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한국대표팀 미드필더로 맹활약했던 박병철 ⓒ스포탈코리아
70년대 한국 대표팀의 미드필드에는 항상 박병철(54세)이 있었다.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하던 박병철은 파워가 뛰어나고, 쉴 새 없이 피치를 누비며 에너자이저 역할을 해주던 선수였다. 또한 정확한 킥으로 인해 코너킥이나 프리킥, 페널티킥을 도맡아 차기도 했다. 1973년 처음으로 대표팀에 선발된 이후 1979년 무렵까지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활약을 펼쳤다. 1985년 현역에서 은퇴한 뒤 축구계를 떠났던 그는 현재 고향 울산에서 개인사업(수산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뒤늦게 시작한 축구

박병철이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한 시기는 다른 선수들에 비해 다소 늦었다. 울산 성동초 시절부터 운동에 소질이 있었지만, 집안 장손인데다가 공부 역시 반에서 1~3등을 유지했던 터라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 남창중 2학년 시절 축구와 공부를 병행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결국 부산상고에 들어간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축구를 하게 됐다.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을 잘해서 도민체육대회 등에 나가기도 했어요. 그러나 공부 때문에 축구를 본격적으로 하지는 못했죠. 남창중 2학년 때 제가 반대항 축구대회에서 뛰는 것을 보고 축구부 감독님이 스카우트를 하셨습니다. 제가 축구부원들보다 더 잘했거든요.(웃음) 그런데 공부도 계속해야 하기 때문에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만 축구를 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몇 개월 지나니까 성적이 떨어지더군요. 그래서 결국 축구는 포기했죠.”

고교 진학을 앞두고 박병철은 당시 출세의 지름길이라고 불리던 부산상고로 시험을 쳤다. 그러나 시험에서 떨어지면서 그는 1년을 쉬어야 했고, 그 다음 해에 결국 축구 특기생으로 부산상고에 입학하게 됐다. 그 때부터 박병철의 본격적인 축구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작은 아버지 두 분이 모두 부산상고 출신이셨거든요. 무조건 거기로 들어가라고 집안에서 난리였죠.(웃음) 결국 부산상고에 축구로 입학하게 됐고, 이 때부터 축구에 전념하게 됐습니다. 고 1때 제 키가 160cm로 상당히 작았지만, 재간이나 패싱력, 센스 등은 다른 선수들보다 좋았죠. 그리고 고 2 시절부터 키가 갑자기 크면서 힘도 붙었어요. 고 3 시절에는 은행팀들에게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지만, 집안에서 장손이니 무조건 대학을 가라고 하셔서 한양대로 진학하게 됐습니다.”

한양대에서 축구에 눈을 뜨다.

한양대에 진학한 박병철은 최은택 감독(작고)의 집중적인 훈련을 통해 축구선수로서 급성장했다. 최은택 감독은 다소 슬로우 스타일인 박병철의 약점을 파악하고, 이것을 교정하는데 많은 힘을 쏟았다. 대학 1학년 시절부터 베스트 멤버로 활약한 그는 한양대의 중심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대표팀에서의 활약할 당시에 보여준 박병철의 스타일은 이미 이 시절에 완성됐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그 전까지는 완전히 옛날 축구였었죠. 대학 시절에 최은택 선생님을 만나면서 많이 성장했어요. 저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당시 저는 슬로우 스타일이었는데, 최 선생님이 그것을 교정하기 위해 아주 강한 스파르타식 훈련을 시키셨어요. 한양대 숙소가 약수동에 있었는데, 남산 팔각정까지 뛰어 올라갔다오는 훈련이 있었거든요. 다른 선수들은 내리막길에서는 천천히 내려오는데, 저는 풀 스피드로 내려오는 훈련을 했어요. 왜냐하면 내리막길에서 풀 스피드로 내려올 때 잔발로 뛰지 않으면 넘어지거든요.

“또 개인적으로 길을 걸을 때에도 그냥 걷지 않았습니다. 돌멩이 하나하나도 보면서 상대 수비수로 간주하고 페인팅을 쓰곤 했어요. 그런 식으로 훈련하면서 슬로우 스타일을 고쳐나갔습니다.”

