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에서는 불운했던 테크니션 이상윤 ⓒ손춘근
4년을 기다려온 전세계 축구인들의 축제 ‘2010 남아공월드컵’도 우승팀을 향한 마지막 네 팀만을 남겨놨다. ‘역대최강’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이번 대회에 참가한 우리 대표팀은 사상 첫 원정 16강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며 선전했다.

무엇보다 ‘월드컵의 신’은 실력만 허락하지 않는다. ‘월드컵의 신’은 이상윤(41, MBC ESPN 해설위원)에게 가져다 준 것처럼 때로는 불운을 선사하기도 한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던 이상윤은 최고라는 수식어와는 거리가 먼 선수였다. 그러나 그는 최고가 됐다. 건국대 졸업과 동시에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참가했으며, 일화(현 성남)의 주축 공격수로 1993년 K-리그 우승과 동시에 MVP를 거머쥐었다. 1995년에는 K-리그 최초의 골든골 주인공으로 성남의 리그 3연패를 이뤄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비록 감독과의 마찰로 1994년 미국월드컵에는 참가하지 못했지만, 1998 프랑스월드컵 아시아예선에서는 대한민국의 에이스로 당당히 인정받기도 했다. 그러나 큰 기대를 안고 참가한 프랑스월드컵에서는 불의의 사고로 제 실력을 뽐내지 못했던, 월드컵이 허락하지 않은 불운의 스타이기도 하다.

최고가 아니었던, 그렇기에 언제나 노력했던

이상윤은 동두천초 2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다. 그의 부모님은 1남 4녀의 귀중한 아들이 힘들게 운동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결국 아들의 고집은 꺾지 못했다. 그러나 이상윤은 단지 축구가 좋았을 뿐, 좋은 선수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언제나 이상윤의 발목을 잡는 것은 열악한 신체조건이었다.

“저는 그때 풀백을 봤어요. 상당히 약하고 작아서 신체적인 조건이 좋지 않았죠. 초등학교 선생님이 ‘상윤아 너는 몸이 약해서 안되겠다. 축구를 포기해라’고 만류하셨지만 제 고집은 꺾지 못하셨죠. 저는 단지 제가 하고 싶었기 때문에 축구를 했던 거에요.”

대부분의 축구선수들은 초등학교 때 공격수로 시작해 상급학교로 올라갈수록 미드필더, 수비수 등으로 포지션을 바꾸게 된다. 그러나 이상윤은 그 반대였다. 그는 수비수로 축구를 시작해 동대부중-동대부고를 거치면서 미드필더로 성장한다. 건국대 재학시절에는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했으며, 프로가 되어서는 측면 공격수로 이름을 알렸다. 수비수로 시작해 공격수가 된 특이한 케이스로 시간이 지날수록 꾸준히 실력이 향상됐다는 반증이다.

학창 시절의 이상윤은 특출난 선수가 아니었다. 대학진학 과정에서도 두 차례나 ‘퇴짜’를 맞는 우여곡절 끝에 건국대에 진학했다. 결과적으로 건국대로 진학한 것이 그의 성장을 부추겼지만 당시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프로선수나 대표선수는 못 되더라도 볼을 예쁘게 찬다는 말은 들었거든요. 제가 동대부고를 다녔으니까 잘하는 선수들은 원래 동국대로 진학을 해야 되요. 저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명지대를 가려고 했죠. 그런데 명지대 감독님이 시합을 보러 오시기 전날 발목을 접질린 거에요. 경기에서 제가 걸어 다니니까 아웃시키셨죠.”

“갈 데가 없으니까 난리가 났죠. 그러다가 저를 원하시던 건국대 정종덕 감독님께 저를 보낸 거에요. 그런데 건국대에 간 것이 제 축구인생에 큰 역할을 했어요. 정종덕 감독님께서 선수를 보는 안목이 탁월하셨거든요. 당장은 좋은 선수가 아니지만 성장하고 발전 가능성이 있는 선수들을 발굴하는 능력이 대단하셨습니다. 저도 그 중에 선택을 받은 것이죠. 행운아죠.(웃음)”

당시 건국대를 이끌던 정종덕 감독(66, 건국대 명예감독)은 ‘국가대표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수 많은 대표선수를 발굴해냈다. 그의 손을 거친 대표적인 선수로는 황선홍(42, 현 부산 감독), 윤상철(45, 현 경신고 감독), 고정운(44, 현 성남 U-18팀 감독), 유상철(39, 현 춘천기계공고 감독), 이영표(33, 알 힐랄), 현영민(31, 서울) 등 양손으로 꼽아도 모자랄 정도다. 이상윤 역시 정종덕 감독이 발굴해낸 진흙 속의 진주였다.

