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랜타 올림픽대표팀에서 맹활약했던 한국의 카니자 박충균 ⓒ스포탈코리아
곱상한 외모에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그라운드를 내달리던 이라면 안정환을 첫 손에 꼽을지도 모르겠다. 빠른 스피드로 터치라인을 타고 올라간 뒤 문전으로 보내는 정교한 크로스 감각의 소유자라면, 언뜻 김동진을 연상할 수도 있겠다. ‘공격적인 수비수’의 표상이라면? 단번에 이영표를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이들에 앞서 이 모든 전제를 갖춘 선수가 있었으니, 박충균이다. 짧지만 강렬한 인상으로 한국 축구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이. 이번 호에서 만날 주인공이다.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대표팀은 출범 당시부터 여러 모로 화제를 모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구 소련을 이끌고 금메달을 획득한 우크라이나 출신의 명장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을 사령탑으로 앉힌 것이 그 시작이었다. 비쇼베츠 감독은 올림픽대표팀에 새로운 스타일의 축구를 접목했는데, 선 굵은 움직임으로 경제성을 살리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러한 특성 탓에 선수 선발 역시 과거와는 사뭇 다른 기준으로 이뤄졌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신장이 큰 선수가 대부분이었다는 것.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대표팀의 평균 신장이 176cm내외였던 것에 비해 96년 올림픽대표팀의 평균 신장은 180cm를 상회했다.

특히 공격수의 경우 개인기가 좋은 선수보다 체력과 결정력이 뛰어난 선수들을 선호했다. 정확도 높은 긴 패스, 기습적인 공격 작업으로 문전에서의 결정력을 끌어올리는 실리적인 축구를 구사하는 데 적합한 자원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공격적인 수비수의 등장

박충균은 큰 키(186cm)와 공간 선점 능력, 빠른 스피드, 날카로운 패스 지원 능력으로 비쇼베츠호 출범 초기부터 왼쪽 윙백으로 중용됐다. 100미터를 11초대에 주파하는 스피드는 웬만한 공격수들과의 맞대결에서 역방향으로 따라붙어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고교 시절까지 공격수로 활약했던 덕분에 공격 지원 능력도 뛰어났다. 그의 왼발에서 나오는 크로스에는 ‘예술적’이라는 찬사까지 붙었는데, 이는 끊임없는 훈련의 산물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왼발을 쓰는 선수들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희소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 같아요. 건국대 시절 킥 훈련을 집중적으로 했기 때문에 크로스와 킥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고요. 정종덕 감독님이 다양한 각도와 여러 방법으로 킥 훈련을 시키셨는데, 당시 축구인들 사이에서는 건국대 출신 선수들이 다른 학교 선수들보다 크로스와 킥 능력이 좋다는 평가가 있었어요. 고정운 선배나 (이)영표가 대표적인 인물들이죠.”

왼쪽에 박충균이 있었다면 오른쪽에는 이기형이 있었다.
이기형은 마라톤 선수에 버금가는 지구력과 기동력, 묵직한 중장거리슛을 무기로 박충균과 균형을 이뤘다. ‘좌(左)충균-우(右)기형’은 올림픽대표팀의 또 다른 공격 루트였다. 공격수는 공격만, 수비수는 수비만 하던 전통적 개념에서 ‘공격적인 수비수’로 진화한, 이상적인 조합이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감독님이 키 큰 선수들을 선호한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췄어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꼭 그랬던 것만은 아니에요. 그보다 공격적인 감각과 수비적인 능력을 다 갖춘 선수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셨거든요. 저 역시 그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어요. 또, 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노력했죠. 그러다 보니 실력이 더 향상됐고, 감독님이 더 좋게 봐주셨던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96년 올림픽대표팀은 본선에서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
1차전에서 가나를 1-0으로 이기고 2차전에서 멕시코와 비겼을 때만 해도 8강 진출의 가능성이 높았지만, 마지막 경기에서 이탈리아에 1-2로 패하면서 조별리그를 통과하는 데 실패했다. 사상 첫 메달 획득의 꿈도 물거품이 됐다. 박충균을 포함해 윤정환, 최용수, 최성용, 우성용 등 예선부터 독보적인 활약을 펼치던 ‘올림픽 스타’들의 그림자만 그림자만 길게 드리워질 뿐이었다.
96 아틀랜타 올림픽대표팀 시절 훈련 중인 박충균(앞줄 2번 선수) ⓒ베스트일레븐
독특한 스타일로 인기몰이

박충균은 축구 선수들의 고정된 이미지를 깨는 스타일로도 눈길을 끌었다. 특히 긴 머리에 헤어밴드를 하고 경기에 나서는 모습은 아르헨티나의 축구 스타 클라우디오 카니자를 연상케 했다. ‘한국의 카니자’라는 수식어가 붙었던 배경이다.

