하며, 발전을 모색했습니다
."

1989
년 창단한 후 일화는 수비력 부재로 골머리를 앓았다. 매 시즌 최다 실점한 팀을 기록하는 불명예를 기록했다. 특히 골키퍼의 위치가 불안했다. 외국인 골키퍼를 기용해도, 국내 골키퍼를 기용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골키퍼가 불안해지자 수비수들 역시 크게 흔들리며, 수비 조직 불안으로 이어졌다
.

일화 박종환 감독은 고심 끝에 사리체프에게 골문을 맡기며, 그의 능력을 테스트하기 시작했다. 테스트 결과 대 성공이었다. 사리체프가 골문을 지키자, 수비 조직이 놀랍게 탄탄해졌고, K리그 최고의 수비력을 갖춘 팀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1992년 일화는 30경기에서 단 21실점을 기록하며, 1년 만에 리그 최다 실점 팀이 리그 최소 실점 팀으로 바뀌었다
.

"
처음에는 말이 안 통해서 어려웠어요. 동료 선수들이 저에게 소리 지르면 저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고, 반대로 제가 소리 지르면 동료 선수들이 모르고. 이런 상황이 어느 정도 이어졌어요.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려고 했고, 이것은 제가 팀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였죠사실 제 앞에 누가 뛰었는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저 때문에 일화의 수비가 좋아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일화 수비 안정은 저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팀 전체 노력해서 얻은 결과라고 생각해요
."

탄탄한 수비는 공격수에게 큰 힘이 되었다. 공격수들이 단 한 골만 넣어줘도 일화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래서 일화의 성적은 수직 상승했다. 주로 하위권에만 머물던 일화는 단숨에 선두권에 올라섰고, 시즌 내내 포항과 치열한 우승 경쟁을 펼치게 되었다.


1992년 11월 18 화는
포항 스틸야드에서 포항과의 대결을 펼쳤다. 만약 이 경기에서 승리를 거둔다면 창단 후 첫 우승에 다가서는 것이었고, 패배를 기록한다면 2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 경기 이후 두 팀은 단 한 번의 경기 기회밖에 없기 때문에, 사실상 결승전과 같았던 시합이었다. 그래서 샤리체프의 손은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
당시 포항의 공격력은 정말 좋았어요. 황선홍, 라데 등 좋은 공격수들이 너무 많았죠. 그 때의 포항 전력은 확실히 우리 팀보다 앞섰어요. 정말 강팀이었죠. 그들을 이기는 것은 쉽지 않았고, 결국 그 경기에서 패하며 아쉬운 2위를 기록했죠. 그 경기에서 3실점을 했는데, 그 해 3실점을 한 유일한 경기였어요
."

1992
년의 아쉬움은 일화를 더욱 강하게 키웠다. 1993년 공격력도 강화한 성남은 공격, 수비 모두 완벽한 전력을 뽐내며 K리그를 점령했다. 무엇보다도 일화의 수비는 대단했다, 리그 초반 10경기에서 단 1실점을 기록한 일화의 수비는 그야말로 절대 무너뜨릴 수 없는 벽과 같았다
.

"1992
년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고, 전력 보강도 확실하게 되었어요. 또 공격수, 수비수, 미드필더 모두 자신의 역할을 100% 수행했어요. 선수들의 자신감도 최고조에 달했죠. 정말 진다는 생각이 없었어요. 저는 여기서 이것을 말하고 싶어요. 유럽에서는 골키퍼가 팀 전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크게 50%까지 봐요. 그러나 저는 40%라고 생각해요. 10% 차이는 안정된 골키퍼로 인해 수비수들이 느낄 수 있는 편안함이죠. 불안한 골키퍼가 수비수에 뒤에 있다면, 수비수들이 느끼는 부담감이 크잖아요저의 활약이 골키퍼의 중요성에 대해 알릴 수 있어 기분이 좋았어요. K리그 팀들은 좋은 골키퍼를 영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잖아요
."

