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의 멀티 플레이어로 평가받았던 유상철 ⓒ스포탈코리아
축구선수 유상철(38)에 대해 구구절절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유상철은 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면서 ‘최고의 멀티 플레이어’로 칭송받았으며, 98년 프랑스 월드컵과 2002 한일 월드컵에서도 맹활약을 펼치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A매치에 122회 출장해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으며, 98월드컵 벨기에전과 2002월드컵 폴란드전 골을 비롯해 총 18골을 넣은 바 있다. 울산현대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쳐 94년과 98년, 2002년 K-리그 베스트11과 98년 K-리그 득점왕, K-리그 우승 2회 등의 업적을 세웠다. 또한 J리그 요코하마 F마리노스와 가시와 레이솔에서도 인상적인 플레이를 선보이며 한국축구의 강력함을 알렸고, 특히 2003년과 2004년에는 요코하마 소속으로 J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기도 했다.

축구밖에 몰랐던 학창 시절

유상철이 처음 축구를 시작했던 것은 응암초 4학년 때였다. 반대항축구대회를 통해 축구부 감독의 눈에 띈 것이 계기였다. 그 시절에는 지금 유상철의 대명사가 된 ‘멀티 플레이어’는 아니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윙어였어요. 그 뒤로는 미드필더도 봤죠. 그 때는 그냥 축구가 좋아서 시작했던 거라 플레이 스타일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냥 경기장에 나가서 볼 차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았을 뿐이에요.”

응암초를 졸업한 유상철은 ‘축구 명문’ 경신중과 경신고를 거쳤다. 그리고 이 시기를 거치면서 서서히 유상철은 멀티 포지션을 소화하기 시작했다. 또한 화려한 플레이로 어필한 것은 아니지만, 팀 플레이가 좋은 선수로 평가받으면서 U-19 대표팀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정말 축구밖에 몰랐어요. 지금 생각하면 순진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축구가 좋아서 선배들이나 감독님이 엄하게 대해도 그것 때문에 축구를 그만두고 싶다든지 하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중학교 때까지 워낙 키가 작아서 그것 때문에 고민한 적은 있었죠.(웃음) 다행히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키가 갑자기 크면서 공격수까지 하게 됐어요.”

“그 시절의 저는 눈에 확 들어오는 선수가 아니었어요. 그러나 팀에 필요한 역할을 하는 선수였고, 청소년대표팀이나 대학선발에도 꾸준히 선발됐죠.”
경신고 시절의 유상철 ⓒ월간축구
남북단일팀으로 인해 U-20 월드컵 참가의 기회 놓쳐

경신고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유상철은 U-19 대표팀에 선발됐다. 그리고 1990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U-19 챔피언십에서 북한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데 일조했다. 당연히 1991년 포르투갈에서 열리는 U-20 월드컵에 참가해 세계를 경험하리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그 때 마침 남북단일팀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결국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남북 단일팀이 구성됐다. 남북한 선수가 절반씩 선발되면서 유상철은 최종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아픔을 겪었다.

“아쉬움이 있긴 하죠. 아시아대회를 다 치르고 우승까지 했는데, 마지막에 단일팀 구성이 됐어요. 남북에서 절반씩 선발되는 것을 원칙으로 했고, 북한에 가서 마지막으로 평가전을 치렀죠. 거기에서 떨어졌습니다. 떨어졌을 때는 같이 고생했던 선수 절반이 못 나가는 상황인지라 선수들 모두가 야속해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좋은 계기가 된 것 같기도 해요. 계속 순조롭게 선수 생활을 했었고, 만약 U-20 월드컵까지 나갔다면 더 순항하는 거잖아요. 그 때 좌절을 맛봤던 경험이 긍정적으로 작용했어요. 뭔가 더 보여주겠다는 오기가 생겼고, 그것이 저에게는 좋은 동기부여가 된 것이죠.”

