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만성형 수비수의 표본 최진철 ⓒ스포탈코리아
2000년대 한국축구의 수비를 책임졌던 최진철(38, 강원 코치)은 ‘우직하고 성실한 거목 같은 수비수’였다. 꾸준함은 그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단어였으며, 2001년 30세의 나이에 본격적으로 대표팀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대기만성형’의 표본이기도 했다. 최진철은 뒤늦은 대표 경력에도 불구하고 월드컵에 2번(2002년, 2006년)이나 참가하면서 A매치 65경기 출전에 4골을 기록했다. 또한 K-리그에서는 1996년부터 2007년까지 오직 전북 한 팀에서만 12년간 뛰며, 총 312게임에 출장해 28골-11도움을 기록하며 ‘전설’로서 평가받기도 하다.

축구만으로 즐거웠던 학창 시절

전라도 진도 출신인 최진철은 다섯 살 때 제주도로 내려갔다. 제주서초 4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한 그는 제주중앙중과 오현고를 거치며 줄곧 제주에서 축구 선수 생활을 했다. 축구를 시작한 계기도 특별한 것은 없었다. 단지 뛰어놀기 좋아하고, 축구를 비롯한 운동을 좋아했기에 자연스럽게 시작했다.

"워낙 놀기 좋아했어요. 동네에서도 축구를 좋아했고, 무엇보다 뛰어놀고 싶어서 자연스럽게 축구를 시작했죠. 가족들도 모두 운동을 좋아해서 별다른 반대도 없었어요. 그 때는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축구를 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죠."

어렸을 때부터 남들보다 컸던 그는 오현고 시절까지 줄곧 공격수로 활약했다. 나름대로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지금과는 달리 그 때만 해도 제주축구에 대한 관심이 적었던 터라 청소년대표팀 등에는 뽑히지 못한 채 학창 시절을 보내야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남들보다 키가 커서 선생님들이 공격수를 하라고 그러셨어요. 뭐 저도 재미있으니까 계속 했죠. 다만 그 당시에는 청소년대표팀으로는 한 차례도 선발되지 않았어요. 저 역시 다른 선수들처럼 어렸을 때부터 대표팀에 대한 꿈을 갖고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제주의 특성상 대표에 선발되기가 쉽지 않았죠."

"사실 오현고로 진학할 때는 대학을 염두에 두고 간 것이었어요. 그래도 당시 오현고는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1~2명씩은 꼭 진학시키곤 했거든요. 당시 제주에서 축구를 하던 선배들은 대부분 고교를 끝으로 축구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었죠. 저는 축구로 대학을 가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였기 때문에 중학교 때 동기들 중에 저 혼자만 오현고로 가게 됐습니다."

파란만장했던 숭실대 시절

결국 최진철은 목표로 했던 대학 진학에 성공했다. 숭실대가 그의 가능성을 좋게 평가했고, 최진철은 처음으로 서울로 올라와 생활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주 토박이'의 서울 생활은 쉽지 않았다.

"고교 때까지만 해도 집에서 통학을 했거든요. 그런데 고3 시절 10월부터 서울로 올라가 숭실대에서 생활하는데, 합숙 생활을 했어요. 그리고 새벽부터 집합해서 훈련을 하는데, 제일 처음 느낀 것이 '정말 춥다'라는 것이었죠.(웃음) 바람이 뼈 속까지 스며드는 느낌이었고, 훈련 강도도 고교 시절과는 차원이 달랐어요. '내가 이런 생활을 계속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죠."

"스스로는 이겨내야만 한다고 계속 마음을 다잡았지만, 생활 면이나 훈련 면에서 적응이 쉽지는 않았어요. 그 때문에 초반에는 부상도 많이 당했고요."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최진철은 이 시기에 축구 인생을 통틀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숙소를 이탈해 탈출(?)을 감행하기도 했다. 물론 그 시도는 하루 만에 종결됐다.

