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주목받았던 윙어 심봉섭 ⓒ스포탈코리아
90년대 초반의 한국축구를 기억하는 팬들이라면 심봉섭(43)이라는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심봉섭은 경신고와 한양대를 거쳐 1989년 대우(현 부산)에 드래프트 1순위로 뽑히면서 프로무대에 뛰어들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축구의 윙어 계보를 이을 유망주로 각광받았으나 허리 부상 등으로 기대했던 만큼의 활약을 펼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스피드를 살린 측면 돌파는 알고도 막지 못할 정도로 일품이었고, 90년대 초반 K-리그를 빛낸 스타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축구선수였던 큰 형의 영향으로 축구 시작

심봉섭이 처음 축구를 시작한 것은 숭곡초 5학년 때였다. 심봉섭의 큰 형이 경신고 축구선수였고, 자연스럽게 축구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경기도 여주가 고향이었던 그는 서울로 상경해 축구부에 가입했다.

“큰 형님이 축구선수라서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아 축구를 하게 됐죠. 큰 형님이 매일 유니폼 보여주고 공 차고 그러니까 저도 하고 싶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더군다나 TV로 차범근-이회택 선수 등의 플레이를 보면서 그런 욕구가 더욱 강해졌죠.”

“집에서도 반대 없이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셨고요. 원래 저희 집이 경기도 여주였는데, 형님 친구 분이 숭곡초 코치셨어요. 그 분이 축구할 생각 있냐고 해서 당장 올라갔던 거죠. 그런데 첫날 훈련 끝나고 괜히 축구 시작했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선착순으로 운동장을 도는데, 너무 힘들어 쓰러졌었죠. 공차고 게임하는 것만 생각했는데, 첫 훈련이 그런 체력훈련이어서..(웃음)”

숭곡초를 졸업한 그는 축구명문인 경신중과 경신고에서 청소년 시기를 보냈다. 어렸을 때부터 스피드가 뛰어났던 그는 자연스럽게 윙 포지션에서 뛰었고, 은퇴할 때까지 윙어로서 활약을 펼쳤다.

“축구 시작하기 전부터 ‘발발이’라는 별명이 있었어요. 주위에서도 빠르다고 이야기하셨고요. 당시에는 4-2-4 포메이션을 많이 사용했는데, 거기서 전형적인 윙어 역할을 맡았죠.”

“당시를 돌이켜보면 힘들고 고통스런 기억만 있지, 재미있었던 기억은 거의 없었어요. 저도 지금 지도자이지만, 훈련방식도 딱딱하고 강압적인 면이 많았죠. 만약 그 당시로 돌아가 다시 그렇게 축구하라고 하면 포기할 것 같습니다.(웃음)”

“그 때는 독특하게 합숙은 없었어요. 통학을 하면서 오후에 한번 팀 훈련을 했었죠. 대신에 새벽과 야간에 개인훈련을 했는데, 주로 줄넘기와 계단 뛰기, 드리블 훈련 등을 많이 했습니다.”

심봉섭이 있을 당시 경신중-고는 나름대로 성과를 올렸다. 경신중 시절에는 전국대회 4강권을 유지했고, 경신고 역시 비슷했다. 당시 멤버로는 윤상철(현 경신고 감독)과 강경수(현 대동초 감독, 이상 1년 선배), 안종관(현 현대제철 감독, 동기), 하석주(전남 코치) 등이 있었다.

청소년대표팀 발탁, 그리고 한양대 진학

고교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심봉섭은 고2 시절이었던 1984년에 U-19 대표팀에 발탁됐다. 처음 대표팀 유니폼을 입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방글라데시에서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U-19 챔피언십 예선에서 한국은 태국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며 본선행에 실패했다. 심봉섭의 첫 대표팀 경험은 씁쓸하게 막을 내렸다.