“그리고 한양대를 선택한 것도 저에게 잇어서는 좋은 결정이었어요. 당시만 해도 고려대나 연세대의 경우는 대부분이 국가대표 선수들이었거든요. 1학년생은 후보가 될 수밖에 없었죠. 한양대에서는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며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1978년 5월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이탈리아 볼로냐 클럽 초청경기에서의 박병철
1973년, 청소년대표팀과 국가대표팀으로 첫 발을 내딛다.

최은택 감독의 지도 하에 급성장한 박병철은 1973년부터 청소년대표팀과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1973년 이란에서 열린 U-20 아시아선수권에 참가해 3위를 차지한 박병철은 그 해에 국가대표로서도 첫 발을 내딛었다. 1974년에도 태국에서 열린 U-20 아시아선수권에 참가해 역시 3위를 차지했고, 테헤란 아시안게임에 국가대표 선수로서 참가했다.

“사실 호적상으로 1954년생이긴 하지만, 나이가 더 많았어요. 6-25 전쟁 때문에 호적에 몇 년 늦게 올라갔죠. 그 때문에 청소년대표팀에서도 형이었습니다.(웃음) 개인적으로는 74년 방콕 U-20 아시아선수권 3-4위전이 기억나네요. 당시 일본과 경기를 했는데, 발목이 좋지 않은 상태였죠. 0-1로 끌려가고 있던 상황에서 제가 중거리슛으로 동점골을 넣고, 경기 종료를 앞둔 시점에서 일본 선수 2명을 제치고 골을 넣어 2-1 역전승을 거뒀었죠.”

“청소년대표팀에 갔다 온 이후에 바로 국가대표에도 발탁됐어요. 처음 발탁 소식을 들었을 때는 엄청난 부담감을 느꼈죠. 존경하고 있던 선수들과 훈련하고 게임을 뛰는 것이니까요. 그 때만 해도 선배가 하늘이었고, 웬만한 선수들은 슛을 하고 싶어도 실수하면 선배한테 욕 먹을까봐 패스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제 성격이 남에게 기죽고 지내는 스타일은 아니거든요. 그냥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했죠. 소위 ‘깡다구’가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웃음)”

국가대표에 데뷔한 박병철은 단번에 주전 자리를 꿰찼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힘이 넘치고 엄청난 활동량을 자랑한 그는 모든 킥을 도맡아 찰 정도로 킥에 있어서도 일가견이 있었다. 또한 롱 드로인에 아주 능해 30m 이상의 드로인으로 또 하나의 공격옵션을 만들기도 했다.

“대표선수 생활을 하면서 후보로 뛰었던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주전으로 계속 뛰었죠. 또한 프리킥, 코너킥, 페널티킥 등을 모두 찼을 정도로 킥에서 인정을 받았어요. 롱 드로인도 강해서 약 35m 정도 던졌던 것 같군요. 아시아 선수 중에서 가장 멀리 던지지 않았나 싶어요. 황재만이도 비슷하게 던졌던 걸로 기억합니다.”
1979년 광주에서 열린 독일 함부르크 SV와의 경기에서 박병철(13번 선수)
최고의 골로 독일행 제의 받아

국가대표팀에서 꾸준히 활약을 펼치던 박병철은 1975년, 독일 분데스리가 소속의 테니스 보루시아 베를린과의 친선경기를 통해서 해외 진출의 기회를 잡았다. 특히 부산에서 열린 이들과의 3차전에서 일명 ‘바나나킥’으로 불리는 예리하게 꺾이는 슛으로 환상적인 골을 터트렸다. 박병철의 활약에 깊은 인상을 받은 테니스 보루시아 베를린은 스카우트 제의를 했지만, 병역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1-2차전을 마치고, 부산에 가서 마지막 3차전을 치를 준비를 하고 있었죠. 그런데 당시 대표팀 코치였던 김정남 선생님을 통해 스카우트 제의가 왔더군요. 김 선생님이 독일에서 코칭스쿨을 이수하셔서 독일어를 조금 알고 계셨거든요. 테니스 보루시아 관계자가 나를 만나고 싶다고, 스카우트하고 싶다고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독일에 오면 원하는 것을 모두 해주겠다는데 갈 마음이 있냐고 물으시더군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까 필이 제대로 꽂혀서 부산에서의 3차전에서 정말 최고의 플레이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바나나킥을 넣은 거죠.(웃음)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였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독일로 가지는 못했어요. 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지만, 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었습니다. 그 때 독일로 나갔다면 (차)범근이보다도 먼저 분데스리가에 진출하는 것이었는데 아쉽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 무렵에 한국에도 프로축구가 있었다면 정말 더 크게 성장할 선수들이 여럿 있었어요. 저 또한 마찬가지였고요. 아쉬운 부분입니다.”