"입학 전에 동계훈련에 참가했는데, 그 때가 포지션을 수비수로 바꿨을 타이밍이었거든요. 익숙하지 않으니까 실수도 많았는데, 훈련 도중에 위치 선정을 제대로 하지 못해 많이 혼났어요. 많은 선수들 앞에서 혼나니까 어린 마음에 굉장히 서운하고 부끄럽고 그랬죠. 나 혼자라는 서글픔에 짐을 싸서 나와버렸어요. 당시 서울에 누나가 살고 있어서 거기로 갔는데, 하루 만에 잡혀서 돌아왔죠.(웃음)"

"도망가다가 잡혀서 숙소로 돌아오는 것은 처음이었잖아요. 숙소로 가는 길이 정말 암담하고 떨리더군요.(웃음) 축구를 하는 한 다시는 도망가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됐죠. 당시 박수일 감독님이셨는데, 방으로 갔더니 축구 중계를 보고 계셨어요. 죄송하다고, 다시는 이런 짓 하지 않겠다고 용서를 빌었는데, 별 말씀 없이 알았으니 가서 훈련하라고 그러시더군요. 선배들도 비슷한 경험들이 있는지 그냥 넘어갔고요. 죽을 줄 알고 떨고 있다가 안심했죠.(웃음)"

수비수 전환, 숭실대의 주축으로 자리 잡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 생활을 시작한 최진철은 공격수에서 센터백으로 보직을 변경했고, 성공적으로 적응했다. 공격수를 보던 선수에게 수비수로 내려가라고 하면 싫어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최진철은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다. 수비수로서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해야 할까.

"입학하기 전 1월에 훈련을 하다가 감독님이 수비수를 해보는 것은 어떠냐고 물으셨어요. 저는 별로 거리낌이 없었기 때문에 해보겠다고 했죠. 그렇게 수비수로서 시작했는데,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더라고요. 나중에 공격수를 해보라고 해도 내키지 않고, 수비수가 좋아졌죠.(웃음) 물론 수비수는 자신의 실수가 실점으로 이어진다는 점 때문에 압박감은 크지만, 굳이 공격수를 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더군요. 수비하다가 가끔씩 공격에 올라가는 것이 오히려 더 재미있었어요.(웃음)"

중앙수비수로 자리를 굳힌 최진철은 대학 3학년 때는 추계대학연맹전에서 숭실대를 우승으로 견인했다. 숭실대로서는 10년 만에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하는 기쁨을 맛봤다.
전북 시절의 최진철 ⓒ스포탈코리아
1996년, 드래프트 1순위로 전북 입단..전북맨으로서의 시작

숭실대를 졸업한 최진철은 K-리그행과 상무행을 놓고 고민을 했다. 그리고 당시 숭실대 원흥재 감독의 권유로 상무로 진로를 결정했다. 상무에서 병역을 마친 그는 1996년 드래프트를 신청했고, 전북에 1순위로 지명되었다. '전북맨'으로서 보낸 12년간의 시작점이었다.

"사실 대학 졸업하고 K-리그로 먼저 가려고 했었는데, 원흥재 감독님은 안정적인 면을 고려해서 실업이나 은행팀으로 가라고 하셨어요. 고민하고 있는데, 원 감독님이 일단 상무로 가서 군 문제를 먼저 해결하라고 하셨죠. 지금 생각하면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상무에서 제대한 뒤 96년에 드래프트 신청을 했고, 마침 숭실대 시절 저를 지도하신 적이 있는 최만희 감독님이 인정해서 1순위로 뽑으셨어요."