“제가 운동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준 것이 우리 부모님이었어요. 어머님께서 상당히 적극적이셨죠. 어머니가 엎어지면 코 닿는 운동장 근처로 이사까지 가면서 운동할 여건을 만들어 주셨죠. 그리고 기초적인 부분도 최민선 선생님께 잘 배웠고요. 제가 몸은 약했지만 기초적인 부분이 상당히 탄탄했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보다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학창시절에 잘하던 아이들은 자만해서 그런지 성장이 멈추더라고요.”

결국 대학에서 두 번이나 거부 당했던 이상윤은 외박 나가는 날까지도 운동을 하고 나가는 꾸준한 노력과 뛰어난 지도자의 가르침 끝에 대학무대 최고의 선수가 됐다. 그는 다시 대학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회상한다. 함께 건국대의 전성기를 이끌던 윤상철, 김홍운, 공문배, 고정운, 황선홍, 유승관, 고백진 등의 선수들은 여전히 이상윤의 가슴속에 동료로 남아있다.
대표팀에서의 이상윤 ⓒKFA 홍석균
월드컵을 소화하지 못한 ‘1990 이탈리아 월드컵’ 대표팀의 10번

정종덕 감독에 의해서 다듬어진 이상윤은 대학 졸업과 동시에 일화(현 성남)의 박종환 감독(71, 전 대구 감독)에 의해 드래프트 1순위로 선발된다. 여기에 당시 이회택 감독(63, KFA 부회장)이 이끄는 월드컵 대표팀에 선발되는 겹경사까지 누리게 된다. 이상윤이 처음으로 대표팀에 선발된 것은 대학교 4학년 때다.

“프로에 오면서 오른쪽 윙 포워드로 변화를 했지만, 원래는 플레이 메이커 출신이에요. 정종덕 감독님께서 그 자리를 주셨는데 박종환 감독님 밑으로 가면서 스타일이 바뀐 겁니다. 제 경우는 볼을 잡으면 프로 선수들도 볼을 잘 뺏지 못할 정도로 기술이 좋았어요. 공격의 역할을 상당히 잘 했고, 활동량이 많았어요. 영리하게 플레이를 하다 보니까 상대팀들이 열 받아서 ‘저 선수 어떻게 하면 바깥으로 내보낼까’ 했던 것 같아요.(웃음)”

그러나 대표팀은 이상윤이 뛰기에는 너무 힘든 무대였다. 선후배 사이의 규율이 엄격했던 당시 대표팀 분위기를 이겨내기가 쉽지 않았던 것. 이상윤은 대선배들에게 주눅이 들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정용환, 최순호, 박경훈 이런 형님들이 계셨어요.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예전하고는 분위기가 많이 변했잖아요. 그때 당시에는 그 분들의 얼굴을 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어려웠어요. 당시에 제가 (최)순호 형, (김)주성이 형하고 룸 메이트가 됐었는데 상당히 어려웠고, 볼을 차는 것도 주눅이 들어서 차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회택 감독은 대학을 갓 졸업한 이상윤을 월드컵 최종멤버에 포함시켜 이탈리아로 데려갔다. 선발 과정에서 ‘중원을 맡길 공격형 미드필더의 적임자’로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이상윤은 등번호 10번을 받았지만 이탈리아에서 벤치만 지키다 돌아왔다. 당시 박종환 감독은 “담이 작다”며 이상윤의 단점을 지적한 바 있는데, 그것은 정확한 지적이었다.

“그 때 박종환 감독님과 (고)정운이 형이 ‘네가 좀 더 대담했으면 축구판에 한 획을 그었을 것인데’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좀 소심했어요. 선수는 대범해야 하고 배포가 있어야 되는데 몸싸움도 약하고 겁이 많아서요. 게다가 1남 4녀라 여자만 넷이다 보니까 여성스러운 것이 있어요. 상당히 여리고 소심하고 소극적이었던 것들이 저의 단점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어요.”

“마지막 경기가 우루과이전이었는데 이회택 감독님이 저와 정해원 선배님 중에 한 명을 내보내려고 하셨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들어가고 싶었던 마음이 없었던 거에요. 그게 현실이 됐죠. 정해원 선배님이 들어갔는데, 대담하지 못했던 마음 때문에 경기를 뛰지 못했던 것 같아요.”
일화 시절의 이상윤 ⓒ월간축구
월드컵의 꿈을 안고 K-리그 최고로 우뚝 서다

이상윤은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돌아왔지만, 월드컵 무대를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도 자신감이라는 큰 수확을 얻었다. 국가대표 선수로 월드컵을 갔다 왔다는 자신감을 통해 국내 최고 선수들의 무대인 K-리그에 손쉽게 적응할 수 있었고, 당시 신생팀이던 일화의 상황은 이상윤에게 많은 출장 기회를 부여했다. 그로 인해 이상윤은 프로 첫 해 14경기에 출전해 4골-1도움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남겼다. 그는 신인왕의 가장 강력한 후보였지만, 팀 성적(리그 꼴찌)으로 인해 신인왕을 수상하지는 못했다.

