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플레이메이커로 명성을 떨쳤던 윤정환 ⓒ스포탈코리아
‘세련’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던 1990년대. 투박한 축구로만 보였던 한국축구에서 축구팬들의 눈을 사로잡은 플레이가 등장했다. 작은 체구, 왜소한 몸에도 불구하고 재기 넘치는 패스 플레이로 신선함을 불어넣었던 미드필더 윤정환(36)이다.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대표팀 주장으로 본선 첫 승의 결승골을 넣었던 그는 1995년 부천 SK(현 제주)에서 K-리그에 데뷔했고, 한일 양국을 오가며 선수생활을 했다. 세레소 오사카, 성남 일화, 전북 현대를 거친 뒤 지난해 사간 토스에서 현역 생활을 마무리했다. 현재는 사간 토스의 1군 코치로 지도자 수업을 차곡차곡 쌓고 있다.

기영옥 감독 밑에서 패스에 눈 떠

윤정환이 축구를 접하게 된 것은 그가 원래 했던 운동인 단거리 육상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 광주 광림초 재학 시절 육상 선수였던 그는 우연히 본 축구부의 훈련 모습에 흥미를 느꼈고, 테스트를 받아 축구부원이 됐다. 천재 미드필더의 시작이었다.

“제가 달리기가 빠르니까 바로 뽑혔어요. 처음에는 다른 친구들보다 왼발을 잘 쓰고 빠르니까 윙을 맡게 해주시더군요.”

광림초, 북성중을 거친 윤정환은 1988년 기영옥 감독의 금호고에 입학하면서 천재성을 인정받기 시작한다. 기영옥 감독은 윤정환이 북성중 2학년일 때 그의 재능을 발견하고 일찌감치 금호고로 스카우트할 만큼 애정을 보였다. 윤정환은 기영옥 감독의 밑에서 패스의 요령을 익혔다. 특히 패스를 받는 사람이 편하고 쉽게 받을 수 있는 것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기영옥 감독님께선 패스를 받는 사람이 편하고, 쉽게 받고, 몸과 시야가 다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가르쳐주셨죠. 또 감독님께서 체육선생님이셔서 체육시간에도 따로 훈련을 하도록 해주셨고요. 감독님께서 계속 가르쳐 주시다 보니 서서히 남들보다 잘하게 된 것 같습니다.”

윤정환은 좋은 재능에도 불구하고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역 대회에서는 어느 정도 성과를 냈지만, 주위 동료가 타 팀에 비해 약해 전국대회 우승은 맛보지 못했다. 그러나 고3때 남대식 감독이 이끌던 U-19 대표팀에도 발탁돼 전국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96 아틀랜타 올림픽대표팀 시절 윤정환 ⓒ베스트일레븐
내 생애 최고의 파트너, 최용수

바늘 가는데 실 간다는 말처럼 윤정환을 이야기할 때 꼭 빠지지 않는 이가 하나 있다. 한국이 낳은 불세출의 스트라이커 최용수. 한국 최고의 콤비 플레이를 펼쳤다는 윤정환과 최용수는 축구팬들을 항상 설레게 했다. 윤정환은 동아대 3학년 재학 당시 연세대 4학년이었던 최용수를 처음 만났다.

이때의 만남은 필연적이었고 둘은 애틀랜타 올림픽을 준비하는 대표팀에 나란히 발탁되어 중원의 지휘자와 최전방 공격수의 임무를 받았다. 당시 팀을 이끌었던 비쇼베츠 감독은 수 차례 연습 끝에 두 선수의 콤비 플레이에 집중했고, 이후 올림픽대표팀의 주 공격루트로 이어졌다. 그 유명한 윤정환의 패스에 이은 최용수의 득점이었다.

“처음 소집이 되고 사우디 아라비아로 전지훈련을 갔을 때였습니다. 첫 시합 상대가 일본이었는데 경기를 하다 용수형과 눈이 맞았고 패스를 넣어주니 그걸 골로 넣더군요. 공격수는 용수형뿐이라 의식하고 패스한 것인데 성공이 된 것이었죠. 이후 용수형과는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하자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같이 움직였습니다.”

“대표팀에는 용수형 외에도 우성용, 이우영, 정상남 등 좋은 공격수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렇지만 유독 용수형과 호흡이 잘 맞았죠. 용수형이 수비 뒤로 움직이거나 뚫는 움직임이 다른 선수들보다 좋았거든요. 전 그 움직임을 빨리 파악하고 패스해 슈팅을 할 수 있도록 도왔고요. 그런 점이 잘 맞아서 좋은 콤비가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최고의 콤비라 불렀는지도 모르네요.”

