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하고 꾸준하게 최고의 공격수 자리를 지켜왔던 김도훈 ⓒ이상헌
90년대와 2000년대초를 거치면서 한국축구는 여러 스트라이커들을 배출했다. 불세출의 스트라이커 황선홍을 비롯해 최용수, 안정환, 이동국 등이 '킬러'로서의 본능을 뽐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스트라이커로서 최고 자리를 다퉜던 이가 바로 김도훈(40, 현 성남 코치)이다.

통영중과 학성고, 연세대를 졸업한 김도훈은 1994년 9월 13일 우크라이나와의 A매치 데뷔전에서 아크로바틱한 오버헤드킥 골을 성공시키며 혜성처럼 등장했다. 이후 96 아시안컵과 98 프랑스 월드컵 등을 거치면서 최고의 공격수 중 하나로 자리 잡았고, 99년 브라질과의 A매치에서 결승골을 뽑아내며 세계최강을 1-0으로 꺾는데 일등 공신 역할을 했다. A매치 통산 72경기에서 30골.

또한 1995년 전북에 입단한 이래 2005년 성남에서 은퇴할 때까지 K-리그에서 총 257경기에 출장해 114골-41도움의 가공할 성적을 올리기도 했다. 한 때 K-리그 통산 최다골 기록(현재는 116골의 우성용)을 갖고 있었으며, 2000년과 2003년에 K-리그 득점왕에 등극하기도 했다. 2005년에는 K-리그 통산 일곱 번째로 '40-40클럽'에 가입하는 기쁨도 맛봤다.

대기만성형이었던 아마추어 시절

김도훈을 이야기할 때 '대기만성'이라는 표현이 항상 따라다닌다. 그는 통영중에 진학한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했고, 학성고 시절에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무명의 축구선수였다. 그러나 그의 타고난 신체조건과 축구 외에는 절대 한눈 팔지 않는 성실함과 노력이 더해져 빠르게 성장했다.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한 것은 중학교 때였어요. 부모님께서 공부하길 원하셔서 축구는 포기했는데, 통영중 코치님께서 오셔서 소년체전 예선만이라도 뛰어달라고 권유하셨죠. 그 때부터 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서 학성고까지 진학했죠. 처음부터 스트라이커였습니다."

"축구가 좋아서 시작했지만, 당시만 해도 부족한 점이 많았어요. 그래도 신체조건이 좋았고, 지금 당장보다는 차차 연마해가면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주위에서 많이 격려해주셨죠. 저 역시도 감독님이나 코치님이 가르쳐주시는 것을 빨리 습득하기 위해 노력했고, 실제로 빨리 적응했습니다. 축구에 있어 방향을 설정해주면 다른 생각하지 않고 그것만 보고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그런 점이 빨리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였어요."

스트라이커로서의 능력을 키우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자신이 롤 모델로 삼고 있는 스타 공격수들의 플레이를 연구하고, 그들의 플레이를 따라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들은 결국 결실을 맺었고, 고3 시절에는 처음으로 청소년대표팀에 선발되는 기쁨도 누렸다.

"공격수라면 축구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해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기술적인 면도 갖춰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 저는 제가 존경하던 선배 공격수들의 플레이를 배우려고 노력했죠. 차범근, 최순호, 김주성 선배님 등의 장점을 배우려고 애썼습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이 김주성 선배님이 왼발 드리블을 잘하시잖아요. 그것을 배우기 위해 제가 오른발잡이인데도 밤에 나와 왼발로 드리블하는 훈련을 하곤 했어요. 또 골 넣는 장면에 있어서도 상황별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며 집중했고요."

"결국 고3때 난생 처음으로 청소년대표팀에 선발됐죠. 그 때가 1988년이었는데, 당시 서정원, 김병수, 노정윤, 최문식, 신태용 등 대단한 선수들이 있었어요. 저에게는 정말 좋은 기회였고, 성장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시기였죠."
1994년 바스코 다 가마와의 경기에서 슛을 시도하는 김도훈 ⓒ베스트일레븐
연세대 졸업 후 프로가 아닌 상무행 택해

연세대를 졸업한 김도훈은 프로가 아닌 상무행을 택했다. 아직 프로에서 주전경쟁을 펼칠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냉철한 판단도 있었고, 또 한 가지는 당시 프로에 가게 되면 재정적으로 어려운 전북 버팔로(현 전북 현대)에 지명될 가능성이 높았던 탓도 있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상무에서의 2년은 그에게 정말 소중하고 중요한 시간이었다.