이후 최진철은 2007년까지 줄곧 전북의 녹색 유니폼을 입고 피치를 누볐다. 그는 현역 마지막 해였던 2007년을 제외하고는 매 시즌 20경기 이상씩을 꼬박꼬박 소화했고, '전북의 방패'라는 닉네임과 함께 전북을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특별한 비결은 없어요. 굳이 꼽는다면 일찍 결혼을 해서 안정을 찾았다는 점 정도일까요? 프로 입단했던 96년에 결혼을 했는데, 아내가 많이 내조를 해줬어요. 이런저런 일들에 신경 많이 써주고, 몸보신에도 신경 쓰고 그러니까 저로서는 마음 편히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었죠. 그런 점들이 30대 중반까지 축구를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던 것 같아요."

여기서 한 가지. 최진철의 전북 시절 기록을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매 시즌 2골 이하의 골만 기록했던 최진철이 유독 1998년과 99년 시즌에는 10골에 가까운 득점을 뽑아낸 것. 최진철은 98시즌에 8골-2도움, 99시즌에는 무려 9골-6도움의 공격 포인트를 올렸다. 이 무렵 최진철은 팀 사정상 스트라이커로 보직을 변경했던 것이 공격 포인트 증가의 이유였다.

"98년에 (김)도훈이 형이 일본으로 진출하면서 공격수를 볼 사람이 없었어요. 당시 최만희 감독님이셨는데, 대학 시절 저를 지도하셨거든요. 고교 때까지 공격수였고, 대학 시절에도 가끔 경기가 안 풀리면 제가 공격으로 올라가곤 했었죠. 그래서 감독님이 공격수로 올라가라고 하셨습니다.(웃음)"

"그런데 확실히 안 쓰던 근육을 쓰니까 무리가 오긴 하더군요. 공격수와 수비수는 움직임이나 턴 동작 자체부터 다른 부분이 있거든요. 그것 때문에 피로골절도 왔었어요. 98년 후반기부터 99년까지 공격수로 뛰었는데, 나름대로 괜찮은 기록을 올렸죠. 주위에서는 공격수로 완전히 변경하라고도 하셨지만, 저는 공격수를 보겠다는 욕심이 전혀 없었어요. 낯설고 편하지 않았죠. 팀 사정상 임시방편으로 뛰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대표팀에서의 최진철 ⓒKFA
대표팀, 세 번의 기회 끝에 잡다

뒤늦게 대표팀에서 활약하면서 '대기만성형 선수'의 표본으로 평가받았던 최진철이지만, 사실 그 전에도 두 차례의 기회가 있었다. 숭실대를 졸업하고 상무에 입대할 무렵인 1993년 겨울, 94 미국 월드컵을 준비 중인 김호 사단에 합류한 것이 처음으로 찾아온 기회였다. 그리고 97년 무렵, 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멤버에 포함되었던 것이 두 번째 기회.

"93년에 처음 대표팀에 합류했는데, 전부 TV에서만 보던 하늘같은 선배들이잖아요. 제가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말 한 마디도 못 걸었죠.(웃음) 결국 최종명단에는 포함되지 못했어요. 진짜 아쉬웠던 것은 97년에 찾아온 두 번째 기회였죠. A매치 데뷔전도 이 무렵에 했는데, 97년 8월에 브라질전이었어요. 경기 막판에 3분 정도 뛰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넋 놓고 뛰었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어쨌든 경기도 그렇고, 훈련도 그렇고 제가 가진 것을 다 보여주지 못하고 나왔어요. 굉장히 아쉬웠죠. 그래도 그런 경험이 저에게는 큰 재산이 되긴 했어요."

2번의 기회를 놓친 최진철에게 3번째 기회가 찾아온 것은 만 30세를 지난 2001년 9월이었다. 2002 한일 월드컵을 위해 부임한 거스 히딩크 감독은 다양한 선수들을 시험하고 있었고, 그의 레이더망에 최진철도 들어온 것이었다.