1994
년 일화의 기세는 시즌 내내 이어졌다. 단 한 번도 미끄러지지 않으며, 완벽한 우승을 이끌어내었다. 일화는 승점 68점을 챙기며, 승점 59점을 기록한 2 LG(現서울)을 가볍게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했다. 또 득점은 35, 실점은 23점을 기록. 리그 최다 득점, 최소 실점을 기록했다
.

 "
너무 빨리 우승을 확정지었어요. 승점 차가 크게 났죠. 우승의 기쁨은 상대적으로 덜 했던 것 같아요. 이 우승으로 우리 팀이 강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또한 더 강해질 수 있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이후 일화의 행보가 더욱 거침없던 것 같아요
."

일화는 1989년 창단 후 3년 간 저조한 성적을 남겼다. 신생 팀 일화는 신인 선수들처럼 적응기가 필요해 보였다. 특히 수비 불안은 팀 성적을 하위권으로 떨어뜨렸다. 3년 내내 최다 실점을 기록한 팀은 바로 일화였다.

그러나 일화의 방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992년 그들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수비 안정이 컸다. 일화의 수비는 단 1년 만에 K리그 최고의 방어력을 선보이며 팀의 상승세를 이끌었다. 그 결과 일화는 1992년 준우승, 1993년과 1994K리그 정상에 올랐다. 일화의 2연패는 K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기록한 연속 우승이었다.

 

일화의 상승세를 이끈 사람은 당시 일화를 이끈 박종환 감독이었다. 박종환 감독의 지도력은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탄탄한 수비로 화려하게 꽃을 피우며 일화의 2연패를 이끌었다. 일화 수비의 핵인 샤리체프의 공도 빼놓을 수 없다. 3시즌 내내 전 경기 출전한 샤리체프는 매 시즌 0점대 실점 대를 기록하며 일화의 수비를 이끌었다.

일화의 3연패를 이끌다.

1995
년 당시 팀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았던 일화의 2연패는 원년부터 참여한 선배 팀들도 도달하지 못 한 대기록이었다. 그 결과 일화는 공공의 적이 되었다. 일화를 제외한 K리그 7개 팀들은 일화의 3연패를 지저하고, 자신의 팀이 우승을 차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2
연패를 하자 상대팀들의 견제가 심해졌어요. 그래서 한 경기, 한 경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쉬운 경기 하나가 없었죠. 그러나 승리에 대한 확신은 여전했어요. 상대가 강하게 나오면 나올수록 우리 팀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준비 역시 더욱 철저하게 했고요
.”

그의 말대로 일화는 더욱 강해졌다. 탄탄한 수비, 안정된 경기 운영, 높은 골 결정력.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다. 그 결과 일화는 전기리그에서 10 3 1패로 승점 33점을 기록. 2위 현대(現울산)를 승점 7점 차로 따돌리며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챔피언 결정전 진출도 확정지었다
.

챔피언 결정전에서 일화가 만난 상대는 황선홍-라데 콤비가 버티는 포항이었다. 당시 챔피언 결정전은 경기 전부터 숱한 화제를 낳았다. 특히 라데와 샤리체프의 정면 대결은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

1
차전에서 기선을 제압한 것은 포항의 라데였다. 라데는 멋진 오른발 터닝슛으로 샤리체프가 버틴 일화의 골문을 열며 패배 위기에 빠진 팀을 구했다. 2차전에서도 라데의 기세는 여전했다. 전반전에만 2골을 몰아친 황선홍의 활약으로 20으로 앞서나간 포항은 후반전에 내리 3골을 허용하며 32의 패색이 짙어졌다. 위기의 순간 포항의 살린 것은 역시 라데였다. 경기 종료 1분 전 서효원의 크로스를 멋진 헤딩슛으로 연결하며 팀을 구했다
.

