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그 골키퍼계의 신화와도 같은 존재 신의손 ⓒ스포탈코리아
“전혀 기대하지 못했었기 때문에 너무 놀랐다. 그리고 무한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얼마 전 출항한 대한민국 U-20 대표팀 홍명보號의 골키퍼 조련사로 낙점을 받은 신의손(49) 코치의 말이다. K-리그 최초의 귀화선수, K-리그 우승 4회(일화 3회, 안양LG 1회), 무실점 117경기, 리그 통산 경기당 1.05실점(313경기 331실점), 압도적인 방어능력 때문에 K-리그 규정까지 바꿔놓아(외국인 골키퍼 수입 금지) 스스로 자신의 발목을 잡았던 비운의 주인공...

한국 프로축구에서 신의손이 남긴 역사는 너무나 방대하다. 그리고 지금 그의 개인사는 새로운 챕터의 첫 장을 넘기고 있다. 프로축구가 아닌 대한민국 대표팀으로, 선수가 아닌 코치로서의 새로운 도전이다.

샤리체프, 신의손, 그리고 K-리거 12년

발레리 샤리체프, ‘한국인’ 신의손이 극동의 나라에 발을 내디딘 지 올해로 17년째다.
청안의 백인이 외국인 인구비가 현저히 낮은 한국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어린 나이면 몰라도 1992년 천안일화로 이적해왔을 당시 신의손의 나이는 벌써 32살이었다. 인생의 가치관과 축구에서의 플레이가 자기만의 것으로 이미 단단히 굳어진 나이. 언어를 습득하지 못한 신의손이 구 소련과는 전혀 다른 축구를 하는 동료들 사이에서 자신을 표현할 수 있었던 유일한 언어는 실력뿐이었다.

“한국 선수들에 대한 첫 인상? 정말 많이 뛴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목적이 없는 뜀박질로만 보였다. 당시의 한국축구는 내가 있던 곳의 축구와는 전혀 달랐다. 심지어 맨땅에서 연습하기도 했다. 지금은 너무나 달라졌다. 한국 축구는 이제 세계 수준에 근접했다. 한국축구를 무시하던 러시아 클럽들도 이제 한국인 선수를 영입할 정도로 발전했다.”
일화(현 성남) 시절이던 1993년 K-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샴페인을 터트리는 신의손 ⓒ월간축구
그러나 신의손의 언어는 한국축구계 전체로 정확하게 퍼져나갔다. 1991년 리그 최다 실점팀이었던 천안일화는 신의손이 가세한 1992년 단번에 리그 최소 실점을 기록하며 우승을 일궈낸다. 박종환 감독의 천안일화 신화가 막을 연 것이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동료들은 ‘체프 형’(러시아식 이름이었던 샤리체프에서 딴 애칭)이라고 부르며 그의 귀신 같은 방어능력을 믿고 완벽한 경기를 펼쳤다. 한국 프로축구 최초의 리그 2연패를 달성한 데 이어 1995년 전대미문의 3연패로 세상을 평정했다.

특히 1995년 포항과의 챔피언결정전은 프로축구 26년을 통틀어 최고의 명승부로 지금까지도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챔피언결정전 2차전(3-3 무승부)의 이야기를 꺼내자 신의손의 기억도 플래시-백 되는 듯 보였다.

그는 “아마도 리그 역사상 가장 강렬했던 결승전이었다고 생각한다. 현역 시절 기억에 남는 몇 경기들 중에서도 최고였다”라며 운을 뗐다.

“챔피언결정전 역사상 그때만큼 양팀 전력이 백중세를 보인 적은 없는 것 같다. 상대팀(포항)에는 황선홍, 라데, 홍명보가 버티고 있었고, 우리 팀에는 고정운, 신태용, 이상윤 등 스타 플레이어들의 맞대결이었다. 정말 수준 높은 경기 내용이 나왔고, 결국 3차전까지 가서야 최종 승부가 결정 났다. 내가 한국에서 경험했던 네 번의 우승 중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 같다.”