"당시의 제 실력으로는 좀 더 연마를 할 필요가 있었어요. 그리고 선배들도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금융권 실업팀으로 가곤 했던 시기였거든요. 또 제가 프로로 가게 되면 전북 버팔로로 갈 수 있는 상황이기도 했고요. 이런 복합적인 문제가 있었던 상황에서 부모님이나 주위 분들이나 상무행을 권유하셨습니다. 기량도 더 연마하고 군대 문제도 해결하자는 말씀이셨죠."

"지금 돌이켜보면 제 인생의 전환점이었습니다. 고3때 청소년대표팀에 뽑힌 것이 첫 번째 기회였다면, 상무는 두 번째였죠. 대학 시절까지 그냥 가능성 있는 선수였던 제가 상무에서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더 가다듬고 단련하면서 새로 거듭날 수 있었어요."

"당시 상무에는 서정원, 김현수, 박태하 선배 등이 있었는데, 프로무대를 이미 밟으셨던 분들이었죠. 그 분들과의 생활을 통해 아마추어이면서도 프로의 자세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프로 세계에 대해 전혀 몰랐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많이 배웠고, 그런 부분들이 나중에 프로무대에 뛰어들었을 때 많은 도움이 됐죠."

깊은 인상을 심어줬던 A매치 데뷔

상무에서 새로운 축구 인생을 시작한 김도훈은 93 버팔로 유니버시아드에 출전하게 됐고, 여기서 득점왕을 차지하며 축구계에 새롭게 이름을 떨치게 됐다. 그 여세를 몰아 국가대표팀에까지 선발되어 1994년 9월 13일 우크라이나전을 통해 A매치 데뷔까지 이뤘다. 그리고 A매치 데뷔전에서 환상적인 오버헤드킥으로 데뷔골까지 터뜨리는 기염을 토했다.

“상무에 있을 때 정종덕 감독님(현 건국대 명예감독)께서 저를 유니버시아드 대표로 뽑아주셨어요. 그 대회에서 우리가 준우승을 차지하고, 저는 득점왕에 올랐죠. 그러면서 제 이름도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94 미국 월드컵이 끝나고 비쇼베츠 감독님이 계실 때 선발됐어요. 국가대표팀은 처음으로 뽑힌 것이었죠. 꿈이 실현된 셈이니까 뭐라 말할 수 없이 기뻤어요.(웃음) 그리고 우크라이나전에서 투입되었는데, 저로서는 처음 들어간 것이니까 뭔가 보여줘야겠다는 마음 뿐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가는데, 정말 절실했어요. 이번에 골 넣지 못하면 대표 탈락이다라는 생각밖에 없었죠. 그리고 그 장면이 닥쳤고, 저도 모르게 오버헤드킥을 하고 있었어요.(웃음) 군인의 패기가 그런 슛을 할 수 있게 했던 것 같아요. 저도 깜짝 놀랐고, 팬들도 놀랐을 겁니다.”
K리그에 데뷔하던 무렵의 김도훈 ⓒ베스트일레븐
전북맨으로서의 데뷔

상무에서 대표팀 데뷔까지 이루며 주가를 올린 김도훈은 1995년에 전북에 입단하면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첫 해에 9골-5도움의 호성적으로 팀의 주축으로 자리 잡았다. ‘전북맨’으로서의 시작인 셈이다.

“그 당시 전남과 전북이 새로 창단했던 상황이었는데, 전북이 더 늦게 창단되어서 우선순위가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대표팀에서도 골을 넣고 그러니까 저를 1순위로 선발한 것이죠.(웃음) 지금은 고인이 되신 차경복 감독님께서 뽑아주셨어요.”

“동계훈련부터 정말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팀 선배들이 모두 전북 버팔로 시절부터 고생을 많이 하셨던 분들이거든요. 그래서 정말 헝그리 정신으로 뭉쳐 있었어요. 저 역시 그런 과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열심히 했고요.”