“당시 김삼락 감독님이셨고, 주장이 (김)주성 선배였죠. 대학에서 뛰는 형들이 주축이었고, 저와 김봉길이 막내였어요. 저는 당시에 4-3-3 포메이션의 오른쪽 윙으로 뛰었어요. 대표팀 발탁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모든 게 다 이뤄진 것 같았죠.(웃음) 막연한 꿈으로만 생각했는데, 성취감을 느꼈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서 경기를 하는데, 편파판정이 정말 심했어요. 태국과의 경기에서도 우리가 이긴 경기였는데, 판정으로 인해 문제가 많았죠. 결국 승부차기에서 져서 탈락했습니다.”

경신고를 졸업한 심봉섭은 여러 대학의 구애 속에서 한양대를 선택했다. 다른 이유보다는 어린 시절 우상이었던 이회택이 한양대 감독으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 한양대는 이기근, 유병옥, 차상광, 유동관 등 좋은 멤버를 갖춰 대학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기도 했다.

“원래는 고려대로 가기로 결정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한양대에서 제의가 왔고, 저로서는 어린 시절 우상이었던 이회택 선생님이 계셨기에 주저 없이 선택했죠. 당시에는 이 문제 때문에 학교간 말이 많기도 했죠.”

“대학에 가서 공격수로서 필요한 움직임들을 이회택 선생님께 특별지도 받았어요. 공격수들은 이동 트래핑이나 스피드를 활용한 동작들이 중요한데, 이런 부분에 대해 많이 배웠죠. 중고 시절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알아가면서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88 올림픽팀에 선발..대표팀과의 인연

한양대에서 공격수로 눈을 뜬 심봉섭은 새내기임에도 팀을 대학선수권 우승으로 이끌고, 득점왕까지 차지했다. 이를 눈여겨본 당시 88 올림픽팀의 박종환 감독은 그를 선발했다. 심봉섭은 88 서울 올림픽 직전까지 대표로 활약했지만, 막판에 탈락하는 아픔을 맛봤다.

“85년말에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해 88팀이 출발했죠. 월드컵팀과 올림픽팀으로 이원화되어 운영되었고, 저는 87년말까지 계속 88팀에 선발되었어요. 그런데 막판에 프로 선수들이 참가한다고 해서 아마추어 선수들은 대거 탈락했습니다. 아쉬움이 조금 있었죠.”

한동안 대표팀에서 멀어졌던 심봉섭은 프로 입단 이후인 1989년에 성인 대표팀에 발탁됐다. 90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 출전하는 대표팀 명단에 포함된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도 최종 목적지인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까지는 가지 못했다.

“월드컵 예선을 뛰면서 나름대로 괜찮게 플레이했다고 생각했어요. 그 덕분에 자신감을 얻어 K-리그에서도 잘 적응했고요. 그러나 월드컵 본선까지 가기에는 뭔가 부족했나봅니다.(웃음) 저로서도 아쉬움이 남죠.”
1990년 당시 대우 유니폼을 입고 플레이하는 심봉섭 ⓒ월드축구
호화군단 대우에 드래프트 1순위로 선발

1989년 한양대를 졸업한 심봉섭은 K-리그 드래프트를 통해 대우에 입단하게 됐다. 호화군단 대우의 1순위 지명자라는 것만 봐도 그에 대한 기대를 알 수 있었던 부분. 심봉섭 역시 대우 유니폼을 입고 뛰는 것이 꿈이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프로무대에 뛰어들 수 있었다.

“대학 시절부터 대우와 연습게임도 많이 했어요. 아마 그 당시 대부분의 선수들이 대우로 가고 싶어 했을 겁니다. 최고의 팀이었으니까요. 가고 싶은 팀에 가게 됐으니 기분은 정말 좋았죠.(웃음) 행운도 따랐는데, 제가 입단하기 전 해에 마침 대우가 부진해서 꼴찌를 했었어요. 대표 선수들이 전부 차출되다보니까 성적이 나지 않았죠. 그래서 드래프트 지명권이 높았고, 그래서 제가 선발될 수 있었습니다.”