건국대 진학 - 용의 꼬리가 되기보다는 뱀의 머리가 되겠다

경신고에서 두각을 나타낸 유상철을 원하는 대학은 많았다. 그 무렵에는 고려대, 연세대, 한양대 등이 여전히 축구명문으로서의 위용을 뽐내고 있었고, 유상철에게도 스카우트의 손길이 다가왔다. 그러나 유상철의 최종 선택은 건국대였다. 그는 학교의 명성보다는 1학년부터 당장 실전에서 뛸 수 있는 팀을 원했다. 그것이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이라고 믿었다.

“고3때 첫 전국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대학 진학이 결정 났어요. 당시에는 전국대회 4강에 들어야 대학에 갈 수 있는 제도가 있었죠. 여러 팀에서 제의가 왔는데,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연-고대나 한양대는 워낙 좋은 멤버들이었고, 잘한다는 선수들은 다 가잖아요. 그 안에서 생존경쟁을 하면서 1학년부터 경기를 뛰기란 힘들 거란 생각을 했죠.”

“저는 무조건 1학년부터 경기에 나설 수 있기를 바랐어요. 건국대는 (황)선홍이 형이 대표팀에 왔다갔다하던 시절이라 내가 1학년부터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용의 꼬리가 되기보다는 뱀의 머리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건국대로 결정한 후에 10월이었던가? 강릉 KBS배 대회를 치르는데, 건국대 정종덕 감독님이 ‘고려대 측에서 너랑 고려대 가기로 한 선수 하나랑 바꾸자고 하는데 갈래?’라고 하시더라고요. 안 가겠다고 했죠.(웃음) 만약 제가 건국대가 아닌 연-고대를 갔다면 어떤 상황을 맞이했을까 생각해보기도 하는데, 매번 건국대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후배들에게도 당부하고 싶은 것이 팀의 명성을 보고 진로를 결정하지 말라는 거예요. 팀의 명성이 아니라 자기가 경기를 뛸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는 팀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 무렵의 건국대는 한국축구를 대표했던 선수들을 많이 배출했다. 정종덕 감독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력으로 고교 시절 최고의 선수는 아니었던 선수들을 잘 조련해 최고의 선수로 성장시켰다. 유상철을 비롯해 고정운과 이상윤, 황선홍, 박충균, 이영표, 현영민 등이 이 시절에 건국대가 배출한 선수들이었다.

“정종덕 감독님은 선수를 보는 눈이 남다르셨어요. 연-고대에 비해 선수 스카우트 면에서 불리했지만, 꾸준히 좋은 선수들이 배출됐죠.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알짜배기 선수들을 잘 파악해서 데려오신 덕분이죠.”

“정 감독님이 엄청나게 무서운 분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정이 굉장히 많으신 분이에요. 앞에서는 굉장히 무서워도 성실하게 훈련을 잘 따라오고, 팀을 위해 희생을 하면 신뢰해주시고, 신경을 많이 써주시죠. 고마우신 분입니다.”
울산 시절의 유상철 ⓒ월간축구
1994년 울산현대 입단, 차범근 감독과의 첫 만남

건국대를 졸업한 유상철은 드래프트를 통해 현대(현 울산)에 입단했다. 사실 울산은 유상철이 원했던 팀은 아니었다. 서울에서 성장한 유상철은 당시 서울을 공동 연고로 하고 있던 LG(현 서울)나 일화(현 성남), 유공(현 제주) 등의 팀으로 가고 싶어했다.

“드래프트를 넣었는데, 1순위로 울산에 가게 됐어요. 당시에는 앞이 깜깜했죠. 대학 시절 마지막 대회가 울산 공설운동장에서 열렸었는데, 그 때 너무 실망했었거든요. 잔디 상태는 엉망이었고, 특히 하프라인 쪽에는 잔디가 다 파여 맨땅이었어요. 그리고 울산 자체도 당시에는 아무 것도 없었고요. 다시는 울산은 안 오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공교롭게 울산현대로 오게 됐어요. 난감했죠.(웃음)”

현대에 합류한 유상철은 처음 경험하는 프로세계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몸을 완벽하게 만들지 않은 상태에서 동계훈련에 합류한 것이 화근이었다. 또한 프로의 냉정한 경쟁세계에 대해서도 적응되지 않았다.