"K-리그 수원전을 마치고 전주로 내려가는 길에 나이지리아전에 참가하라고 전화가 왔어요. 그래서 저는 유성에서 도중에 내렸죠.(웃음) 사실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는 대표팀에 대해서 부정적이었어요. 이번에도 대표팀에 들어가서 좋지 않은 기억만 갖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죠.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이다. 한번 해보자는 마음도 생기더군요. 스스로에게 창피하지 않게 열심히 해보자는 마음으로 대표팀에 합류했습니다."

그리고 나이지리아와의 2차전이 열렸던 9월 16일. 최진철은 선발 멤버로 경기에 투입되었다. 이후 세네갈, 크로아티아, 미국과의 평가전에서 모두 출장했고, 미국에서 열린 골드컵에도 참가하며 대표팀의 붙박이 멤버로 자리매김했다. 그야말로 '최진철의 재발견'이었다.

"대표팀에 합류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저를 선발로 투입하셨어요. 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선발로 내보낸 것인데, 사실 아무리 평가전이라 해도 쉽지 않은 일이죠. 저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보여주겠다는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첫 경기에서 아주 만족스럽지는 못했는데, 감독님이 계속 경기에 투입시켜주셨어요. 몇 경기 하다보니까 자신감이 생겼고, (홍)명보 형이나 (김)태영이 형이 옆에서 많이 도와주면서 빠르게 적응했죠."
2002월드컵 스페인전에서 승리한 뒤 동료들과 환호하는 최진철 ⓒKFA
최고의 순간이었던 2002년 월드컵

어느덧 대표팀의 주전 3백 요원으로 자리 잡은 최진철은 누구나 꿈꾸는 월드컵 무대를 밟게 됐다. 그리고 월드컵에서의 첫 경기였던 폴란드전을 위해 부산 아시아드 주경기장을 들어섰던 그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털어놨다.

"경기 몇 시간 전에 워밍업을 하러 나왔는데, 벌써 오신 분들이 여기저기 계시더라고요. 전부 빨간색 옷을 입고 오셨길래 오늘은 빨간색이 많겠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본 게임을 위해 다시 경기장에 들어섰을 때는 온통 빨간 물결이었어요. 정말 놀랐었죠. 그런 와중에 애국가가 흘러나오는데,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라는 생각에 도망가고 싶을 정도였어요.(웃음)"

"그런 긴장감은 전반 초반까지도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좋아지더군요. 경험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느꼈던 순간이었습니다."

"예선 마지막 경기였던 포르투갈전도 생각이 많이 나요. 타 팀 경기 결과를 모르고 경기를 뛰었던 상황에서 포르투갈 선수들이 몇몇 우리 선수들에게 비기면 둘 다 같이 올라간다고 이야기했던 모양이에요. 그러나 그런 거 생각할 여유들이 없었죠. 저도 제 마크 상대 찾고, 수비조직 가다듬는데 신경을 집중했었으니까요."

무엇보다 2002 월드컵에서의 최진철이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었던 것은 16강 이탈리아전에서였다. 당시 호나우두와 함께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평가받던 크리스티안 비에리를 막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모습은 단연 인상적이었다.

"완전 황소였어요. 힘이 정말 좋더군요. 전반 18분 만에 비에리에게 선제골을 허용했는데, 제가 마크맨이었잖아요. 동료들에게 너무 미안했어요. 그래도 팀 전체가 그런 믿음이 있었어요. 동료들이 하나 해주겠지라는...그러니까 나는 더 이상 실점만 내주지 말자는 마음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모든 공격수들이 힘들지만, 비에리도 그렇고, 2002년 말에 상대했던 브라질의 호나우두도 그렇고 대단한 선수들이에요. 특히 호나우두는 특별했죠. 대부분의 공격수들은 어디에 있든 위치를 확인하거든요. 그런데 호나우두는 어느 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공간으로 파고들었어요."

결국 이탈리아전이 끝나고 최진철은 탈진, 링거 주사를 맞아야 했다. 그만큼 경기는 격렬했고, 체력 소모가 극심했다. '황소' 비에리를 막아야했던 최진철은 피로도가 더 심했다.

