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축구에 대한 열정과 사랑 - 박현용

"저에게는 항상 행운이란 놈이 따라 다녔던 것 같아요. 남들보다 축구는 늦게 시작했지만 고등학교, 대학교 때 훌륭하신 선생님들 그리고 동료들을 만나 우승을 못해본 때가 거의 없었으니까요.

프로에 올라와서도 당시에 선배님들이 국가대표로 많이 차출되셔서 주전출장 기회도 많이 주어졌고, 당시 외국인 감독님도 저의 우직한 스타일과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거기에 당시 대우가 K리그 최강팀이었으니까요. 저는 제자리에서 열심히 뛰었을 뿐인데 다른 선수들 보다 돋보이기 쉬웠던 것 같아요. 선수생활 이후에 거제중학교 감독으로 부임하는 첫해부터 운 좋게 우승을 하기 시작했으니까요."

이렇게 자신의 축구인생을 "행운"이라고 말하는 기장고 감독 박현용 감독,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최고의 전성을 누리던 대우 로얄스의 주전수비수 이자 91년도 K리그 수비 부분 베스트 11에 빛나는 그가 처음으로 한말이다
.

박현용 그의 화려한 축구생활을 모두 행운이라는 말로 정리 할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다. 그는 자신의 노력과 희생 그리고 축구에 대한 열정을 행운이라는 말로 바꾸어 말하고 있었다. 지금은 축구 꿈나무 양성을 위해 부산 기장고 감독을 맞고 있는 그를 직접 만나 보았다
.

축구계의 늦둥이로의 시작
박현용 감독이 처음 정식으로 축구를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일반 프로선수들이 초등학교시기 늦어도 중학교 저학년 시기에 정식으로 축구를 처음 시작하는 것에 비추어 보면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축구를 시작해 프로로서 최고의 자리까지 오르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 일까?

"
지금이라면 아마 불가능 할 거라고 생각해요. 당시 시대 상황과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저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 까지 일반 학생이었어요. 정말 스포츠를 좋아하는 특히나 축구를 너무나도 좋아하는 학생이었어요
."

"
고등학교 1학년 때 체육선생님께서 처음으로 축구선수가 될 것을 추천해 주셨어요. 그 이후로 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기나긴 고민 끝에 부모님의 동의를 얻어 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아주 늦은 시기에 전주공고 전학을 가게 되었어요
."

당시 전주공고 감독 백정식 감독을 인생 첫 축구선생님으로 생애 첫 우승의 감격을 누리며 성공적으로 축구인생을 시작한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

"
고등학교를 1학년부터 다시 시작하다보니 본이 아니게 나이가 많아 선배 대접을 받기도 하고 주장완장을 차기도 하면서 남들보다 더욱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노력만큼 항상 결과는 따라 주었으니까요. 정식으로 축구에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아 우승을 하기 시작 했죠.(웃음
)"

"
지금은 아주대가 축구의 명가로 빠지지 않지만 제가 입학할 당시에는 창단 2년째, 지명으로 선수를 뽑는 첫해였어요. 한마디로 당시에 전혀 이름 없는 무명 구단이었죠. 하지만 창단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저에게 행운처럼 또다시 우승이 찾아왔어요.(웃음
)"

"
그 당시 이은성 아주대 감독님과 김희태 코치님이 정말 선수단을 잘 이끄셨어요. 이은성 감독님이야 축구 국가대표 출신으로 축구계 원로이시고, 김희태 당시 코치님은 박지성을 발굴해 내신 걸로 유명하신데 축구 열정이 정말 대단하신 분인 것 같아요. 당시 저에게 두 분은 부모님 같은 존재였어요. 감독님이 부드럽게 저를 타일러 주셨다면 김희태 코치님은 항상 저에게 쓴말을 많이 해주셨어요. 생각해보면 정말 그분들이 없었다면 지금에 제가 있을 수 없었을 겁니다
."