“대학대회가 끝나고 한 두 달 후부터 프로무대에 대비해 개인운동을 했는데, 나름 열심히 했지만 혼자 하니까 잘 안되더라고요. 모이라고 해서 내려갔는데, 엉망이었죠. 차범근 감독님이 선수로도 안 봤어요.(웃음) (강)재순이 형과 1:1 훈련을 하는데 툭 치고 달리면 떨어져나가고 그랬죠. 차 감독님이 많이 실망하셨어요.”

“선배들과 친해져서 프로세계에 대해서도 배워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도 있어요. 선배들이 아무런 이야기를 안 해주는 거예요. 알아서 해야하는구나, 프로는 냉정한 세계구나라는 걸 처음 느꼈죠.”

그런 와중에도 유상철은 94년 미국 월드컵을 대비한 대표팀 전지훈련에 포함되었고, 훈련 과정을 통해 몸 상태를 끌어올렸다. 결과적으로 월드컵 최종명단에는 뽑히지 않았지만, 유상철에게는 만족스런 전지훈련이었다.

“94월드컵을 준비하는 대표팀이 전지훈련을 가는데, 저도 선발이 됐어요. 제가 최종엔트리까지 남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훈련을 열심히 소화해 몸 상태를 끌어올리는데 중점을 뒀어요. 울산에 복귀해서 인정받는 것에 목적을 뒀던 거죠. 실제로 최종엔트리에서는 떨어졌어요.(웃음)”

“개막전 엔트리에는 들어가지도 못해 실망했지만, 훈련이나 연습게임을 통해서 꾸준히 저를 어필했죠. 결국 3월 30일 LG전에서 첫 기회를 얻었어요. 정말 열심히 했죠. 당시에는 오른쪽 윙백으로 뛰었는데, 죽기 살기로 했어요. 그 뒤로는 계속 기회를 얻었죠. 감독님께서도 브라질의 조르징요(브라질 대표팀과 레버쿠젠의 오른쪽 풀백으로 활약)와 비교하시면서 유럽에서도 통할 수 있다고 극찬을 해주셨죠.(웃음)”

결국 그는 입단 첫 해에 26경기에 출장해 5골-1도움을 기록하며 K-리그 베스트11에 선정되는 기쁨을 누렸다.

“그 시절에는 경기장 나가서 경기하는 것 자체가 즐겁고 행복했어요. 언론에서 발표하는 경기 평점 등도 저를 자극하게 만드는 요소였고, 계속 경기를 나가면서 스스로 향상되는 것을 느꼈던 시절이었죠.”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일본전에서의 유상철 ⓒ월간축구
축구팬들에게 이름을 알린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그 이전부터 대표팀에는 심심찮게 선발되었던 유상철이지만, 매번 벤치를 지켜야만 했다. 그는 1994년 3월 미국과의 경기를 통해 드디어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당시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는데, 어떻게 뛰었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나더군요.(웃음) 사실 별 생각이 없었는데, 경기 전에 어떤 기자 분이 첫 A매치라고 이야기하시는 바람에 부담이 커졌어요.”

이후 94월드컵 최종엔트리에서 탈락한 유상철은 K-리그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10월에 열렸던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 출전하게 됐다. 그리고 이 대회는 유상철이라는 이름 석자를 한국 축구팬들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유상철은 일본과의 8강전에서 0-1로 뒤지던 후반 6분, 황선홍의 힐패스를 받아 동점골을 터트렸다. 한국은 유상철의 동점골과 황선홍의 2골을 묶어 일본에 3-2로 승리했고, 이 경기는 역대 한일전 명승부 중 하나로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아시안게임 때는 제가 최종수비수였어요. 일본전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데, 희한한 것은 제가 언제 공격까지 올라가서 골을 넣었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웃음) 뭔가 되려고 하니까 그런 일도 생기나 봐요. 어쨌든 그 골로 자신감을 많이 얻었고, 대표팀에서도 주전으로 확실히 자리 잡을 수 있었죠.”