제가 상대한 공격수 가운데 가장 뛰어난 공격수 바로 라데입니다. 저와 라데가 K리그 최고의 외인 선수라고 부르는데, 저는 최고가 아닙니다. 바로 라데가 최고죠. 결승 1차전, 2차전에서 라데가 터트린 2골은 모두 라데였기 때문에 가능한 골이었어요. 당시 저는 상대 공격수가 골로 연결시킬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정확한 위치 선정과 골 결정력으로 골을 터트리며 승부를 3차전으로 끌고 갔죠
.”

연거푸 라데에게 골을 허용하며 코너에 몰린 샤리체프. 그는 위기 순간 강해졌다. 3차전에서 샤리체프는 놀라운 선방으로 포항의 공격력을 무력화시키며, 팀의 10 승리와 역사적인 3연패를 이끌었다. 반면 라데는 가장 중요한 시합인 3차전에서 후반 20분 퇴장을 당하며 팀의 준우승을 먼발치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샤리체프와 라데의 정면 대결은 샤리체프의 판정승으로 끝났다
.

정말 1995K리그는 힘들었어요. 상대 팀의 견제도 심했고, 우승 하는 과정 역시 어느 해보다 어려웠죠. 그래서 안양에서 우승을 확정지었을 때, 성취욕이 최절정에 올랐고, 가장 행복했어요
.”

다시 찾아온 슬럼프

사리체프의 맹활약에 K리그는 변하기 시작했다. 사리체프의 맹활약을 본 K리그 구단들은 앞 다퉈 외국인 골키퍼 영입에 나섰다. 그 결과 K리그는 외국인 골키퍼 전성시대를 열었다. 국내 골키퍼 가운데 주전 골키퍼 자리를 차지한 선수는 현대의 김병지와 LG(現서울)김봉수가 전부였다.

국내 골키퍼들의 입지가 좁아지자 국내 골키퍼 기량 저하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이에 K리그는 외국인 골키퍼 영입 제한 규정을 만들었다. 1996년부터 1998까지 3년 간 순차적으로 외국인 골키퍼 출전 기회를 줄였고, 1999년부터 외국인 골키퍼는 골문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

그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믿지 않았어요. ‘1년 정도하고 말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확실한 대책을 세우지 못 했어요.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 했고, 이적에 대한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당시 제 나이가 36살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이적은 힘들었어요. 나이가 많아서 유럽으로 갈 수 없었어요. 그렇다고 K리그 내에서 이적할 수도 없었고요.”


외국인 골키퍼 출전 제한으로 인해 사리체프는 경기 감각을 꾸준히 유지할 수 없었다. 또한 그가 출전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대회에 우승을 차지해. 우승에 대한 동기 부여도 찾기 어려웠다. 1995년 일화는 K리그 3연패와 함께, 아시아 클럽 컵 우승을 차지했고, 이듬해 아프로 아시아 클럽 컵 우승을 차지하며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우승일지는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1996년 아시아 슈퍼컵 우승으로 K리그를 넘어 아시아 무대도 평정했다.

이 때문에 사리체프가 지키는 골문은 크게 흔들렸다. 4년 간 0점대를 유지한 그의 실점률은 1점대를 훌쩍 넘어, 2점대에 육박했다. 그는 1996 27경기에 출전해 51골을 허용했고, 1997 16경기에서 27골을 실점했다
.

힘도 있었고, 에너지도 있었어요. 경기에 뛸 수 있는 기량을 가지고 있었죠. 하지만 경기에 꾸준히 나설 수 없었어요. 골키퍼는 컨디션과 밸런스 유지가 가장 중요한 데, 일정치 않는 출전 기회 때문에 그것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었어요
.

무엇보다도 뚜렷한 목표점을 찾을 수 없었어요. 이것이 컸어요. 지금까지 하나의 목표점을 향해 뛰며 성공을 거두었는데, 경기에 나서지 못하자 그 목표점을 찾지 못했어요. 그리고 감독님의 믿음은 저에게 있어 가장 동기부여인데, 저의 부족함 때문에 감독님의 믿음도 잃었어요.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부진한 성적을 거둔 것 같아요
.”