대우 로얄즈의 전성기 그리고 박현용의 전성기
프로에 들어 와서도 다른 선수들 보다 늦게 시작했기에 그는 남들보다 몇 배로 열심히 할 수 있었고 축구를 하면 할수록 축구에 대한 열정이 더해갔다고 말했다.

"
대학교 졸업 후 당시 최고의 팀이던 대우 로얄즈로 가게 되었다. 당시 워낙에 팀이 지지도 않았고, 선배들도 워낙에 쟁쟁했다. 하지만 나에게 기회는 빨리 찾아 왔다. 당시 팀 선수들이 워낙에 잘했기 때문에 정용환 선배나 다른 선배들이 국가대표로 자주 차출되어 나갔고 나는 첫 시즌부터 주전 출장기회를 많이 잡을 수 있었다. 거기에 성적부진을 이유로 당시에 외국인 감독이 부임했는데 정말 나와 코드가 잘 맞았던 것 같다
."

"
프로가 되어 축구를 하면 할수록 축구에 대한 열정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축구를 늦게 시작해서 감각적인 부분은 다른 선수들에 비해 조금 떨어졌지만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해 우직하게 열심히 했다. 그러다보니 팀의 전성기와 함께 나에게도 선수 생활의 전성기가 찾아왔고, 91년에 베스트 11에도 뽑힐 수 있었고 국가대표로도 비교적 많은 경기를 뛸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리베로라는 포지션에 익숙할 것이다. 물론 홍명보라는 전설적인 리베로가 우리나라 있고 이 포지션의 시초로 독일의 베켄바워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리베로가 바로 조현용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

"
당시에 외국인 감독이 포지션을 전문화 시키고 있었다. 그런 부분들이 나에게 잘 맞았다. 수비수로서 당시 수비수로서 많은 골을 기록할 수 있었고 팀에서 나에서도 나만의 색깔을 찾을 수 있었다. 나의 우직함과 꾸준함이 감독님에게 나를 다르게 보일 수 있었던 가장 큰 부분이었던 것 같다
."

부상은 좌절이 아니라 희망이다
프로축구선수라면 누구라도 비켜 갈수 없는 숙명 같은 것이 바로 부상이다. 선수들 중에는 부상 때문에 축구를 포기하기도 하고, 부상 속에 시름하다 팬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져 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 부상을 기회 삼아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는 도약의 발판으로 삼는 선수도 있다.

조현룡 감독은 어느 누구 못지않게 "영광의 상처"를 많이 가지고 있다. 어느 포지션보다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공격수들을 마크하는 수비라는 포지션에 부상의 위험은 항상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부상이 시련을 줄때에도 조현용 감독은 절대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상을 일종에 휴식을 통한 자기개발의 시간으로 말해주었다
.

"
부상이요. 수도 없이 많이 당했죠. 광대뼈가 함몰되기도 하고, 복숭아뼈가 골절되기도 하고 하지만 부상을 당한다고 해서 결코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이런 시간은 나를 되돌아 볼 수 있게, 내가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던 것 같아요
."

이런 조현용 감독도 부상에 불운으로 안타까운 순간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세계청소년축구대회 신화의 주인공이 될 기회를 놓친 것이었다
.

"
부상 때문에 후회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아마 잘 아실 거예요 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대회 때 부상으로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는데 그때는 정말 억울하기도 했어요. 정말 힘들기도 했고요. 하지만 금방 털어버렸어요. 그 후에는 더욱 성숙한 나를 발견할 수 있었죠
."

은퇴 그 후에도 식지 않는 축구열정
대우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한 박현용 감독, 프로데뷔 9년 만에 은퇴를 선택한다. 떠날 때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떠나고자 했던 그는 198경기 17골이라는 통산 K리그 기록을 남기고 현역선수에서 은퇴했다.

"
마지막 시즌까지 많은 경기를 뛰면서 스스로 정말 후회 없는 프로생활을 했어요. 은퇴를 결정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어요. 아마 아직 식지 않은 축구에 대한 열정과 사랑 때문 일겁니다. 은퇴 후에도 그런 마음들이 전혀 사라지지 않았어요
."