최고의 멀티 플레이어로 우뚝 서다

초-중학교 시절 윙어와 중앙 미드필더로 뛰었던 유상철은 고교와 대학 시절에는 공격수까지 커버했다. 울산현대 초창기에는 오른쪽 윙백으로 뛰었으며, 이후 대표팀과 소속팀에서 중앙수비수로 뛰기도 했다. 물론 중앙 미드필더는 기본 옵션이었다. 특히 98년에는 K-리그 득점왕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제가 언제부터 멀티 플레이어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어요.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런저런 포지션들을 다 보면서 어느 순간부터 어떤 포지션에 가도 당황스럽지 않고 재밌더군요. 예를 들어 대표팀에 갔는데, 미드필더인 동료에게 감독님이 다른 포지션을 주문하면 당황해서 소화하지 못하는 경우를 보면 저는 ‘왜 못하지? 잘할 수 있을텐데’라는 생각을 하곤 했어요.(웃음)”

“지금 유소년들을 가르치면서도 한 포지션만 보는 것보다 여러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요. 그것이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지도자 입장에서도 그런 선수들을 선호하는 추세이고요.”

“공격수로 나가면 골 넣는 것과 전방 침투 움직임의 재미, 수비수로 나가면 공격수를 막는 재미, 미드필더로 나가면 패스를 공급하고 어시스트하는 재미, 각 포지션마다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즐기면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유상철이 ‘멀티 플레이어’로서 칭송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초창기에는 ‘여러 포지션을 소화하지만,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선수’, ‘땜빵용(?) 선수’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멀티 플레이어라는 개념이 생소했죠. 그리고 일반적으로 자신 있는 포지션이 없으니까 여기저기 떠돌아다닌다는 인식이 많았어요. 땜빵 취급을 받은 거죠.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포지션은 어디인가요?’라고 질문도 많이 받았고요. 그럴 때마다 가장 편한 포지션은 미드필더이지만, 어느 포지션도 소화할 수 있다고 말하곤 했죠.”

“그런데 ‘나는 어디에도 못 쓰는 사람인가? 포지션이 없어서 계속 돌리는건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히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전문 포지션의 선수가 있는데도 나를 거기에 기용한다는 것은 내가 그 선수보다 나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는가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니까 편해지더군요.”

항간에는 유상철이 여러 포지션이 아닌, 한 포지션(특히 수비형 미드필더)에만 집중했다면 그 위치에서 더 좋은 선수가 되지 않았겠느냐고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유상철 본인은 만족스런 선수 생활이었다고 자평한다.

“지금도 만족해요. 어떤 포지션에서 최고가 되기보다는 축구선수로서 최고가 되고 싶었거든요. 제가 축구선수로서 최고였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현역 시절에 많은 분들에게 인정을 받았던 것에 만족합니다. 제가 뛸 때 불안하지 않고 믿음직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뿌듯하죠. 특히 제가 중앙 미드필더, (홍)명보 형이 최종수비수, (황)선홍이 형이 공격수로 뛸 때의 조화가 정말 좋았다는 분들이 많은데, 저 역시도 그렇게 생각해요.”
98년 프랑스 월드컵 멕시코전에서의 유상철 ⓒKFA
98 프랑스 월드컵, 세계의 벽과 처음으로 조우

94년 말부터 대표팀의 중심 선수로 자리 잡은 유상철. 그가 처음으로 세계의 벽과 마주한 것이 바로 98 프랑스 월드컵이다. 이 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은 1무 2패의 성적으로 조 예선에서 탈락하고 만다. 더군다나 네덜란드와의 2차전에서 0-5로 대패한 이후 차범근 감독이 경질되는 사태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유상철은 3경기 모두 풀타임 출장했고, 특히 벨기에전에서는 0-1로 뒤지던 상황에서 동점골을 터트리며 팀을 구했다.