하지만 두 선수의 콤비 플레이는 애틀랜타 올림픽을 끝으로 다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K-리그에서는 각각 유공(현 제주)과 LG(현 FC 서울) 소속으로 맞상대를 벌였을 뿐 함께 팀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A대표팀에서도 서로 엇갈리게 발탁되면서 함께 하지 못했다. 그나마 2002 월드컵에서 함께 대표팀의 일원이 됐지만 출전 기회를 얻지 못했다.

“용수형과 올림픽 대표팀에서 2년 정도 함께 뛰었지만 프로에서는 한 번도 같은 팀이 되지 못했어요. A대표팀에서도 함께한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죠. 같이 뛰고 싶다는 생각도 많았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웠죠.”
아틀랜타 올림픽 본선에서 멕시코를 상대하는 윤정환 ⓒ베스트일레븐
K-리그의 센세이션 니포 축구의 중심

1995년 유공에 입단한 윤정환은 발레리 니폼니시 감독의 믿음 아래 팀 개편의 중심에 섰다. 윤정환의 빠른 움직임과 패스 센스를 높이 산 니폼니시 감독이 결단을 내린 것. 니폼니시 감독은 윤정환의 수비 부담을 덜어 그가 자유롭고 창조적인 움직임을 펼칠 수 있게 배려했다. 윤정환은 기대에 보답하듯 다이내믹한 패스로 팀 공격을 풀어가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선배들도 있어서 처음엔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감독님께서 믿어주시고 제가 중심이 되는 전술이 만들어지면서 부담감은 서서히 사라졌죠. 제 장단점도 이야기해주시면서 자신감을 잃지 않도록 조언도 많이 해주셨습니다. ‘어리지만 괜찮다. 도전하고 패스를 많이 하라’고 말씀하셨던 게 지금도 잊혀지지 않네요.”

니폼니시 감독은 윤정환을 중심으로 그와 비슷한 연배인 윤정춘, 김기동, 이을용을 허리에 배치해 K-리그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다. 그 유명한 ‘니포 축구’의 탄생이었다. 비록 K-리그 우승 없이 몇 차례 컵 대회 우승에 그쳤지만 한국 축구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제 또래 선수들과 3~4년을 함께하다 보니 나중에는 보지 않아도 패스가 될 만큼 호흡이 잘 맞았어요. 초기에는 젊은 선수들이어서 시간이 오래 걸렸고 성적에도 영향을 끼쳤지만 결국 좋은 팀이라는 결과물로 나왔죠.”

“지금 생각해봐도 K-리그에서 가장 호흡이 잘 맞았고 재미있게 공을 찼던 선수들이었던 같아요. 4명 모두 볼 키핑력의 수준이 상당했고 정춘이는 드리블이나 돌파, 슈팅이 굉장히 좋은 선수였습니다. 전 패스가 좋았고 기동이와 을용이는 안정적인 플레이가 돋보였죠. 을용이는 거의 수비 위주로 했고 기동이는 가운데서 공수의 중간 역할을 맡았어요. 이렇게 역할 분담도 잘 이루어졌던 것이 그러한 플레이로 이어진 것이죠.”
96 아디다스컵 우승 당시의 모습 ⓒ베스트일레븐
새로운 축구인생 J리그로의 도전

부천에서 5년간 108경기에 출전해 15골-28도움을 한 윤정환은 2000년 축구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당시 한국 선수들이 많이 진출해 있던 일본 J리그 진출을 위해 대한해협을 건넌 것. 그는 노정윤이 미드필드를 이끌고 있던 세레소 오사카를 자신의 해외 진출 첫 팀으로 정했다.

“사실 1998년에 프랑스리그 쪽에서 이적 제의가 한 번 있었어요. 그런데 팀에서 거부하는 바람에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죠. 그 뒤 재계약할 때 어느 정도의 이적료가 제의될 경우 해외 이적할 수 있다는 계약 조항을 넣었고, 세레소로 이적하게 됐습니다. 제 축구 스타일이 패스 위주의 플레이였기에 J리그 적응에는 문제가 없었어요. 물론 정윤형 도움도 컸죠.”