강력한 신인왕 후보였던 심봉섭은 첫 시즌에 23경기에 나서 2골-3도움을 기록했다. 국가대표팀에도 선발되어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 다음 해에도 24경기에 출장했던 그는 93년까지 매년 27경기 이상을 소화하며 호화군단 대우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사실 프로에 처음 왔을 때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아마추어와 차이가 있었어요.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만큼의 활약은 못했죠. 1순위로 대우에 입단한 만큼 주위의 기대도 컸었거든요. 자괴감까지 들었습니다.”

“그래도 팀에서 배려해 꾸준히 경기에 나서다보니 서서히 적응을 했고, 중간에 월드컵예선을 뛰었는데 나름대로 괜찮은 플레이를 했었어요. 그러면서 자신감이 붙어서 후반기에는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플레이를 할 수 있었죠.”

“그 때 신인왕으로 거론됐던 사람이 저와 고정운, 유승관, 김봉길 정도였어요. 꼭 신인왕을 하겠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막연하게 기대는 했었죠. 그런데 대표팀 왔다갔다하면서 공격 포인트를 많이 올리지 못했어요. 7월 정도 되면서 마음을 비웠죠.(웃음) 결국 고정운이 받았어요.”
1992년 대우 동료들과 함께(가운데줄 맨 오른쪽이 심봉섭) ⓒ월간축구
대우에서의 심봉섭

1989년 데뷔 시즌부터 꾸준히 경기에 나선 심봉섭이지만, 그 중에서도 1991년은 최고의 한 해였다. 30경기에 나서면서 심봉섭 개인에게는 한 시즌 최다출장기록을 세웠으며, 팀은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 무렵 대우에는 정해원, 이태호, 변병주, 김주성 선배 등 공격진이 쟁쟁했어요. 그 속에서 첫 해부터 주전으로 뛴 것에 대한 자부심은 있죠. 선배들 통해서 배운 점도 많고요. 훈련 외적으로는 변병주 선배가 가장 잘 챙겨주셨고, 공격수로서는 정해원, 이태호 선배를 롤 모델로 삼았어요. 정해원 선배의 스크린플레이나 돌아서는 움직임은 정말 일품이었거든요. 그걸 배우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이태호 선배의 골 감각도 배우고 싶었는데, 그것은 본능적인 부분이라 배운다고 되는 것은 아니더군요.(웃음)”

“91년의 경우에는 컨디션이나 자신감, 축구에 대한 이해 등에서 최고였던 시절이에요. 팀도 우승하면서 개인적으로는 최고의 한 해를 보냈죠.”

그러나 좋은 일만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고질적인 허리 디스크는 심봉섭의 발목을 잡았다. 선수로서 비상할 나이에 찾아온 부상의 덫은 그를 좌절하게 만들었다.

“축구를 하면서 허리 부상으로 8번 정도 쓰러졌어요. 발목이나 인대 부상은 너무나 많았고요. 90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예선 때도 허리가 좋지 않아 힘들었는데, 포기할 수 없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에 계속 뛰었죠. 그런데 그게 악화가 됐습니다. 허리 디스크 진단을 받았는데, 수술하면 축구를 못할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결국 치료를 병행하면서 재활을 하는 쪽으로 결정했어요. 그런데 요즘처럼 재활이 체계적이지 않다보니 부상은 누적되고, 다치는 빈도도 높아지고 그랬죠.”

“92년부터는 거의 훈련을 할 수 없었어요. 그러다보니 다른 부상도 찾아오고...93년부터는 사실상 축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죠.”

1993년을 기점으로 점점 빛을 잃어가던 심봉섭은 95년 자유계약으로 풀리면서 LG(현 서울)행을 선택했다. 마지막 도전이었다. 그러나 동계 전지훈련 기간에 무릎을 다쳐 연골수술을 받아야 했다. 결국 심봉섭은 그 해에 6경기 출장에 그치며, 현역에서 은퇴했다.

“LG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동남아 전지훈련에서 무릎 연골을 다쳤고, 병원 가서 진단받으니까 뼈 이상으로 수술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결국 수술을 했는데, 오진이었어요. 그랫 다시 일본에 가서 재검 받고 연골이 찢어졌다는 말에 수술을 받았죠. 2번이나 수술을 받다보니 양 발의 근력 차이도 크고, 정신적 스트레스도 대단했어요. 결국 은퇴를 결심했죠.”