"밥 먹으러 가는데 식은 땀이 나고 속이 더부룩하더라고요. 사실 방에서 링거 맞으면 됐는데, 단장님이 병원에 꼭 가라고 하셔서...(웃음) 결국 병원에 갔는데, 태영이 형도 코뼈 부러져서 왔더라고요.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가 나서 봤더니 같이 누워있더군요.(웃음)"

8강전에서 스페인마저 꺾으며 파란을 일으킨 대표팀은 4강전에서 독일에게 석패, 신화를 마감했다. 계속 이어지는 강호들과의 경기로 녹초가 되었던 최진철은 독일전에서 발목 부상을 당하며 교체, 2002 월드컵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전반에 경합하는데, 볼을 걷어내려는 순간에 상대가 몸으로 눌러버리면서 발목이 돌아갔어요. 경기 중이라 아픈 것을 몰랐는데, 후반 조금 지나서 감독님이 안 좋아보이셨는지 교체 지시를 내리시더군요. 결국 3-4위전에도 나갈 수 없었죠."

"많은 분들이 명보 형, 태영이 형과 함께 한 당시의 3백을 역대 최고라고 이야기해주세요. 개인적으로는 정말 편하게 했던 것 같아요. 명보 형이 전체적인 부분을 컨트롤해주고, 태영이 형도 적극적으로 수비를 펼치셨죠. 저는 두 형들을 믿고 편하게 따라갔을 뿐이에요. 저로서도 잊지 못할 수비진이었습니다."

4강 신화의 비결 - 죽을 것만 같았던 히딩크 감독의 체력 프로그램

그렇다면 최진철이 꼽는 2002 월드컵 4강 신화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팀 전체의 단결력과 완벽한 전술 이해도를 바탕으로 한 톱니바퀴 같은 조직, 홈그라운드의 이점 등을 꼽을 수 있겠지만, 최진철은 그 중 하나로 체력 프로그램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월드컵을 앞두고 지속적으로 실시했던, 일명 '파워 트레이닝'은 선수들의 체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고, 이것이 대표팀의 쉴 새 없는 압박과 움직임의 비결이었다.

"모든 훈련이 새로웠고, 많이 힘들었어요. 솔직히 체력 프로그램을 하면서 운동장에서 죽을 수도 있겠다, 이러다가 심장 터져서 죽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었거든요.(웃음)"

"예를 들어 이런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3조로 나눠서 한 조는 7:7 미니게임을, 다른 조들은 피지컬 훈련을 하죠. 시간이 지나면 서로 바꿔가면서 훈련을 해요. 7:7 미니게임도 설렁설렁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뛰고, 강하게 압박하면서 몸싸움을 해야 했죠. 그리고 끝나면 옆에서 피지컬 훈련을 하고요. 쉬는 시간은 다음 훈련으로 넘어갈 때 몇 초 정도였는데, 정말 죽을 것 같더군요.(웃음)"

"사실 우리는 16강 진출이 목표였기 때문에 신체 사이클이나 여러 가지 포커스를 예선 3경기에 맞춰놨었어요. 따라서 16강 이후부터는 정상적인 컨디션은 아닌 상태로 치른 것이죠. 그럼에도 그렇게 경기장을 뛰어다닐 수 있었던 것은 월드컵 전에 훈련이 잘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005년 대표팀에 합류했을 당시의 최진철(윗줄 오른쪽에서 2번째) ⓒ한태일
마지막 도전, 2006 독일 월드컵

어느덧 30대 중반으로 향해가는 나이. 최진철은 대표팀에서의 생활이 부담스러워졌다. 특히 주위에서 최진철을 바라보는 시각은 대표팀에 대한 의욕을 떨어트렸다. '기동력이 떨어졌다. 이제 노쇠한 것 같다' 등의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들려왔고, 그것 자체가 최진철에게는 큰 스트레스였던 것이다.