사리체프가 흔들리자 일화도 크게 흔들렸다. 수비가 불안해지자 팀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불안한 성적으로 감독들의 중도 퇴진도 줄줄이 이어졌다. 1996박종환 감독을 대신해 지휘봉을 잡은 이장수 감독 대행 체제는 오래가지 못 했고. 1997년 벨기에에서 레네 감독을 공수해왔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 못 했다
.

“4
년 연속 정상 전력을 유지했어요. 오랫동안 최대치에 가까운 전력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죠. 수비 라인이 흔들린 것은 팀 자체가 많이 바뀌었어요. 선수 구성이 바뀌자 밸런스가 붕괴되었습니다. 저 역시 불안한 모습을 보였고요
.

팀 성적 저하와 함께 슬럼프가 찾아왔어요. 토르피토 시절이 다시 한 번 찾아온 거죠. 더욱이 제 위치가 어중간했어요. 당시 저는 코치로 아니었고, 선수도 아니었죠. 불안한 위치가 저를 더욱 힘들게 만들더라고요
.”

결국 사리체프는 천안과 이별을 선택했다. 1998년 시즌이 끝난 뒤 그는 천안에서 나와야했다. 마지막이 좋지 않았기에, 천안을 떠나는 그의 기분이 좋지 않았다
.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더라고요. 마지막 3년은 정말 암흑기였어요. 팬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고 떠나지 못 해 아쉬웠어요. 챔피언을 함께한 친구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도 슬프더라고요
.”

한국인으로 다시 태어나, 마지막 전성기를 누리다.
1999
년 성남을 떠난 사리체프는 바로 안양LG (現서울)의 유니폼을 입었다. 플레잉 코치로 영입된 것이다. 안양에서 그는 골문을 지키기보다 후배 양성에 나섰다. 코치로서의 출발은 좋지 않았다. 그가 지도한 안양의 김봉수와 임종국은 불안한 기량을 보이며 많은 실점을 허용했다. 1999년 안양은 정규리그 27경기에서 52골을 허용했다.

골키퍼는 개인능력이 중요해요. 필드 플레이어와 다르죠. 그리고 각자의 스타일이 있어요. 그 스케줄을 존중해야 하고, 그 스타일에 맞춰 훈련을 해야 해요. 하지만 처음에 너무 내 스타일을 강요했어요. 그들의 스타일을 그대로 유지한 채 잘못된 점을 조금씩 고쳐나가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 했어요. 시간이 지나서내가 잘못했구나.’라는 것을 느꼈죠
.”

2000
년 사리체프의 나이는 40이었다. 선수로서는 환갑의 나이였다. 지도자로서 익숙해져야 하는 나이였다. 그러나 그는 지도자가 아닌 선수로 다시 되돌아 왔다. 2000년 한국으로 귀화하는 동시에 신의손이라는 이름으로 팬들에게 나서며, 다시 K리그 골키퍼로 되돌아 왔다
.

우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연습 경기를 하는데, 골키퍼 자리가 비었어요. 그래서 골문을 지켰는데 좋은 활약을 펼쳤고 귀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축구가 너무 하고 싶었다. 내가 잘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내가 지켜야 할 골문은 바로 안양의 골문이었다
.

또한 한국에서 사는 동안 불편함을 느끼지 못 했어요. 처음 적응기가 어려울 뿐, 적응기를 지나자, 한국에서의 삶이 즐거웠어요. 사람들과도 잘 지냈고, 더 좋은 곳을 찾기 어려웠어요. 만약 한국에서 저의 삶이 힘들었다면 이전에 한국을 떠났을 거예요
.

신의손이라는 이름도 좋습니다. 사실 1992년 팬들이 신의손이라는 별명을 불러 주었을 때  웃었어요. 신의손이라는 별명이 재미가 있었거든요. 시간이 차츰 지나자 그 별명이 좋더라고요. 그래서 저의 이름을 신의손이라고 지었죠. 신의손은 팬들이 지어준 거잖아요.”