“처음으로 제대로 세계축구를 경험했죠. 그런데 솔직히 멕시코와 네덜란드전은 정말 아무 생각도 안 나요. 보통 선수들은 자기가 뛴 경기들, 특히 중요한 경기들은 전부 기억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 두 경기는 편집된 것처럼 기억에 없습니다. 그만큼 긴장을 많이 했고, 어떻게 뛰고 나왔는지도 모르겠어요. 시야도 바로 전방뿐이었고요.”

“벨기에전을 앞두고 차범근 감독님이 물러나셨는데, 그런 일이 처음이었잖아요. 그게 계기가 되어 벨기에전을 비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처음 2경기에서는 우리가 훈련하고 준비했던 것들이 전혀 나오지 않았거든요. 선수들이 모여서 이왕 떨어진 거 마지막 경기만이라도 제대로 해보자, 실력은 어쩔 수 없지만 우리가 준비했던 것들만큼은 다 보여주고 가자라고 의기투합했어요. 그 경기만 기억이 나네요.”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경기가 아니라 네덜란드전이 열렸던 마르세이유 벨로드롬 스타디움이었어요. 경기장에 들어선 순간, 전체를 감싸고 있는 오렌지 물결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죠. 붉은악마가 있었던 지역이 조그마한 점처럼 빨간 색으로 있었을 뿐 나머지는 전부 오렌지색이었어요. 월드컵이 열리는 프랑스가 아니라 네덜란드 원정을 간 느낌이었죠. 그런 분위기는 처음이어서 모두들 정말 많이 놀라고 주눅도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월드컵의 경험, 한 단계 성숙

비록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월드컵의 경험은 유상철을 한 단계 성장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월드컵을 마치고 돌아온 유상철은 소속팀에서 스트라이커와 공격형 미드필더를 오가는 공격적인 역할을 부여받았고, 물 오른 경기력을 선보이며 14골로 K-리그 득점왕에 등극했다.

“그런 세계적인 대회를 치른 뒤에 리그에서 뛰니까 전부 한 단계 아래로 보이더라고요.(웃음) 수비가 와서 붙어도 전혀 걱정하지 않고 침착하게 처리하게 됐어요. 사실 실력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감이 붙다보니까 적극적인 플레이가 가능해졌죠. 스스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느낌을 받았어요.”

“당시 고재욱 감독님이셨는데, 저에게는 특별한 임무를 주지 않으셨어요. 공격형 미드필더 위치에 세우시면서 자유롭게 공격 역할을 수행하라고만 하셨죠. 신나서 왼쪽, 오른쪽, 중앙 가리지 않고 미친 말처럼 뛰어다녔어요.(웃음) 그러면서 골을 넣기 시작하고, 그 리듬을 타면서 득점왕까지 하게 됐죠.”

“이런 면도 있었을 거예요. 제가 전문적인 공격수가 아니다보니 수비수들 입장에서도 제 버릇이나 습관, 공격수로서의 플레이 스타일 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거죠. 그런 것도 유리하게 작용했을 겁니다.”

“공격수로 뛰면서 골도 많이 넣고 하다보니까 욕심도 생기더군요. 미드필더나 수비수를 볼 때도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앞으로 나가게 되더라고요.(웃음) 물론 대표팀은 조금 달랐어요. 팀에서는 저에게 프리롤을 부여했지만, 대표팀은 제 임무가 명확했죠. 대표팀에서는 거기에 맞는 역할이 있었기 때문에 욕심 내지 않고 그 임무에만 충실했습니다.”
인터뷰 중인 유상철 ⓒ스포탈코리아
J리그에서의 활약

국내에서 모든 것을 이룬 유상철은 1999년 일본 J리그에 진출한다. 당초 유럽행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갖고 있던 그이지만 주변 여건이 여의치 않았고, 결국 J리그로 방향을 틀어 명문 요코하마 F마리노스 유니폼을 입게 됐다.