“많은 분들이 (변)병주 형의 후계자로 기대하셨어요. 그런데 몸 상태가 좋지 않았고, 그것을 또 정신적으로 이겨내지 못했죠. 지금처럼 재활이 체계적이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도 있어요. 통증이 조금만 없어지면 다시 뛰고 그러다보니 계속 부상을 입었죠.”

“결정적인 계기는 94 미국 월드컵을 앞둔 시점이었죠.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고, 경기도 잘해서 대표팀 선발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런데 그 때 허리를 또 다쳐서 몇 달을 쉬었죠. 결정적인 순간마다 이런 일이 벌어지니 자포자기가 되더군요.”
인터뷰 중인 심봉섭 ⓒ스포탈코리아
은퇴 후 지도자 공부 위해 아르헨티나로 떠나다.

현역 은퇴 후 심봉섭은 의외의 결단을 내렸다. 지도자 수업을 위해 아르헨티나행을 선택한 것. 거의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유럽으로 떠나는 것에 반해 그는 아르헨티나의 축구 지도자 학교를 2년간 수료했다.

“대우에서 뛸 때 3개월간 아르헨티나의 명문 클럽인 산 로렌소로 연수를 간 적이 있었어요. 거기서 3개월 동안 그들과 똑같이 선수 생활을 했죠. 그 때의 인연으로 아르헨티나로 유학을 갔습니다.”

“아르헨티나는 단기 지도자 코스는 없어요. 최소 1년 이상의 과정이죠. 제가 스페인어를 전혀 못하니까 공부하면서 2년 코스로 지도자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 학교는 16명의 교수가 있고, 굉장히 체계적으로 가르쳤어요. 피지컬, 심리학, 생리학, 영양학 등 세분화되어 있었죠. 지금 와서 아쉬운 것은 의사소통이 원활했다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을텐데라는 것이죠. 어쨌든 거기서 지도자 공부를 하면서 산 로렌소와 이야기가 잘 되어서 선수들 훈련도 지켜보고, 경기도 직접 관전하고 그랬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 3년여간 생활했던 그는 1999년 3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해체된 하남고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다가 2004년부터 현재의 팀인 대동세무고 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팀 자체가 처음에는 안정적이지 못했어요. 스카웃도 힘든 점이 많았고요. 3~4년간 팀을 안정시키는데 중점을 뒀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 배운 부분들을 접목시키려고 하고 있어요. 주입식보다는 스스로 참여하고 이해하고 재미있어하는 훈련을 시도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죠. 팀 훈련과 개인 훈련의 비중도 50:50으로 해서 개인 기술의 향상에도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어요.”

무엇보다 심봉섭에게는 올해부터 실시되고 있는 주말리그가 반갑다. 아르헨티나에서 배웠던 것들과 산 로렌소에서 클럽 훈련을 함께 하며 체득했던 노하우들은 리그를 베이스로 깔고 있는 프로그램들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고교 지도자 분들이 뭐라고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주말리그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아르헨티나는 모든 것이 클럽 시스템이다보니 1주일 단위로 프로그램이 돌아가요. 한국에 와서 토너먼트에 적응하려니 쉽지 않았죠. 이제는 그 때 배웠던 부분들이 더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무엇보다 리그는 1년간 선수와 팀 관리를 잘하면 어느 정도 성과를 올릴 수 있어요. 리그제를 통해 3~4년 안에 대동세무고를 한 단계 올려놓고 싶은 욕심입니다.”


인터뷰=이상헌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09년 7월호 '나의 선수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신고
Posted by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BLOG main image
by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공지사항

카테고리

전체보기 (125)
사진으로 보는 한국 축구 (4)
K리그 역사 바로 알기 (9)
K리그의 전설 (42)
K리그 꿈의 구장 (2)
축구인 인터뷰 (68)
K리그 역대 순위표 (0)
K리그 역대 수상 내역 (0)
K리그 역대 엠블럼 (0)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Total : 107,351
Today : 21 Yesterday : 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