그러나 너무 겁 없이 달려들었던 탓일까. 리그 전반기에 상승세를 타던 김도훈은 비골에 금이 가는 부상을 입고, 한동안 고생해야 했다. 결국 아쉽게도 신인왕은 놓치면서 첫 시즌을 마감했다.

“의욕이 너무 앞서다보니 무리한 동작을 하게 되면서 부상을 입었어요. 전반기에 골 넣으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다가 후반기를 날려버린 것이죠.(웃음) 신인왕에 대한 욕심이 있었는데, 아쉽더군요. 부상을 당하면서 깨달은 것이 프로 선수는 운동장에 나와야 가치 있다는 것이었어요. 부상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더 세심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래도 꽤 만족스런 첫 시즌이었어요. 제가 프로에서도 통한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고요. 상무 시절에 많이 준비하긴 했지만, 그래도 프로에서 상대 수비수들과 맞부딪쳤을 때도 밀리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죠.”

김도훈은 다음 해에도 10골-3도움을 기록하며, 2년차 징크스와는 거리가 먼 활약을 펼쳤다. 더 강해진 상대 수비의 견제를 뚫으면서 어느덧 전북의 간판 스트라이커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

“당시만 해도 2년차 징크스라는 건 생각할 여유도 없었어요. 부상으로 침체기였던 순간도 있었기 때문에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이었거든요.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팀 선배들이 전부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고생했던 분들이라 저 자신도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죠. 팀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마음밖에는 없었고, 선배들도 제가 축구에 전념할 수 있게 분위기를 만들어 주셨어요.”

96 아시안컵, 황선홍과의 투톱 콤비

김도훈은 성공적이었던 A매치 데뷔전과 이후 K-리그에서의 꾸준한 활약으로 인해 대표팀에서도 붙박이 멤버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1996년 UAE에서 열린 아시안컵은 그가 처음으로 경험하는 비중 있는 국제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그는 황선홍과 함께 최전방 투톱으로 나섰고, 조별리그 3차전을 제외하곤 모두 선발 출장했다. 그러나 대표팀은 이란과의 8강전에서 2-6으로 참패하며 쓸쓸히 귀국해야 했다.

“기억하기로는 그 당시 K-리그를 모두 끝마친 뒤에 소집되었고, 중국에 가서 한중 정기전을 치르고 UAE로 넘어갔어요. 선수들이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많이 지쳐있는 상태에서 아시안컵을 치렀죠. 나름대로 모두들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어요.”

“개인적으로는 황선홍 선배와 투톱을 이룰 수 있었다는 점이 좋았어요. 저는 신예였고, 선홍 선배는 대표팀의 중심 공격수였죠. 최고의 스트라이커였기 때문에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고 운동장에 나가서 제 역할만 충실하면 됐어요. 선홍 선배가 볼 키핑이나 연결 플레이가 좋기 때문에 저는 전방으로 침투하는 역할을 많이 했죠.”

“예선 통과도 어려운 상황에서 극적으로 8강에 올라갔기 때문에 모두들 한 번 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제가 선제골을 넣으면서 분위기도 좋았고요. 그런데 후반 들어 중동 특유의 분위기에 말리고, 너무 공격적으로 나가는 상황에서 한번 흔들리니까 급격하게 무너지고 말았죠.”
98 프랑스 월드컵 멕시코전에서의 김도훈 ⓒAFC
파란만장했던 98 프랑스 월드컵으로의 과정

아시안컵에서의 악몽을 뒤로 한 채, 김도훈은 새로 부임한 차범근 감독 체제에서도 붙박이 대표팀 멤버로 활약했다. 그러나 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이 시작되면서 새롭게 최용수가 급부상했고, 이로 인해 김도훈은 출장 기회를 많이 잃었다. 최종예선 첫 경기였던 카자흐스탄전에서 선발 출장한 이후에는 교체멤버로만 활용되곤 했다.

“선수 입장에서는 아쉬움도 있죠. 그런데 제가 지도자 생활을 해보니까 그런 게 있더군요. 지도자 개개인마다 원하는 스타일이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당시 용수의 몸이 너무 좋기도 했고요. 골 감각이 대단했고, 또 한국은 매번 이기는 경기를 했었잖아요. 당연히 그 멤버로 나갈 수밖에 없죠."