이런 축구에 대한 마음은 그를 다시 축구장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은퇴 후 거제 중학교 감독으로 부임한다. 그리고 또다시 그의 우승레이스를 감독커리어로 연장해 갔다
.

"
감독되어서도 저는 운이 정말 좋았던 것 같아요. 솔직히 저 같은 초짜감독이 어떻게 바로 우승을 할 수 있었겠어요. 무조건 열심히 라는 제 우직함이 어린 중학생들에게도 귀감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

이런 성공신화를 이어가던 박현용 감독은 중학교 감독을 맡으면서도 항상 뭔가 부족함이 느꼈다고 말해 주었다
.

"
거제중학교 감독으로 있으면서 성적도 좋았고 즐겁게 축구를 즐겼지만 항상 뭔가 부족함을 느꼈어요. 그 무엇인가가 바로 저에 축구에 대한 열정과 사랑 외에도 내가 프로 생활을 하면서 느낀 모든 것을 주기에는 중학생은 좀 어리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아무래도 중학생이 신체적 한계도 있고, 받아들이는 것에도 한계가 있더라고요
."

이런 박현용 감독에게 부경고등학교가 감독직을 제안했고, 박현용 감독은 그가 정말로 아끼던 거제중학교를 떠나 부경고 감독으로 부임한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고교감독으로서 또다시 우승행진을 이어갔다
.

"
아무래도 운이 좋았다고 해야겠죠. 선수들이 저를 잘 따라 주었어요. 저도 제가 가진 모든 것 학생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해 노력했으니까요. 정말 이상하죠. 아무리 이렇게 축구에 몸을 담고 있어도 저는 축구에 대한 열정이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아요
."

이런 축구에 대한 그의 열정과 사랑은 현재 감독을 맞고 있는 부산 기장고 선수들에게서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어린선수들은 박현용 감독을 아빠라고 부르며 따르고 있었다. 뿐만아니라 선수 숙소 옆 단칸방에서 출퇴근을 포기하고 선수들과 같은 밥을 먹고 잠을 자면서 그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그대로 전해 주고 있었다
.

"
항상 가족에게 미안해요. 선수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집에는 거의 1주일에 한번 들어가기도 힘드니까요. 하지만 가족들도 그런 생활에 적응이 된 것 같아요.(웃음) 정말 가족들에게 항상 고마워하면서 살아요
."

95
년 은퇴이후 축구 감독으로서 우리나라 꿈나무들을 꾸준히 길러내고 있는 조현용 감독. 그가 긴 시간 유소년 감독직을 경험하면서 가지게 된 조그마한 바램이 있다고 말했다
.

"
조금 더 많은 프로선수의 경력을 가진 경험자 분들이 은퇴 후 곧바로 프로축구코치나 감독으로 가는 것 보다 몇 년 간이라도 우리 유소년들을 가르쳤으면 좋겠어요. 그분들의 많은 경험에서 나오는 가르침은 우리 유소년 선수들에게 정말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또한 중, 고등학생들도 그런 선수에게 배우면서 그 선수를 롤 모델로 삼아 더 나은 선수가 되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

이렇게 자나 깨나 축구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조현용 감독, 그의 이런 마음은 현역에서 은퇴한지 14년이 지난 지금도 전혀 다르지 않아 보였다
.

"
우리 아이들(기장고등학교 선수들)에게 항상 희망을 주고 싶어요. 비록 제가 지금 데리고 있는 선수들이 모두 프로선수가 되는 것이 아니지만 정말 제 자식 같고 다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램뿐이에요."

축구를 사랑과 열정이라 말하는 박현용 감독, 그와 같은 열정과 사랑이 살아있기에 화려했던 시절에나, 감독이 되어서나 항상 자신의 위치에서 그만의 우직함과 성실함을 보여주었다. 그의 이런 열정과 사랑은 오늘도 어린 선수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있다.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구웹사이트
편집 :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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