프로 첫 해를 무난하게 보낸 이상윤은 다음 해 2년차 징크스는 커녕 더욱 뛰어난 모습을 보이며 K-리그 최고 공격수로 평가받기 시작한다. 그는 91년 15골, 92년에는 12골을 폭발시키며 득점왕 후보로도 손색이 없었다. 그가 최전방 스트라이커가 아닌 측면 공격수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득점 수치다. 그의 이런 활약은 1993년 일화가 K-리그 우승을 차지하면서 정점에 치달았다. 중요한 고비마다 골을 터트린 이상윤에게 K-리그 MVP로 선정된 것이다. 그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스트라이커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골을 넣을 수 있는 감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윙 포워드에서 활동량이 상당히 많았거든요. 특히 더운 날씨에 강했거든요. 상대가 상당히 어려워했고, 득점을 많이 했어요.”

“프로에서 MVP를 받는다는 것이 쉽지 않잖아요. 경기에서 골을 넣는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저에게는 탄탄대로였죠. 제가 열심히 했기 때문에 그만큼의 보상이 뒤따라 온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일본으로 진출하는 선수도 있었는데, 저도 대표선수로 완전히 자리도 잡고 외국에 나가서 좋은 활약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죠.”

물론 이상윤이 평탄한 길만 달려온 것은 아니다. 그는 소속팀 일화가 K-리그 3연패를 하는 동안 박종환 감독과 힘겨루기를 하다 임의탈퇴가 되는 절제절명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자신의 장점을 살려주지 못하는 박종환 감독의 축구 스타일에 염증을 느꼈고, 그 과정에서 주위의 부추김도 있었다. 그러나 선수가 감독을 이길 수는 없는 것. 이상윤은 결국 무릎을 꿇었다.

“저는 열심히 하면서도 인정을 못 받았어요. 미운 오리 새끼 있잖아요. 저는 잘하면 본전, 못하면 역적 이런 식이었어요. 당시에 모 신문사 기자님이 자기가 도와줄 테니까 한번 부딪쳐보라고 해서 기사도 났었거든요. 그런데 솔직히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더라고요. 나중에는 그 기자님이 ‘상윤아 안되겠다. 다시 팀으로 돌아가야 되겠다’고 그러더라고요.”

“어쨌든 축구는 다시 해야 되니까 박종환 감독님이 당시 남산 있는데 사셨는데 제가 찾아갔었어요. 그때 감독님께서 ‘난 너한테 할말 없어. 가. 네 축구인생은 끝났어’ 그러시더라고요. 제가 무릎을 꿇고 ‘감독님 저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축구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랬더니 감독님께서 ‘너는 축구계에서 매장되어야 한다. 너는 내 제자도 아니야’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런데 하루 지나고 그 다음날 선수단이 훈련을 가는데 버스에 제 자리가 있잖아요. 감독님이 ‘거기 누구 자리야, 거기 상윤이 올 거니까 나와 임마’ 그러셨던 거에요. 그러면서 제가 다시 오니까 되게 좋아하시더래요. (고)정운이 형하고 당시 코치였던 이장수 감독님이 전화하셔서 들어오라고 해서 다시 들어간 것이죠.(웃음)”

1995년 임의탈퇴라는 위기를 겪었던 이상윤은 팀 복귀 후에도 이렇다 할 활약을 펼치지 못하며 마음 고생을 심하게 했다. 그러나 그해 포항과의 챔피언결정전에서 잊지 못할 결승골로 팀에 우승컵을 안겼다. 1, 2차전 모두 무승부로 3차전으로 이어진 승부에서 연장 전반 14분, 극적인 헤딩골을 터트려 승리를 확정 지은 것이다. 당시 이상윤의 골은 K-리그 최초의 골든골이었다. 그는 골을 넣자마자 박종환 감독에게 달려가 포옹을 나누며 그간의 잘못을 사죄했다.
97년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예선 카자흐스탄전에서의 이상윤 ⓒKFA 홍석균
기대는 또 다른 상처로.. 불운의 이상윤, 축구화를 벗다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경기장을 밟지 못했던 이상윤은 명예회복을 노리며 4년을 기다렸다. 그 동안 그는 K-리그 MVP로 선정되는 등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고 있어 그의 월드컵 출전은 당연해 보였다. 그러나 ’94 미국월드컵’ 대표팀 감독이던 김호 감독과의 불화로 이상윤은 미국월드컵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봐야 했다. 부상으로 인한 소극적인 플레이가 심한 감정의 골을 만든 것이다.