"그래도 제 나름대로는 언제 기회가 오더라도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박태하 선배와 같은 방을 썼는데, 태하 선배가 준비 자세 등에 대해 많이 이야기해주고, 같이 새벽훈련도 하고 그랬어요. 많은 도움을 주셨죠. 결국 마지막 UAE전에 기회를 얻었고, 2골을 넣었죠. 그런 기회가 왔을 때 보여주지 못하면 퇴보하는 겁니다."

이렇듯 주전 경쟁에서 밀렸을 때도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했던 김도훈은 98 프랑스 월드컵 본선에서 기회를 잡았다. 멕시코와의 1차전에서 원톱 스트라이커로 선발 출장한 것. 차범근 감독은 황선홍의 부상으로 새롭게 전략을 짰고, 원톱 공격수로서의 스크린 플레이나 볼 키핑 능력 등에서 최용수보다는 김도훈이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멕시코전은 많이 아쉬워요. 원정 첫 승을 그 때 할 수 있었는데 말이죠. 당시 전술적으로 원톱 시스템이었고, 따라서 스트라이커에게 스크린 플레이와 볼 키핑 능력이 중시되었어요. 그래서 아마 저를 선택하신 것 같은데요. 사실 처음에는 멕시코 선수들과 부딪치면서 충분히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어요. 우리의 준비과정도 충실했고요."

"다만 객관적인 전력에서는 분명 우리가 뒤졌고, 수비를 강화하다보니 전방에서 제가 고립되는 상황이 많았죠. 그렇지만 제 나름대로 볼이 왔을 때 키핑해서 동료들에게 연결해주는 역할 등에 있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는 후회 없이 플레이했지만, 역시 결과에 있어 아쉬움은 남는 경기였죠."

멕시코전에서 1-3 역전패 이후 김도훈은 많은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여기에는 축구 내적인 요소에 대한 비난 뿐 아니라 종교적인 부분에 대한 이야기 등 어이없는 비난도 많았다. 김도훈으로서도 참기 어려운 비난들이었다.

"선수가 잘못하면 비난 받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 비난이 근거가 있어야 하는 거죠. 그런 비난은 제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측면도 있어요. 그런데 어이없는 것은 축구 외적인 부분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이었어요. 예를 들면 차범근 감독님이 종교 때문에 최용수가 아닌 저를 기용했다는 비난도 있었어요. 그런데 사실 저는 불교 신자이고, 차 감독님과 용수가 기독교 신자이거든요. 이렇게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쉽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너무 아쉬웠어요. 한국 축구팬들의 수준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나라는 절망감까지 들었죠."

김도훈은 멕시코전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네덜란드전에도 선발 출장했다. 이번에는 최용수와의 투톱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확실히 넘기 어려운 벽이었다. 네덜란드의 가공할 화력에 대표팀은 속수무책이었다.

"개인 기량 면에서 확실히 차이가 났어요. 그리고 선수들 개개인이 어떻게 압박하고, 어떻게 수비하고, 어떻게 경기를 운영할 지에 대해 확실히 이해를 하고 경기를 하더군요. 우리가 부족했던 부분이죠. 여기에 경기장 분위기는 온통 오렌지 물결이었고, 그런 외적인 부분들도 우리를 주눅 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당시 세계적 수비수였던 야프 스탐 등과 부딪쳐보면서 도전해볼만 하다는 자신감은 생겼어요."

빗셀 고베에서의 새로운 도전

98 프랑스 월드컵이 열렸던 1998년. 김도훈은 일본 J리그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J리그의 빗셀 고베가 그를 원했고, 전북과의 협상이 원활치 않아 결국 임대로 고베 유니폼을 입게 됐다. 일본에서 두 시즌을 보내면서 그는 고베를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로 자리매김했고, 그의 뒤를 이어 고베에 합류한 하석주, 최성용과 함께 '한국인 트리오'로서 맹활약을 펼쳤다.

"원래 95년 코리아컵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면서 스코틀랜드 쪽에서도 제의가 있었어요. 그런데 당시에는 전북이 놔주질 않았죠. 이후 97년에 J리그의 고베와 제프 이치하라에서 제의가 왔고, 결국 고베로 가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긴장도 했지만, 당시 J리그는 여러 선배들이 좋은 활약을 펼치면서 한국 선수에 대한 인식이 좋을 때여서 큰 어려움은 없었어요. 그리고 운 좋게도 첫 경기에서 2골을 넣으면서 확실히 눈도장을 받았죠.(웃음) 고베라는 팀은 한국 선수가 처음이었는데, 당시 고베 지진으로 교포 분들도 많이 힘들어하시던 때였는데, 저를 보러 축구장에도 많이 찾아주셔서 너무 고마웠던 기억도 납니다. 제가 그 분들에게 조그마한 힘이라도 되어드렸다는 것이 뿌듯하기도 했고요."