“프랑스 월드컵을 경험하면서 유럽에 가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그 때부터 추진하기 시작했는데, 그 때는 에이전트 문화가 활성화되지 않았어요. 만약 외국팀에서 요청이 있으면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구두로만 받았는데, 막상 일이 쉽게 진행이 안 되더군요. 이대로라면 절대 외국행은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일본으로 가게 됐죠.”

“일본도 만만한 곳이 아니에요. 처음에는 언어와 생활습관, 문화, 축구 스타일 등의 차이가 있어 적응하는데 6개월 정도 걸린 것 같아요. 중간에 부상도 있었는데, 제대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서 무리하다보니 더 힘들어지기도 했죠. 그래서 이를 악물었죠. 결국 선수는 경기장 안에서 보여주면 된다, 훈련이나 경기를 통해 내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했고, 다소 무리할 정도로 강하게 나섰습니다. 그러면서 동료들에게도 인정을 받을 수 있었죠.”

요코하마에서 성공적인 시즌을 보낸 유상철은 2001년에는 가시와 레이솔로 이적했다. 당시 가시와에는 이미 홍명보와 황선홍이 소속되어 있었다. ‘브라질 커넥션’이 대세인 가운데 가시와는 ‘코리아 커넥션’으로 외국인 선수를 구성하는 모험을 선택했다. 그만큼 한국 선수들의 이미지가 좋았기에 가능한 일.

“요코하마와 계약이 끝날 무렵에 J리그 시상식이 있었어요. 거기서 명보 형과 가시와 감독님을 만나게 됐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계약이 끝난다고 하니까 명보 형이 ‘가시와에 올래?’라고 하시는 거예요. 저도 ‘가면 좋죠’라고 이야기했고, 여기서부터 일이 추진된 거였어요.”

“일본에서도 한국인 3인방이 큰 이슈가 되었는데, 우리는 그만큼 부담이 컸죠. 관심이 집중된 상황에서 성적을 내지 못하면 ‘용병’인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그런데 막상 리그가 시작되고 경고누적이나 부상, 대표팀 차출 등으로 인해 3명이 같이 뛴 경기는 별로 없었어요. 물론 그 이전 가시와 성적에 비하면 많이 끌어올려서 상위권까지 도약했지만, 우승은 힘들었죠.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에요.”

J리그 시절, 유상철은 그야말로 ‘강인한 전사’의 이미지가 강했다. 물론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일본에서 뛰면서 유상철은 더욱 강한 모습을 보여줘야만 했다. 피치에서 양 팀 선수들이 시비가 붙었을 때 유상철이 강하게 나서는 모습, 상대 선수들에게 혼자 둘러쌓인 상황에서도 오히려 기싸움에서 눌러버리는 동영상은 한국에도 소개되어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 경우가 워낙 많아서 어떤 경기였는지 기억이 안 나네요.(웃음) 축구라는 것이 네트를 쳐놓고 하는 경기가 아니다보니 몸싸움도 많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상대가 고의적으로 저를 가해하면 참지 못했죠. 그래서 많이 부딪쳤던 것 같아요. 일본에 가니까 저는 ‘용병’ 입장이었고, 더 그런걸 많이 느꼈어요. 경기 중에 맨투맨으로 붙어서 고의적으로 지저분하게 하는 선수도 있었고요. 그래서 시비가 많이 붙었죠.”

“이런 면도 있었어요. 시비가 붙으면 팀 동료들도 보고 있잖아요. 걔네들에게 보여주는 부분도 컸죠. 그 상황에서 제가 꼬리를 내리면 팀 동료들도 저를 우습게 보거든요. 그래서 더 강하게 나갔던 것 같습니다.”
2002년 월드컵 폴란드전에서 골을 넣고 환호하는 유상철 ⓒKFA
최고의 순간, 2002 한일 월드컵

90년대 중반부터 한국축구의 중심으로 활약하던 유상철이지만, 역시 가장 최고의 순간을 꼽으라면 2002 한일 월드컵이라 할 수 있다. 유상철은 첫 경기 폴란드전을 시작으로 마지막 경기였던 터키와의 3-4위전까지 전 게임을 출장했다. 폴란드전에서는 팀의 두 번째 골을 터트려 승부에 쐐기를 박는 감격도 맛봤다.