결국 ’94 미국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한 이상윤은 K-리그에 전념하며 ’98 프랑스월드컵’을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1997년 성남에 부임한 레네 감독을 만난 것은 이상윤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레네 감독은 이상윤의 기술적인 플레이를 높이 평가하며 그를 중용했고, 이상윤은 성남 공격의 주축 선수로 자리잡았다. 당시 이상윤의 플레이는 대표팀 감독이던 차범근 감독의 눈에 들었고, 그는 차 감독의 신임에 뛰어난 경기력으로 보답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반신반의했죠. 제가 대표팀에 들어가서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많은 분들이 많았는데, 저는 상당히 자신 있었어요. 당시에 좋은 플레이를 했기 때문에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한풀이 한마당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우즈베키스탄전에서 헤딩경합을 하는 이상윤 ⓒKFA 홍석균
그러나 서두에서 말한 월드컵의 신은 이상윤의 한풀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프랑스월드컵 아시아예선을 치르면서 대표팀의 에이스로 떠오른 이상윤은 첫 경기인 멕시코전을 앞두고 경기장에서 몸을 풀다가 김태영(40, 올림픽대표팀 코치)의 강슛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대표팀은 멕시코에 1-3으로 역전패 했다.

“멕시코전을 앞두고 몸 푸는 과정에서 헤딩을 하고 나오는데 (김)태영이 왼발에 제대로 얹혀서 날아오는 무회전 슈팅에 무의식적으로 맞은 거에요. 권투에서 관자놀이에 카운터 어택을 맞고 쓰러지는 것 있잖아요. 첫 경기에 긴장을 많이 한 상태에서 그걸 맞고 그냥 쓰러져 버린 거에요. 6~7초 쓰러져 있으니까 난리가 난 거죠. 정신이 없어서 몸이 붕 떠 있는 느낌이었어요. 경기 내내 제 정신이 아닌 상황에서 경기를 했죠.”

“당시 차 감독님은 그 상황을 몰랐어요. 빨리 얘기를 해서 다른 선수로 대체를 했으면 더 좋았겠죠. 그런데 저도, 최주영 의무팀장님도 그 얘기를 안 드렸어요. 그 경기에서 (하)석주가 백태클로 퇴장 당해서 10대11로 뛰었잖아요. 근데 저도 제 정신이 아니니까 9대11로 뛴 거에요. 그것으로 인해서 제가 보여드린 것은 0% 였어요.”
98 프랑스월드컵 멕시코전에서의 이상윤 ⓒKFA 홍석균
당시 황선홍이 빠진 대표팀에서 이상윤은 득점 1순위로 지목됐다. 그로 인해 언론의 이목이 모두 이상윤에게 집중된 상황. 그러나 그는 실망스러운 경기로 스포트라이트 대신 모든 패배의 포화를 뒤집어 써야 했다. 비난의 화살은 그의 가족에게도 큰 상처로 날아와 꽂혔고, 그는 상실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게다가 자신에게 큰 기대를 걸었던 차범근 감독은 월드컵 도중 경질되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고, 이상윤은 명예회복의 기회도 얻지 못했다.

이듬해 이상윤은 프랑스 리그의 FC로리앙으로 임대이적해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지만, 문화적 차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5경기 만에 다시 국내 무대로 복귀해야 했다. 의욕을 잃은 이상윤은 10년 동안 뛰었던 성남에서 방출됐고, 부천SK(현 제주)로 이적했으나 ‘출발 드림팀’(KBS)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팔이 부러지는 부상으로 그의 재기는 또 다시 어긋났다. 결국 그는 K-리그에서 293경기를 치르고도 은퇴식도 없이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다.
98년 K-리그 올스타전에서 김병지와 맞대결을 펼치는 이상윤 ⓒKFA 홍석균
현역에서 은퇴한 이상윤은 차범근 축구교실과 여자대표팀 코치를 거쳐 현재 ‘양주 스타 이상윤FC’에서 감독을 맡고 있다. 새로운 팀의 감독으로 부임한 지 세 달여 밖에 안된 그는 새로운 마음으로 축구 불모지 양주에 축구 바람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아픔도 많았지만 축구선수로서 프로에서 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것들, 대표팀에서의 활약, 그리고 사람들에게 축구를 열심히 했고 볼을 참 예쁘게 찬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선수로서 상당히 가치가 있었구나’라고 생각을 합니다. 지금은 축구 해설을 통해 몸이 아닌 말로 축구를 다시 전할 수 있어서 좋고, 해설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저를 알릴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이고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손춘근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10년 6월호 '나의 선수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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