"첫 시즌에 하석주 선배가 왔고, 그 다음 해에 최성용이 왔어요. 셋이 함께 뛸 수 있어서 너무 좋았죠. 그리고 우리들로 인해 고베 선수들이나 팬들이 한국 선수를 다시 볼 수 있었다는 점도 뿌듯했어요. 팀을 위한 희생 정신 같은 것을 확실하게 알려줬다고 생각합니다."
99년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터뜨린 김도훈 ⓒKFA 홍석균
평생 잊지 못할 브라질전 결승골

고베에서 활약하며 대표팀을 오가던 1999년. 김도훈의 축구 인생에 있어 절대 잊지 못할 장면이 연출됐다. 1999년 3월 28일 잠실 주경기장에서 열린 브라질과의 A매치가 바로 그것. 브라질은 히바우두, 카푸, 주니뉴, 제 호베르투, 콘세이상 등 일급 멤버들이 대거 내한했고, 이 경기에서 김도훈은 후반 막판에 교체투입되어 승부를 결정짓는 결승골을 터뜨렸다.

"제 축구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골이 A매치 데뷔전이었던 우크라이나전에서의 오버헤드킥 골과 브라질전 결승골이에요. 허정무 감독님 시절이었는데, 후반 중반을 넘어서면서 몸을 풀기 시작했죠. 그리고 교체를 위해 대기하고 있는데, 공교롭게 볼이 계속 인 플레이 되면서 5~7분 정도를 사이드라인에서 기다려야 했어요. 몸이 정말 좋았기 때문에 빨리 들어갔으면 해서 초조해지더군요.(웃음) 결국 후반 39분에야 들어가서 (최)성용이의 패스를 받아 후반 45분에 결승골을 넣었죠. 정말 짜릿했던 순간이었어요."

K-리그로의 복귀..2002 월드컵 탈락의 좌절

고베에서 두 시즌을 보낸 김도훈은 2000년, K-리그로 복귀했다. 그 동안 성적이 좋지 않았던 전북이 임대기간이 끝난 김도훈을 불러들였던 것. 최만희 감독 체제로 새롭게 시작한 전북에게 김도훈의 힘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김도훈은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듯 복귀하자마자 15골을 터뜨리며 K-리그 득점왕에 등극했다.

"이전과 비교했을 때 바뀐 것이 있다면 골대 앞에서의 자신감이 많이 생겼다는 점이에요. 일본에서도 많은 골을 넣으면서 자신감이 붙었고, 또 골대 앞에서의 여러 상황에 대한 훈련도 매일 1시간 이상씩 하면서 감각을 키웠죠. 그런 점들이 득점왕에 오를 수 있게 만든 것 같아요."

김도훈은 K-리그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히딩크 감독 체제에서도 꾸준히 대표팀에 선발됐다. 홈에서 열리는 2002 월드컵에 대한 김도훈의 기대는 그 누구보다 컸고, 더군다나 98 월드컵에서의 실패를 맛봤기에 만회하고자는 하는 의욕도 강했다. 그러나 2002 한일 월드컵 최종명단에 김도훈의 이름은 없었다. 떨어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김도훈이 받은 충격도 컸다.

"당시에는 이해를 할 수 없었어요. 대표팀에서의 공격 포인트 등에서도 제가 나쁘지 않았거든요. 별다른 설명도 없이 탈락해서 참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왜 내가 탈락해야하는지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죠."

"아직도 이유는 몰라요.(웃음) 다만 지도자를 해보니까 감독이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사실 저는 선발로 출전해서 경기를 풀어나가는 스타일이지 조커 타입은 아니거든요. 그런 면에서 히딩크 감독님이 제외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성남에서 재도약한 김도훈 ⓒKFA 홍석균
성남으로의 이적..스트라이커로서의 새로운 전성기

2002 한일 월드컵 최종명단에서의 탈락에 이어 소속팀 전북에서도 불협화음이 생기면서 김도훈은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결국 2003년, 그는 은사 차경복 감독이 있는 성남으로 이적했다.