“운동선수 치고는 취미가 독특한 편이었어요. 술 마시고 노는 것보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죠. 지금도 디자인이나 패션에 관심이 많은데, 선수 시절에도 남들보다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었어요.”

“고교 시절에는 월드컵 경기를 모두 다 녹화해서 볼 정도로 해외 축구에 관심이 많았어요. 마라도나나 굴리트, 카니자 같은 선수들을 좋아했는데, 축구도 잘 하고 멋있는 선수들은 공통적으로 긴 머리 스타일이더라고요. 특히 카니자의 헤어밴드가 눈에 들어왔죠.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헤어밴드를 한 선수가 안정환인 줄 아시는 분들이 많은데, 실은 제가 제일 먼저 한 거라고요.(웃음)”

우수에 젖은 듯한 갈색 눈동자와 이국적인 마스크로도 소녀팬들의 인기를 독차지 했다. ‘아저씨’와 ‘소주’로 대변되던 축구장에 여학생 팬들과 플래카드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던 것도 박충균 세대부터였다.

“그 때가 축구 붐이 막 일기 시작한 시기였어요. 학교로 찾아오는 팬들도 많았고 심지어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그때는 팬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미처 깨닫지 못했죠. 지금에야 단 한 분이라도 소중하다는 걸 알지만요.”
아틀랜타올림픽을 앞두고 덴마크 링비와 평가전을 가졌을 당시(윗줄 왼쪽 3번째) ⓒ베스트일레븐
프로 데뷔 시즌의 치명적 실수

96년 2월 건국대를 졸업한 박충균은 수원 블루윙즈의 창단 멤버로 프로 무대를 밟았다. 당시 수원은 신인 드래프트에서 신생팀 우선 지명권을 행사해 대학 무대에서 좋은 활약을 보였던 선수들과 올림픽대표팀 스타들을 싹쓸이했다. 기존 프로팀에서도 한 명씩 수혈했고 바데아, 데니스 등 수준급 외국인 선수를 영입해 전력을 강화했다. 신생팀이었음에도 무시 못할 전력으로 기존 팀들을 위협하던 수원은 올림픽대표팀 멤버들이 팀에 복귀한 여름 이후 리그를 완전히 장악했다.

정규리그 후기리그에서는 1위를 기록하며 창단 첫 해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챔피언결정전 상대는 전통의 강호 울산 현대. 울산과의 챔피언결정전 1차전에서 1-0으로 승리한 수원은 창단 원년 우승의 꿈에 부풀었지만, 2차전에서 1-3으로 패하며 우승컵을 놓쳤다. 박충균의 프로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던 것도 바로 이 지점이었다.

챔피언결정전 2차전에 선발 출장한 박충균은 전반 33분 만에 경고 2회로 퇴장을 당했다. 우승컵을 놓고 다투는 만큼 초반부터 양 팀이 극도로 민감한 신경전을 펼친 탓이었다. 이후 경기는 더욱 과열됐다. 양팀 도합 57개의 파울을 범했고 14개의 옐로 카드에 이어 5명이 퇴장당하는 불상사가 이어졌다. 박충균의 퇴장이 도화선이 된 셈이었다.

“그 때부터 제 축구 인생이 어려워진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 팀 패배의 원인을 제공했던 사람이 저였으니까요. 이후에 FA컵을 준비하다 발목을 크게 다치는 바람에 FA컵에 뛰지 못했어요. 김호 감독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는데, 저는 제 고집에 또 팀에 쉽게 융화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결국 선수들이 모두 휴가를 떠난 상황에서도 저는 팀을 벗어나지 못하고 숙소에 남아있게 됐죠. 이후에 동계훈련을 가서도 불편한 관계가 계속되면서 어려워졌어요.”