 
신의손은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채 리그에 출전하게 되었다. 골키퍼 신의손이 가진 훈련 일수는 고작 10여일에 불과했다. 주변에서 그의 복귀는 실패를 맛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이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그는 다시 한 번 화려하게 복귀하며, 마지막 전성기를 활짝 열었다.

사실 저 자신도 의문이었어요. 2년 공백이 크게 느껴지더라고요. 더욱이 동계 훈련도 단 10일 밖에 하질 못 했어요. 주변에서 비관적인 전망만 제시했어요
.

그러나 저는 그런 주변의 말을 듣지 않았어요. 단 한 사람만의 말을 믿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저를 믿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어요. 그 분은 바로 조광래 감독입니다. 조광래 감독은 어둠 속에 빠진 저를 구해주었고, 믿음으로 저의 부활을 이끌었어요


공백 기간 동안 너무 뛰고 싶었어요. 뛰고 싶다는 의욕이 성취욕으로 바뀌었죠. 또한 대처능력이 있었어요. 수많은 경험 속에서 대처 능력을 키웠고, 이것이 성공을 이끌더라고요.”

복귀 후 그는 다시 한 번 전성기를 활짝 열었다. 덩달아 안양의 전력도 탄탄해졌다. 신의손이 가세한 수비는 철벽과 같았고, 안드레가 이끄는 미드필더 진은 화려한 패스로 상대 팀을 제압했다. 그리고 최용수가 이끄는 공격은 막강 화력을 과시했다
.

초반부터 강했어요. 10연승을 달리며 쉽게 선두로 치고 올라갔고 유지했죠. 무엇보다도 팀 밸런스가 굉장히 좋았어요. 공수 조화가 완벽하게 이뤄졌어요. 특히 주전과 후보가 구분이 안 되었죠, 주전 선수 한 선수가 빠져나가도, 그 선수의 공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일정한 경기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1위 자리를 지킬 수 있었어요
.”

정규리그에서 가볍게 1위를 차지한 안양은 챔피언 결정전에 직행했고, 그들의 상대는 돌풍의 주역인 부천 SK(現제주)였다. 11 12일 목동 종합 운동장에서 펼쳐진 챔피언 결정전 1차전에서 신의손은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했다. 전반전 문전 혼전 중 그는 부상을 당하며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고, 대기 명단에 골키퍼를 올리지 못 한 안양 조광래 감독은 후반전에 임시로 공격수인 진순진에게 골키퍼 장갑을 맡기며 어렵게 경기를 펼쳤다
.

“9
22일 후방 십자 인대가 파열되었어요. 경기에 제대로 뛸 수 없는 큰 부상이었죠. 볼 차는 것도 쉽지 않을 정도로, 다리가 힘이 없었어요. 그래서 1차전도 몸 상태가 70%밖에 되지 않았고, 결국 경기 도중 부상을 당하더라고요. 도저히 뛸 수 없었고, 기절을 했어요
.”

비록 신의손은 부상으로 그라운드를 떠났지만 안양의 기세는 멈추지 않았다. 1차전에서 신의손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41의 승리를 거두며 우승을 사실상 예약한 안양은 2차전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종합 전적 11무로 10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

제 인생 가운데 가장 멋지고 값진 우승이었어요. 진정한 승리였죠. 나이 40에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 한 채 복귀해 다시 챔피언이 되었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

후방 십자 인대 파열은 수술과 재활 시간만 7개월이나 될 정도로 큰 부상이었다. 더욱이 신의손의 나이는 40살이었다. 사실상 은퇴를 선언하는 부상과 같았다
.

시즌이 끝난 뒤 작은 수술을 했어요. 원래 회복까지 7개월 정도 걸리는 부상을 단 3개월 만에 훌훌 털고 일어나 다시 그라운드를 뛰었어요. 남들이 다 기적이라고 했어요. 저를 치료한 닥터도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했죠
.

부상을 당했어도 너무 뛰고 싶었어요. 지난 2년 간 뛰지 못 하면서 뛰지 못하는 자의 슬픔을 알았거든요. 그래서 재활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성실히 이행했어요. 만날, 매일. 계속. 단 하루도 쉬지 않고 훈련에 임했고, 이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더라고요
.”