“사실 그 전에도 외국인 감독님들을 몇 번 경험했는데요. 성적이 좋았던 경우가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히딩크 감독님이 오실 때에도 그 중 일부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한창 0-5로 패하고 그럴 때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가보다라는 생각도 했고요.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선수들을 대할 때나 언론을 대할 때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자신만만해 하시더군요. 그 때부터 조금씩 믿음이 가기 시작했어요.”

“무엇보다 선수 개개인에 대한 심리 파악을 다하고 계시더군요. 큰 대회에 대한 풍부한 경험에서 오는 노하우도 대단했고요. 스페인에서 전지훈련을 하고 와서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등과 평가전을 치르면서부터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어요. 해볼 만 하다는 느낌을 갖게 됐죠.”

특히 유상철은 첫 경기였던 폴란드전을 잊지 못한다. 한국이 월드컵에서 거둔 첫 승이었고, 본인이 골을 넣었던 경기였기 때문. 그리고 폴란드전 직전, 경기장에 들어선 순간에 경험했던 짜릿한 순간도 그에게는 소중하다.

“첫 경기였던 폴란드전을 바로 앞두고 잔디상태를 점검하러 경기장에 들어섰을 때가 기억납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서는 순간, 이미 경기장 대부분이 가득 차 있었고, 모두 붉은색 물결이었어요. 박수 소리와 ‘대한민국’이라는 구호가 들리는데 온 몸에 소름이 돋았죠. 그걸 보면서 프랑스 월드컵 때의 오렌지 물결이 떠올랐어요. 그리고 폴란드 선수들이 그 때 우리와 같은 상태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폴란드전을 앞두고 느꼈던 이런 감동이 결국 경기에까지 이어졌어요. 월드컵 첫 승에, 저는 골까지 넣었죠. 프랑스 월드컵 벨기에전에 이어 월드컵 2대회 연속골이라는 점에서 개인적인 의미도 컸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였죠. 개인적으로 제 인생의 경기를 꼽는다면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한일전과 98년 프랑스 월드컵 벨기에전, 그리고 폴란드전을 꼽고 싶어요.”

“그리고 이탈리아와의 16강전도 기억에 남습니다. 이탈리아는 조직적인 움직임이 좋고, 선수들의 개인 기술과 체격조건, 스피드를 모두 갖췄어요. 그래도 당시 우리는 포르투갈을 꺾은 상황이라 자신감이 올라 있었죠. 더군다나 홈팬들의 열정적인 응원을 등에 업고 있었고요.”

유럽 진출 재시도 실패하며 일본과 한국에서 현역 마무리

꿈만 같았던 2002 한일 월드컵이 끝나고, 유상철은 ‘유럽진출에 성공할 만한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혔다. 유럽 현지에서의 반응도 좋았고, 실제로 여러 팀에서 영입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유상철의 유럽행은 무산되었다. 유럽 진출을 위해 가시와의 계약도 종료했던 그이기에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예전부터 유럽 진출은 꿈이었고, 그 때가 적기였기에 적극적으로 추진했었습니다. 스스로도 한일 월드컵을 마치고 유럽 누구와 맞서도 해볼 만 하다는 자신감이 넘쳐 있었어요. 영입 제의도 많이 왔고요. 그런데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중간에 에이전트와 관련된 여러 문제들이 겹치면서 유럽 진출을 이루지 못했어요. 이렇게 되니까 아무데도 갈 곳이 없더라고요. 다행히 친정팀인 울산에서 배려를 해주셔서 다시 경기에 나설 수 있었어요.”

그러나 2003시즌, 유상철은 다시 일본행을 결심했다. K-리그 경기 중에 상대의 강력한 백태클로 인해 큰 부상을 입었던 것이 그를 실망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요코하마의 적극적인 구애도 한 몫 했다.