신의손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세 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0점대 방어율 골키퍼로서 한 경기에서 3실점했다는 드문 사실과 3차전까지 이어졌던 처절한 승부를 설명해주는 손가락 짓이었다.
2000년 K-리그 올스타전에 참가한 신의손 ⓒ베스트일레븐
그러나 신의손의 활약은 너무 빛났다. 축구선수의 활약이란 무한히 빛나도 상관없겠지만 그의 경우는 너무 지나쳤다. 팀 성적으로 직결된 신의손의 선방 퍼레이드는 타 구단들의 ‘외인 골키퍼 영입’을 부추겼다. 국내파 골키퍼가 고사될 위기에 처하자 프로축구연맹은 1996년부터 단계적으로 외국인 골키퍼의 리그 출전 횟수를 축소해갔고, 1999년에 이르러 전면 금지되기에 이르렀다.

신의손은 난감했다. 한국에 남아도 경기에 나갈 수 없고, 유럽으로 가자니 나이가 너무 많았다. 98년과 99년의 2년간은 실전에 거의 나서지 못하면서 신의손은 국제 축구 미아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러다가 선택한 2000년의 한국인으로의 귀화. 안양LG의 조광래 감독의 설득으로 한국인으로 다시 태어난 신의손은 꺼져가던 불꽃을 다시 피웠고 그 해 자신의 네 번째 우승을 일궈냈다. 신의손은 “가장 어려웠던 우승은 95년이었지만, 가장 기뻤던 우승은 2000년 안양LG에서의 우승이었다. 난 내가 다시 뛸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데 귀화란 선택으로 경기에 나설 수 있었고 우승까지 해냈다. 정말 기뻤다”라고 말한다. 2004년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 ‘한국인’ 신의손 골키퍼의 마지막 우승이었다.
안양LG로 팀을 옮겨 2000년 K-리그 우승을 차지한 뒤 ⓒ베스트일레븐
최고의 골키퍼를 키우고 싶다

축구화 끈을 풀었지만 그는 제2의 조국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다. 2005년 FC서울, 2006년 경남을 거쳐 2008년 대교 캥거루스의 수석 및 골키퍼 코치로 한국 축구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K-리그가 낳은 최고의 골키퍼라는 명망을 벗고, 한국축구의 미래를 이끌어갈 최고의 골키퍼를 조련하는 일을 새로운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인터뷰 도중, 최고의 골키퍼를 키워내겠다는 그의 목표의식과 사명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었다. 선수로 활약했을 당시와 지금 축구 환경을 비교해달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가끔 요즘 같은 환경에서 선수 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부러움마저 들 때도 있다. 요즘 어린 선수들은 행복한 줄 알아야 한다. 난 오른쪽 팔목이 부러진 상태에서도 계속 연습했고 경기에도 나갔다. 기회를 잡기 위해 고통을 참아냈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내가 젓가락질을 못한다고 놀리지만, 그때 부상 후유증으로 손가락에 힘이 안 들어가서 젓가락질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요즘 친구들은 조금만 아파도 못 뛰겠다고 엄살을 피운다. 내가 보기엔 충분히 할 수 있는데, 그냥 누워버린다. 너무 나약해진 게 아닌가, 싶을 때도 많다.”

선수 시절 때부터 철저한 자기관리로 모범을 보였던 만큼 그가 뽑는 ‘최고의 골키퍼가 되기 위한 조건’ 중 제 1 조건은 역시 정신력이었다. 물론 단순히 그럴 것이다, 라는 추론에서 나온 결과물이 아니다.

“재능과 신체능력 등을 모두 갖춰야겠지만, 그 중에서 뽑으라면 단연 정신력이다. 지금까지 정말 수많은 골키퍼들을 봐왔다. 재능을 타고난 선수, 재능이 없는 선수 등, 모든 종류의 골키퍼들을 봤는데, 재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연습을 게을리해서 아예 사라지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볼 수 있었다. 아무리 재능이 없다 해도 의욕만 있으면 최소한 중간 정도는 갈 수 있다. 재능과 노력, 정신력을 모두 갖춘 선수만이 톱 클래스의 골키퍼가 될 수 있다.”

20년이 넘는 선수생활을 거치면서 겨우 깨달은 자신만의 골키퍼론이지만, 그 노하우를 미래의 골키퍼들에게 전수하는 데에는 아낌이 없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런 걸 도와주는 것이다. 면밀히 분석해서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동시에 단점을 정확히 고쳐주는 일이다. 단점을 보완해서 장점의 수준으로 끌어올려줘야 한다. 선수에 맞는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추진력을 불어넣어줘야 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분명히 좋은 결과가 나온다.”