부상으로 인해 훈련을 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의손의 기량은 여전했다. 2001 6년 만에 0점대 실점률을 기록하며 마지막 전성기를 달렸다
.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목표는 매우 중요합니다. 목표가 있어야 앞으로 향할 수 있거든요. 안양 입단 후 목표가 생겼고, 그 목표는 챔피언 등극으로 이루었죠. 챔피언 등극 이후에도 목표가 있었어요. 바로 좋은 경기였죠. 은퇴하는 순간까지 수준 있는 기량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더욱 노력했고, 최선을 다했죠
.”

하지만 나이는 속일 수 없었다. 신의손의 나이가 40대 중반으로 향하자, 그의 순발력과 체력은 크게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

골키퍼는 집중력을 요구하는 포지션이에요. 그래서 체력이 중요하죠. 피곤함을 느끼면 집중력이 크게 떨어집니다
.

2002
년부터 힘이 많이 떨어졌어요. 체력 저하가 심했어요. 저 자신이 느낄 수 있었죠. 전반기와 후반기 플레이를 비교하며 후반기의 플레이가 확실히 좋지 않았어요. 전반전과 후반전 플레이를 비교해도 마찬가지죠. 전반전에는 할 수 있는 플레이를 후반전에 못 하더라고요
.”

결국 신의손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2004년 8월 21 포항과의 경기를 끝으로 K리그 무대를 떠났고, 이듬해 공식 은퇴식을 가지며 화려한 선수 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다
.

“K
리그에서 뛰는 동안 행복했고, 한국에 온 것을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생각해보니 K리그에 남긴 기록들이 많더라고요. 외국인 골키퍼 전성시대를 열었고, 처음으로 한국으로 귀화한 외국인 선수가 되었죠. 그리고 나이 40살에 챔피언에 올랐죠. 무엇보다도 K리그 팀들이 저로 인해 골키퍼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어요. 이것이 가장 큰 업적인 것 같아요
.”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뛰다

은퇴 후 신의손은 외국으로 가지 않았다. 한국에 그대로 남아있었고, 신의손이라는 이름도 여전했다. 2005년 서울의 골키퍼 코치를 역임했고, 2006년 경남으로 적을 옮겨 후배 양성에 온 힘을 기울었다.

박항서 감독의 부름을 받았을 때 기뻤어요. 선수 신의손이 아닌 코치 신의손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기회였거든요. 당시 경남에는 경험이 많은 골키퍼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정래 등 경남의 골문을 지켜야 하는 선수들이 K리그 적응과 일정한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데 주력했죠.”

 경남에서 2년 정도 보낸 신의손은 2008 1월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다. 바로 여자 축구였다. 그는 여자실업 축구팀인 대교 캥거루스의 수석 및 골키퍼 코치를 맡으며 여자 축구에 이바지하고 있다.

축구라는 틀 안에서 일 할 때 행복해요. 여자 축구도 축구고, 남자 축구도 축구고, 유소년 축구도 축구잖아요. 여자 축구 선수들을 가르치는 것도 똑같아요. 제가 대교에 머무는 동안 여자 축구 발전에 온 힘을 기울여야죠
.”

코치 신의손으로써 살아온 시간은 3년 남짓. 그가 지도한 선수는 바뀌었지만 그의 지도 철학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열린 마음입니다. 잠재력 혹은 능력을 가진 선수들의 마음을 열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항상 옆에서 도와주고 지원해줘야 해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바로항상입니다. 잘 할 때도, 못 할 때도. 항상 옆에서 묵묵히 도와줘야 합니다
.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경험입니다. 그래서 내가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한국에 머물며, 다양한 경험을 쌓으려고요. 물론 공부도 중요해요. 하지만 굳이 유럽에 갈 필요성은 느끼지 못 하고 있어요. 저는 여기서도 잘 배우고 있고, 유럽에 있는 친구들과 자주 연락하며 정보를 얻고 배우고 있어요
.”