윤정환의 J리그 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세레소는 패배를 거듭했고, J2리그로 강등되는 수모를 맛봤다. 그 해 일왕배(FA컵)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2부리그 강등을 저지할 수 없었다. 윤정환은 강등이 확정되자 이적을 고려하기도 했다.

“일왕배 결승전에 오르기 전까지 9경기를 한번도 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강등이 확정되자 자존심이 상했고 팀을 떠날까 고민을 했죠. 그 때 감독님이 바뀌셨고 새로 부임하신 분이 1년 더 같이 하자고 권유하셔서 J2리그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떠나더라도 승격시켜놓고 떠나겠다는 오기도 발동했고요. 그래서 1년 뒤 다시 J1리그로 올라갔습니다.”
성남 시절의 윤정환 ⓒ베스트일레븐
K-리그 유턴, 그리고 다시 건넌 대한해협

2002년까지 세레소에서 활약한 윤정환은 2003년 국내 복귀를 했다. 그러나 친정팀 부천이 아닌 성남 일화를 택했다. 그러나 윤정환과 성남은 어울리지 않는 짝이었다. 30경기에 나섰지만, 대부분 전반전만 뛰고 교체 아웃 되었다. 생애 첫 K-리그 우승을 성남에서 맛봤지만, 그는 우승의 조연이었을 뿐이다.

“고(故) 차경복 감독님께서는 항상 저를 선수들 중에서 맨 처음이나 두 번째로 혼내셨어요. 이유를 모르겠어요. 언젠가는 제가 팀에 불필요한 선수라는 기사도 나왔고요. 그래서 코칭스태프에 따지기도 했죠. 결국 이듬해 조윤환 감독님이 계시는 전북으로 이적했습니다.”

윤정환은 부천 시절 코치로 자신을 지도했던 조윤환 감독 밑에서 다시 기량을 꽃피웠다. 개인 기록도 다시 높아져 성남 시절 1골-3도움에 그쳤던 공격 포인트가 2골-8도움으로 높아졌다. 그러나 윤정환은 자신을 믿어주던 조윤환 감독이 사임하자 새로운 길을 모색했고, 2006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의 새로운 팀은 J2리그의 사간토스였다.

“급하게 팀을 찾다 보니 여기로 오게 됐습니다. J2리그 팀이지만 사장님이나 감독님이 승격에 대한 의지가 있어서 택했죠. 선수들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였고,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도 사간 토스를 선택한 이유였죠.”

사간토스의 코치로 좋은 모습 남기고 싶어

윤정환은 2년간 사간 토스의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베테랑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린 선수들은 윤정환의 노하우를 전수받으며 기량이 향상됐다. 관중도 늘어나 매 경기 7천~1만 명이 입장했다. 사간 토스를 업그레이드시킨 윤정환은 2008년 초 선수로서의 미련을 버리고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2008년 시즌 개막에 맞춰 은퇴했습니다. 한국에서 은퇴하지 못해 아쉽더군요. 그래도 아쉬울 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죠. 작년에 KFA에서 주관하는 코치 연수를 받은 덕분에 테크니컬 어드바이저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사간 토스에서 테크니컬 어드바이저 역할을 받은 것은 제가 최초라는군요. 자부심을 느꼈죠.”

윤정환은 테크니컬 어드바이저의 주임무인 사커스쿨에서 유소년 선수를 지도했다. 그리고 올해 1군 코치로 승격해 성인 선수를 지도에 나섰다.

“팀에서 좋게 봐주셔서 1군 코치가 됐습니다. 제가 맡은 것을 충실히 하는데 노력하고 있죠. 선수들에게 실전에서 활용할 수 있게 다양한 경험을 이야기를 해주고 있죠. 사실 한국에서도 지도자 생활은 하고 싶죠. 그래서 제의가 오면 바로 할 수 있도록 여기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지도자로 한 걸음씩 걷기 시작한 윤정환은 J리그에서 활약하는 많은 한국 선수들에게 투지와 근성을 잃지 말 것을 조언을 했다. J리그 선배로서, 그리고 J리그 현장에서 뛰고 있는 지도자로서의 조언인 만큼 누구보다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일본 지도자들은 한국 선수들의 투지, 근성을 중요시하고 기대합니다. 그것을 바라는 만큼 잘 표현한다면 성공할 수 있죠. 한국 선수의 가장 큰 장점이자 좋은 점이거든요. 그렇다면 쉽게 융화되고 좋은 경기를 펼칠 것입니다.”


인터뷰=김성진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09년 6월호 '나의 선수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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