좋은 골키퍼들을 키우고 싶다는 마음이 강한 만큼 한국의 열악한 골키퍼 코칭 환경에 대한 아쉬움도 진할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중고등학교 축구부에 골키퍼 전문 코치가 있기 힘들다. 그러다 보니 어렸을 때 가르쳐야 할 골키퍼 기본기 교육이 안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프로팀의 골키퍼들을 지도하다 보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기본기를 모르는 친구들이 많다. 프로팀 골키퍼를 붙잡고 기본기를 가르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자신이 처음 골키퍼 훈련을 받았던 시절 러시아에는 골키퍼만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기관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연령별 코칭 내용을 명확히 구분되어있기 때문에, 기본기 교육도 확실하게 되고 나이 들어서는 익히기 힘든 기술 습득도 집중적인 조련이 가능했다”라며 골키퍼 왕국 러시아의 비밀을 들려줬다. 그러나 러시아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예전 러시아는 유럽에서 동떨어져있던 국가였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선수를 키워야 했다. 그러나 요즘은 러시아 클럽들도 돈이 많아진 탓에 선수를 키울 필요 없이 지금 당장 뛰어난 외국인 골키퍼를 사올 수 있게 된 만큼 유망주 육성에 소극적이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지만 한국의 골키퍼 유망주들에 대한 신의손의 평가와 기대는 여전히 높다. 특히 한국 축구 선수들의 ‘골키퍼 DNA’에 대해서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한국에서도 재능 있는 선수들을 정말 많이 봤지만, 대부분 그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아쉬울 따름이다. 지금 가장 돋보이는 유망주는 부산에서 활약하는 이범영이다. 작년 리그 경기에서 우연히 봤고 2주 정도 함께 연습했을 뿐이지만 그가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다는 걸 알기에 충분했다. 신체능력, 파워, 골키퍼 센스, 순발력, 반응 모두 완벽하다. 지금 그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경험뿐이다. 경험과 노력이 겸비된다면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에드빈 판 데르 사르보다도 뛰어난 골키퍼가 될 수 있다.”

이번 인터뷰를 도와준 강창석씨에 따르면, 신의손이 강창석씨에게 이범영을 설명하면서 ‘점프했더니 허벅지가 크로스바에 닿더라’라고 말했단다. 꽤나 심한 허풍이지만 신의손이 이범영의 재능에 얼마나 감탄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골키퍼 코치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신의손 ⓒ스포탈코리아
대한민국 청소년 대표팀 골키퍼 코치

파주 트레이닝 센터에서 만난 신의손의 가슴에는 축구공을 앞발로 감싼 푸른 호랑이 마크와 함께 ‘KOREA’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그는 이제부터 홍명보 감독과 함께 한국 축구의 미래를 조각해가야 한다. 그만큼 책임감도 막중하다.

“귀화하기로 결정했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책임감이 느껴진다. 오늘 훈련을 시작하기 전에 홍명보 감독도 선수들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프로선수로서의 책임감도 중요하지만, 대표선수가 된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책임감이 요구된다는 말을 했다. 대표팀은 정신자세가 중요하다. 나도 마찬가지고.”

지금까지 최고의 골키퍼로만 살아왔지만 그는 매 순간 새로운 목표를 정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고 한다. 이번 U-20 대표팀 합류는 가장 최신의 목표를 만들어준 기회이다.

“나를 불러준 홍명보 감독의 결단에 정말 감사한다. 내 자신을 새로운 장에서 테스트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에 대해 무한한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이번에 모인 코칭스태프 모두 K-리그를 풍미했던 선수들이다. 그러나 바로 지금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스타 플레이어 출신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우리 앞에 있는 저 어린 친구들을 스타 플레이어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모인 골키퍼들 모두를 장차 월드컵 무대에서 뛸 수 있을 만큼 키우고 싶은 게 나 개인적인 사명이고, 오는 9월 이집트 U-20 월드컵에서 팀이 한 단계라도 높은 순위를 차지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 코칭스태프 모두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혹자는 아직도 서툰 그의 한국어 실력을 트집 잡는다. 그러나 1992년부터 시작된 그의 한국축구 인생, 그리고 지금 막 시작하려는 새로운 도전을 글로 기록하고 말로 전하기 위해서 그의 어눌한 언어는 별로 필요할 것 같지 않다. 뜨겁고 진하다는 것은 손 대보면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한국축구 사랑은 뜨겁고 진하다.


인터뷰=홍재민. 통역=강창석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09년 4월호 '나의 선수 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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