최근 인천의 저격수 라돈치치의 귀화 선언으로 외국인 귀화가 다시 한 번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국내 1호 귀화 선수인 신의손의 조언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

라돈치치와도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귀화를 하려고 하는 선수들은 자신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귀화를 하기 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과연 한국 축구에 도움이 될 것인가.’입니다. 만약 한국 축구에 도움이 된다면 귀화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요
.

한국의 이해와 적응도 필요해요. 저에게 있어 한국은 축구와 같아요. 저에게 있어 한국과 축구는 같은 존재죠. 제 인생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한국과 축구는 이야기해야죠. 한국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 모습도 없었을 거예요. 그만큼 한국은 중요해요
.

한국인으로 살아온 지 어느덧 9년 정도 되었어요. 귀화한 후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항상 느끼고 있습니다. 여느 한국인과 다르지 않죠. 단 한 번도 제가 이방인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현재 신의손은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뛴다고 말했다. 외국인 샤리체프가 아닌 한국인 신의손으로서 한국 축구를 위해 노력하겠다, 라는 뜻을 명확하게 밝혔다. 어느 누구보다 한국 축구의 발전을 열망하는 그가 있기에, 한국 축구의 미래는 언제나 맑음이다.

마지막 목표는 한국 축구 발전입니다.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뛰어야 하고, 많은 기여를 하고 싶어요. 제가 일하는 곳은 어디든지 상관이 없어요. 그곳이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필요한 곳이라면 최선을 다해 일해야죠. 그리고 K리그를 비롯하여 유소년, 여자 축구를 경험했어요. 이 경험을 통해 답을 어느 정도 찾았어요. 이제 행동으로 옮겨야죠.”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구웹사이트
편집 :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지원해줘야 해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바로항상입니다. 잘 할 때도, 못 할 때도. 항상 옆에서 묵묵히 도와줘야 합니다.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경험입니다. 그래서 내가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한국에 머물며, 다양한 경험을 쌓으려고요. 물론 공부도 중요해요. 하지만 굳이 유럽에 갈 필요성은 느끼지 못 하고 있어요. 저는 여기서도 잘 배우고 있고, 유럽에 있는 친구들과 자주 연락하며 정보를 얻고 배우고 있어요
.”

최근 인천의 저격수 라돈치치의 귀화 선언으로 외국인 귀화가 다시 한 번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국내 1호 귀화 선수인 신의손의 조언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

라돈치치와도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귀화를 하려고 하는 선수들은 자신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귀화를 하기 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과연 한국 축구에 도움이 될 것인가.’입니다. 만약 한국 축구에 도움이 된다면 귀화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요
.

한국의 이해와 적응도 필요해요. 저에게 있어 한국은 축구와 같아요. 저에게 있어 한국과 축구는 같은 존재죠. 제 인생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한국과 축구는 이야기해야죠. 한국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 모습도 없었을 거예요. 그만큼 한국은 중요해요
.

한국인으로 살아온 지 어느덧 9년 정도 되었어요. 귀화한 후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항상 느끼고 있습니다. 여느 한국인과 다르지 않죠. 단 한 번도 제가 이방인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현재 신의손은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뛴다고 말했다. 외국인 샤리체프가 아닌 한국인 신의손으로서 한국 축구를 위해 노력하겠다, 라는 뜻을 명확하게 밝혔다. 어느 누구보다 한국 축구의 발전을 열망하는 그가 있기에, 한국 축구의 미래는 언제나 맑음이다.

마지막 목표는 한국 축구 발전입니다.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뛰어야 하고, 많은 기여를 하고 싶어요. 제가 일하는 곳은 어디든지 상관이 없어요. 그곳이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필요한 곳이라면 최선을 다해 일해야죠. 그리고 K리그를 비롯하여 유소년, 여자 축구를 경험했어요. 이 경험을 통해 답을 어느 정도 찾았어요. 이제 행동으로 옮겨야죠.”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구웹사이트
편집 :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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