“선수 개개인이 상대를 보호해줘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축구하지 말라는 식의 태클이 빈번하게 나왔죠. 그런 점들이 실망스럽더군요. 여기에 요코하마의 스카우트 부장이 계속 한국에 와서 저를 설득했죠. 당시 요코하마는 우승의 기회를 잡고 있었고, 울산 역시 선두권을 달리고 있었기에 고민스러웠어요. 그런데 워낙 적극적으로 구애를 해서 결국 요코하마행을 택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일본으로 재진출한 유상철은 요코하마에서 2003년과 2004년 J리그 2연패를 달성하며, 다시 한번 가치를 입증했다. 그리고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2005년에 친정팀 울산으로 복귀했고, 그 해 팀에게 리그 우승을 안겼다.

이후 유상철은 2006 독일 월드컵을 마지막 목표로 정하고 집중했다. 그러나 2006시즌, 무릎 부상이 그를 덮쳤다. 오랜 기간 무리하게 경기 출전을 했던 것이 누적되어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좌절하게 만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은퇴 시기를 독일 월드컵 이후인 2007년 정도로 잡았었습니다. 그런데 2002년부터 2005년까지 매년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었어요. 선수가 1년에 뛸 수 있는 경기수를 넘겨버렸다고 해야 할까요. 결국 무릎이 고장 나고 연골에 물이 찼죠. 70%의 몸 상태로 월드컵에 나간다면 어떨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고, 그렇게 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뭘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보다 몸 상태가 훨씬 좋은 후배들이 나가서 경험도 쌓고 전력을 다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은퇴를 결심했습니다.”
지도자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유상철 ⓒ스포탈코리아
유소년 지도자로서의 삶 시작

2006년 현역에서 은퇴한 유상철은 유소년 축구계로 뛰어들었다. FC 슛돌이의 감독으로 유소년축구의 활성화를 거들었고, 유상철 축구교실과 중국 광저우 유소년클럽 창단 등의 활동을 계속 펼쳤다.

“유소년 축구 육성은 선수 시절부터 해보고 싶었던 겁니다. J리그에 처음 진출했을 때 6~7세 어린이들이 유소년클럽에서 볼 차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너무 기가 막히게 차더군요. 훈련 프로그램도 아주 체계적이었어요. 얘네들이 성인이 되면 좋은 선수들이 많이 나오겠다는 느낌을 받았죠. 그러면서 우리도 변하지 않으면 힘들겠다고 생각했고, 은퇴한 뒤에는 유소년 아이들을 먼저 지도하고 싶었어요.”

“FC 슛돌이 시절에 함께 했던 이강인 같은 아이를 보세요. 재능이 넘쳐나잖아요. 그 나이 또래에서 나올 수 없는 실력이에요. 문제는 이런 선수들이 체계적으로 잘 관리되어 성인이 됐을 무렵에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해 있어야 한다는 점이에요. 현실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아이라도 성인이 되면 평범해지고 말잖아요. 주위에서도 이런 부분을 잘 생각하고 선수들을 키워나가야만 합니다.”

유소년들을 지도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유상철은 2009년 8월부터는 본격적인 승부의 세계로 뛰어든다. 새로 창단한 춘천기계공고의 초대 사령탑으로 부임해 고교축구계에 도전장을 낸다. 그러나 그는 초조해하지 않았다. 성적보다는 최대한 선수들이 성장하는데 중점을 두고 지도하겠다는 각오이다. 지도자로서의 2막이 시작되는 셈이다.

“팀이 구성되고 자리잡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겁니다. 일단 저는 성적도 성적이지만, 아이들이 훌륭한 선수로 성장하는데 도움을 주고 싶어요. 물론 현실과 만나면 저도 변할 수 있겠죠. 그러나 가능하면 제 철학대로, 당장의 성적보다는 대학이나 프로에 가서 좋은 선수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인터뷰=이상헌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09년 8월호 '나의 선수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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