부상 불운에 멀어진 태극마크

수원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던 박충균은 99년 상무 입대를 자원해 변화를 모색했다. 절치부심 재기를 노렸다. 3년 뒤 제대를 앞두고는 몸을 만들기 위해 등산을 시작했다. 힘을 키우려면 산을 많이 뛰는 것이 좋다는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무리했던 탓일까. 의욕적으로 시작했던 등산이 족저근막염의 발병원인이 됐다.

“밥만 먹으면 산에 올랐어요. 힘도 붙는 것 같고 몸도 좋아지는 것 같았죠. 그러다 성남으로 이적하게 됐는데, 이적 결정 후에 발바닥이 아프기 시작한 거예요. 마라톤 선수들에게서 많이 생긴다는 족저근막염이었어요. 등산을 하면서 발바닥 근막에 염증이 누적됐기 때문이라더군요.”

처음에는 축구화를 신고 뛸 때 발바닥이 시큰거리는 정도였다. 뚜렷한 외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늘 아픈 것도 아니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진통제를 맞고 뛰는 게 전부였다. 고통과는 별개로 좋은 활약이 이어졌다. 2001년 초 거스 히딩크 감독이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후 첫 소집 멤버에 발탁되는 경사도 누렸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대표팀 첫날 훈련을 하는데 발바닥이 따끔따끔하더라고요. 웬만하면 참고 하려고 했는데 나중에는 서있지도 못할 정도로 아팠어요. 히딩크 감독님은 3일 정도 참고 확인해 보자며 기다리셨어요. 그런데 부상 정도는 선수 본인이 제일 잘 알잖아요. 도저히 하루 이틀 사이에 나을 것 같지가 않아서 먼저 퇴소하겠다고 말씀 드렸죠.”

“족저근막염에는 약이 따로 없다더군요. 병원에서 ‘그냥 쉬면 낫는다’기에 3개월 정도 쉬기만 했는데, 다시 두세 게임 뛰다 보니 또 아파왔어요. 결국 시즌을 접고 독일로 가서 정밀 진단을 받았습니다. MRI로 확인해 보니 발바닥에 염증이 깔려있더라고요. 약물 치료는 안 되고 수술밖에 방법이 없었어요. 결국 수술을 받았는데, 재활하는 데만 꼬박 1년이 걸렸죠.”

독일에서 재활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왔던 시기는 2002년. 한국 대표팀이 월드컵 조별 예선에서부터 승승장구하며 4강 신화의 위업을 이뤄내고, 온 국민이 대표팀과 함께 붉은 물결을 이루며 절정의 환희를 만끽하던 때였다. 국내에서 마무리 재활 훈련에 매달려있던 박충균에게는 마냥 즐거울 수 없던 시간이기도 했다.

“대표팀에서 끝까지 남았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죠. 하지만 히딩크 감독님께 제대로 실력을 보이지 못하고 부상 때문에 물러났던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커요. 온 국민이 축제 분위기일 때 저는 많이 속상했던 게 사실이에요. 대표팀이 한 게임 한 게임 이길 때마다 괴롭더라구요(웃음). 그래도 지난 시간이니 지금은 웃을 수 있죠. 저 대신 들어갔던 선수가 건국대 후배인 현영민인데, 영민이는 끝까지 살아남았으니 축하할 일이고요.”

재활 후 복귀에 성공한 박충균은 2003년 움베르투 쿠엘류 국가대표팀 감독에 의해 다시 태극마크를 달 기회를 얻었다.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고, 쿠엘류 감독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대표팀의 왼쪽 측면 수비 자리는 2002년 월드컵 이후 부쩍 커버린 후배 이영표의 몫이었다.