"저도 한 우물을 파는 성격이고, 전북에서 은퇴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내부적으로 여러 요인이 있었죠. 전북의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초창기부터 함께 해왔는데, 팀에서 저를 바라보는 시선은 한물 간 선수처럼 취급해서 서운했죠."

"결국 이적을 결심했고, 일본의 주빌로 이와타에서도 제의가 왔지만, 차경복 감독님이 계시는 성남으로 가게 됐습니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 다시 해보자는 오기가 생겼죠. 그러면서 다시 한번 부활할 수 있었어요. 아마 성남에서 전북으로 가게 되었던 이동국이나 김상식 선수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웃음)"

그렇게 성남에 둥지를 튼 김도훈은 이적 첫 해에 28골을 폭발시키며, K-리그 득점왕에 등극했다. 특히 브라질산 특급 공격수들이었던 도도, 마그노(이상 27골), 이따마르(23골)와 펼쳤던 득점왕 레이스는 정말 드라마틱했다.

"일단 팀 동료들이 좋았어요. 그 때문에 아무래도 제게 오는 수비수들이 분산될 수 있었죠. 동료들이 저에게 기회를 많이 줬고, 저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무리를 잘했습니다. 그리고 동계훈련부터 착실하게 준비하면서 몸을 만들었고, 뭔가 보여주겠다는 정신력도 강했고요."

"브라질 선수들과의 득점왕 경쟁은 정말 피 말렸죠.(웃음) 그래도 팀 동료들의 능력이 좋으니까 저에게 오는 기회만 놓치지 않는다면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또 브라질 선수들과의 대결이다보니 국내파로서의 책임감과 자존심도 컸고요."

"개인적으로는 이 때가 스트라이커로서는 가장 좋았던 시기라고 생각해요. 축구를 보는 전체적인 시야 등도 넓어지면서 더 좋은 축구를 할 수 있었죠."

이후 2005년, K-리그 통산 최다골 기록을 갱신한 김도훈은 그 해에 13골-7도움을 기록하며 여전한 기량을 뽐냈다. 그러나 부상으로 인해 시즌 막판 경기에 나서지 못했고, 결국 현역에서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1~2년은 더 뛸 수 있었다는 후회가 들긴 해요. 그 때는 부상도 당했고, 지도자로서의 길도 열렸기 때문에 미련 없이 은퇴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나중에는 축구를 하고 싶어도 못하잖아요. 그 때 더 했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더군요.(웃음)
2006년 3월 KFA에서 마련해준 은퇴식에서 ⓒKFA 홍석균
지도자로서의 새로운 삶

현역 은퇴와 동시에 성남 코치로 변신한 그는 착실하게 지도자의 길을 밟고 있다.
이론과 실기를 모두 겸비해 후배들에게 좋은 지도자가 되겠다는 것이 그의 목표. 무엇보다 좋은 스트라이커를 많이 키우고 싶다는 꿈을 이야기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스트라이커의 최우선 목표는 골을 넣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어린 후배들도 명확히 알아야 해요. 다만 예전과 다른 점은 그 때는 공격만 하면 됐지만, 지금은 수비도 겸비해야만 좋은 스트라이커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어린 후배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우선 축구에 대한 열정과 노력이 필요해요. 그리고 골에 대한 욕심과 집중력도 마찬가지고요. 스트라이커라는 자리는 기본적으로 모든 기술을 다 갖춰야 하지만, 그 중에서도 골을 향한 집중력과 날카로운 움직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 선수들이 축구를 즐기면서, 골 넣는 것을 즐기면서, 항상 골문을 향할 수 있는 당당한 자세가 중요해요."

"제 개인적으로는 이론과 실기를 모두 후배들에게 잘 전달할 수 있는 지도자, 선수들의 기억에 남는 지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프로팀이나 대표팀 감독에 대한 꿈도 꿀 수 있지만, 현재로서는 배우는 단계이기 때문에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배우는 단계가 점점 높아지다보면 좋은 기회가 올 수도 있겠죠.(웃음)"


인터뷰=이상헌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10년 7월호 '나의 선수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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