"대표팀 은퇴를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됐던 시기는 2004년 아시안컵이었어요. 당시에 저에 대한 좋지 않은 평가들이 많았죠. 그래서 코칭스태프에게 대표팀 은퇴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당시 한국에 돌아가서 다시 이야기하자고 그러셨죠. 그런데 기자들이 다 알고 있더라고요. 은퇴하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했죠."

"그 해 겨울에 독일전이 열렸는데, 그 때 본프레레 감독님에게 직접 은퇴해야할 때가 된 것 같다고 말씀드렸어요. 꼭 그래야겠냐고 하시면서 잠시 쉬는 걸로 하자고 그러시더군요. 그런데 제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거든요. 대표팀 은퇴를 하지 않으면서 뽑히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할 때 밀렸다는 이야기잖아요.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부분이었어요. 결국은 대표팀 은퇴로 결론이 났죠."

그러나 2005년 10월, 대표팀 사령탑이 본프레레에서 아드보카트 감독으로 바뀌고, 2002 월드컵에서 함께 했던 베어벡 코치와 홍명보가 코칭스태프로 부임하면서 다시 한번 최진철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결국 최진철은 2006 독일 월드컵을 향해 도전해볼 결심을 했다.

"어느 날 명보 형에게서 같이 해보자고 연락이 왔어요. 저는 은퇴를 선언한 상황인데 다시 들어가는 것도 그렇고, 어린 선수들과 경쟁하는 것도 우스운 상황이라고 이야기했죠. 그런데 명보 형이 마지막으로 한번 해보자, 체력 안배는 알아서 해줄테니 경쟁해보라고 권유하시더군요. 그래서 생각해보겠다고 했는데, 다음 날이 대표팀 명단 발표 날이었어요. 제 이름도 포함되었죠.(웃음)"

결국 어린 후배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최진철은 35세의 나이에 독일 월드컵 무대를 밟았다. 2002 한일 월드컵을 경험했던 멤버로서 다음 대회인 2006 독일 월드컵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둬야 한다는 부담감은 매우 컸다. 그러나 대표팀의 여건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큰 성취를 얻은 후에 오는 과도기적 상황이 존재했던 것이다.

"확실히 2002년에 비해 선수들의 목적의식이 뚜렷하지는 않았어요. 준비기간 자체가 2002년과는 비교할 수 없었던 것도 있었지만, 정신적으로나 훈련 분위기나 100% 완전히 집중할 수 있지는 않았죠. 더군다나 개인적으로는 인터뷰하는 사람들마다 체력 문제를 거론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2002년에 4강을 했으니까 이번에는 적어도 16강은 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어요. 홈에서 이룬 4강이라고 폄하하는 시선도 있었기 때문에 유럽에서 당당히 우리 실력을 인정받고 싶었던 거죠. 토고전 이기고, 프랑스전에서 비기면서 가능하다는 자신감도 있었는데, 스위스전에서 잘 풀리지 않았어요."

특히 스위스전은 최진철에게 잊을 수 없는 경기였다. 센데로스와의 헤딩 경합에서 밀리며 선제골을 내줬고,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어 붕대를 감은 채 경기를 뛰어야 했다.

"센데로스 마크맨이 저였거든요. 당시에 잠시 방심했는데, 그것 때문에 반 템포를 빼앗겼어요. 좋은 포지션을 내준 상황에서 방해를 하기 위해 급하게 같이 떴는데, 센데로스가 내려오는 타이밍에 제 머리와 부딪혔죠. 결국 실점을 내줬고, 머리까지 찢어졌어요. 한번 해보자는 분위기에서 나 때문에 실점을 내줬다는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치료를 받으러 사이드로 나와 있을 때 제가 욕하는 것이 TV에 잡혔다고 하더군요. 빨리 경기장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그런 것이었죠.(웃음)"