“그 때는 이미 제 나이가 서른 살을 넘기던 시점이었어요. 영표의 경기력이 워낙 좋았기 때문에 제가 뛸 일은 많지 않았을 거예요. 대표팀에 크게 미련을 갖지 않게 되었죠. 쿠엘류 감독님과는 짧았지만 좋은 기억을 가졌던 것 같아요.”
성남 시절 리그 최고의 왼쪽 풀백으로 각광받았던 박충균 ⓒ베스트일레븐
성남 리그 3연패 기여..부산 이적 후 은퇴

2003년은 박충균에게 프로 인생 최고의 해였다.
부상을 완전히 털고 리그 경기에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로 데뷔 후 가장 많은 경기(25경기)를 소화하며 성남의 리그 3연패를 견인할 수 있었다. 2001년부터 성남의 우승을 경험한 그였지만, 우승 주역으로 활약했던 2003년의 느낌은 좀더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성남에서 3년을 지낸 박충균은 2004년 부산으로 이적했다. 많은 경기에 출장하지는 못했지만 고참 선수로 고비마다 팀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맡았다.

“부산으로 이적한 후부터 시야가 트이는 느낌이었어요. 프로 초기에 김호 감독님이 ‘빠르기만 하면 뭐해’라고 질책하신 적이 있었어요. 그때는 어린 마음에 섭섭하기만 하고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부산에서야 수비하는 방법을 알게 된 거예요. 어느 상황에서 물러야 하고 또 압박을 해야 되는지 눈에 들어오고, 수비하는 게 재밌어지더라고요.”

2006년 어느덧 서른 네 살이 된 그는 대전으로 또 한번 이적해 한 시즌 동안 22경기를 소화하는 노익장을 과시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기에 스토퍼로 보직을 변경하며 수비수의 또 다른 매력을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올림픽대표팀과 상무에서 중앙수비수로 뛴 적은 있지만, 선수 생활 황혼기의 경험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상무 시절에 이강조 감독님이 센터백으로 뛰는 게 더 좋겠다는 조언을 주신 적이 있어요. 저도 어느 정도 공감했었고요. 측면에서 뛰는 게 익숙하긴 하지만 스토퍼로 뛰는 게 체력 소모가 덜하다는 점에서 오히려 잘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가운데 서 있으면 경기장이 훤히 보이니까 뛰기에 훨씬 편했어요. 그런데 운대가 맞지 않았는지, 대전을 제외하고는 제가 있었던 팀들이 모두 포백을 썼어요. 뒤늦게 든 생각이지만 스리백을 쓰는 팀의 중앙에서 뛰었더라면 좀더 잘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죠.”

대전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그는 2007년 다시 부산으로 복귀했다. 이제는 정말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는 시점이었다. 2007년 초 잠시 팀을 맡았던 박성화 감독이 올림픽대표팀의 지휘봉을 잡게 되면서 김판곤 감독 대행이 팀을 꾸리게 되자 박충균은 자원해서 팀의 개편을 도왔다.

“김판곤 선생님이 젊은 선수들 위주로 새로운 분위기를 만드는데, 노장들을 쓰기 어려워하시는 부분을 이해했어요. 저 역시 체력이 떨어지는 부분도 있었고 지도자 생활에 대한 생각도 있었기 때문에 슬슬 은퇴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시즌 중에 감독님께 말씀드리고 호주 유학을 준비했어요.”
인터뷰 중인 박충균 ⓒ스포탈코리아
성남 유소년팀에서 지도자로 제2의 축구인생 열다.

지도자 연수 겸 영어 공부를 위해 호주로 떠났던 박충균은 지난 3월 귀국해 새로운 축구 인생을 열고 있다. 성남일화의 U-15 유스팀(풍생중)의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정신없죠. 육체적, 정신적으로 조금 힘들긴 하지만 어린 친구들이랑 함께 축구를 하는 게 의외로 재미있어요. 선수로 뛸 때보다 더 적성에 맞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어린 선수들보다 기술이나 경험에서는 제가 좀더 앞서 있으니, 이걸 좀더 잘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과제죠. 무엇보다 지금의 초심을 끝까지 유지하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지도 철학을 운운하기에도 조심스럽다. 구체적인 목표와 지향점이 머릿속에 있지만 이를 드러내기에는 이르다는 것. 하지만 학원 축구에서 안주하지 않고 더 큰 목표를 향해 나가겠다는 약속은 잊지 않았다.

“기회가 언제 올지 모르니까,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도록 잘 준비하려고 해요. 지금은 더 많은 걸 경험해야 하고, 그러기 위한 시간이 필요한 때죠. 이제 시작입니다.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지켜봐 주십시오.”


인터뷰=배진경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09년 5월호 '나의 선수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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