그렇다면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대표팀의 전술적인 변화를 꾀한 것에 대해서 최진철은 어떻게 생각할까. 당시 아드보카트 감독은 가나와의 평가전 이후 전술적으로 많은 부분을 바꿨다. 미드필드에서의 패스 플레이보다는 조재진의 제공권을 활용한 공격으로 변화를 꾀한 것이었다. 이 변화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바뀐 부분이 있었죠. 우리 지역에서는 가능한 빨리 공격 쪽으로 길게 연결시키고, 상대편 진영에서 세컨드 볼을 잡는 형태를 많이 주문받았어요. 개인적으로는 풀어나가면서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벤치 입장에서는 불안했던 모양이에요. 그런 부분을 강하게 주문하니까 우리도 잡으면 바로 전방으로 올렸죠. 그러다보니 미드필더들의 체력 부담도 컸어요. 수비 진영에 내려왔다가 길게 차면 다시 밀고 올라가면서 세컨드 볼을 노리고, 다시 내려오고..."
전북에서만 12시즌을 보냈던 최진철 ⓒ스포탈코리아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 전북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다

독일 월드컵을 마친 최진철은 소속팀 전북을 위한 마지막 봉사에 힘을 쏟았다. 특히 2006시즌은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이라는 큰 선물을 전북에게 안겨줬던 해였다. 최진철의 투혼도 빛을 발했다.

"정말 어려웠고, 고생을 많이 했던 대회였죠. 올해 포항도 우승을 했는데, 정말 대단한 거예요. 다른 나라 원정을 떠나면서 국내 경기 일정도 소화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거든요. 우승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위해 모든 선수단이 하나가 되어 고생하면서 이뤄낸 것이었어요. 매번 역전승으로 라운드를 통과했는데, 특히 울산과의 4강전이 기억에 남네요. 1차전 홈에서 2-3으로 패했는데, 원정 2차전에서 4-1로 승리하고 결승에 올랐었죠. 제가 코너킥에서 골을 넣으면서 승리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 같아 뿌듯합니다."

“결승전 상대인 알 카라마는 시리아 팀이었는데, 원정 경기가 무시무시했어요. 팬들의 일방적인 응원이 대단했죠. 경기 전날에도 서포터들이 호텔에 와서 시끄럽게 소란을 피웠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어쨌든 그런 여건 속에서도 우승컵을 든 것은 우리였어요.(웃음)”

전북에서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최진철에게 있어 전북은 가족과 같은 존재였다. 그는 전북에서만 12시즌을 보냈고, 2007시즌을 끝으로 전북맨으로서 은퇴했다.

“전북에서만 12시즌을 보냈어요. 고향이나 마찬가지죠. 아내와 결혼한 곳도 거기였고, 작년까지 생활했던 곳입니다. 사실 프로 초창기에 형들이 자꾸 팀을 옮기는 모습이 많이 아쉬웠어요. 서로 정이 들었는데 다른 팀으로 옮기니까 마음이 조금 그랬죠. 그래서 저는 은퇴할 때까지 여기서 있겠다는 결심을 한 것입니다.”

“사실 지도자로서도 전북에서 시작을 하려고 했었죠. 그러나 아무래도 타이밍이 맞아야 하는 것이고, 전북과는 그 시기가 맞지 않았어요. 유럽에서 좀 더 공부를 할 생각이었는데, 마침 최순호 감독님이 함께 해보자고 제의하셨죠. 공부도 중요하지만 현장 경험이란 것을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강원에 합류했습니다.”

“아직은 지도자로서 초보입니다. 올 시즌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어요.(웃음) 제가 생각하는 것과 선수들이 생각하는 것과의 차이도 있는데, 그런 부분을 인내하면서 좁혀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이런 과정을 통해 지도자로서의 제 정체성을 정립해가는 시점인 것 같습니다.”


글=이상헌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09년 11월호 '나의 선수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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