대표팀에서의 에피소드..무단이탈과 기도 세러머니

오랜 기간 대표팀에서 생활하면서 박병철은 많은 사건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특히 무단이탈사건을 여러 차례 일으켜 감독들을 골치 아프게 했다. 그 무렵의 대표팀은 몇 개월간의 장기합숙은 기본이었고, 선수들의 자유로운 사생활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을 박병철은 견디기 힘들어했다.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을 앞두고도 숙소를 이탈했었고, 그런 것이 몇 차례 있었죠. 간이 컸었어요.(웃음) 이 감독 밑에서는 도저히 못하겠다 싶어서 나온 적도 있었고요. 결국 다시 돌아가긴 했지만 말이에요.(웃음) 그 때는 합숙이 지옥이었어요. 아시안게임 같은 큰 대회가 있으면 태릉선수촌에 갇혀서 1년 전부터 합숙을 시작합니다. 토요일만 외박이 주어지고, 일요일 저녁 7시까지 귀가해야 하죠. 젊고 친구 좋아하는 저에게는 정말 견디기 힘든 순간들이었습니다. 결국 도망쳤지만, 얼마 안 되어서 선배들이 잡으러 와서 같이 돌아가곤 했어요.”

또 한 가지 박병철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추억은 기도 세러머니에 얽힌 사연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차범근이나 이영무 등 독실한 크리스찬들은 골을 넣은 이후에는 항상 기도 세러머니를 펼쳤다. 불교도였던 박병철은 자신도 골을 넣으면 불교식 세러머니를 하겠다고 이들을 놀리며 재미있어했다.

“(이)영무 같은 선수들은 골 넣으면 그 자리에서 기도를 하잖아요. 걔네들에게 ‘야, 골 넣고 그러지 마라. 나도 골 넣으면 나무아미타불을 외치면서 세러머니를 할 거다’ 하고 농담을 하곤 했죠.(웃음) 그런데 범근이나 영무나 너무 법대로인 사람들이라 그런 농담에 대처하지를 못해요. 농담하기 좋아하는 내가 그렇게 놀려도 그냥 웃고 말곤 했죠.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었던 추억들입니다.(웃음)”
1979년 박대통령배 축구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뒤 트로피를 받는 박병철
대표팀 은퇴와 홍콩 진출

1976년 이후 문정식 감독(작고)이 대표팀 사령탑에 오른 이후, 박병철은 대표팀을 사퇴했다. 성격이 강했던 두 사람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박병철이 물러난 것이었다. 그러나 77년 들어와 문정식 감독이 물러나면서 박병철도 다시 대표팀에 복귀하게 됐다.

“제가 성격이 있거든요. 저건 아니다 싶으면 아닌 거예요. 그 분과 사이가 틀어져서 ‘문정식 감독님 밑에서는 대표 안하겠다’ 하고 나온 겁니다. 당시 범근이 못지 않게 저도 팬이 많아서 팬들의 아쉬움도 많았죠. 결국 박대통령컵에서 화랑(1군)과 충무(2군)로 대표팀을 2원화하면서 충무팀에서 뛰었어요. 그 이후에 다시 대표팀에 복귀했죠. 78~79년 무렵에는 스위퍼를 보면서 경기흐름을 조절해주는 역할을 맡곤 했어요.”

1979년에 대표팀에서 은퇴한 박병철은 홍콩으로 진출하게 된다. 한양대 졸업 이후 국민은행과 해군팀을 거쳤던 그는 경남버스 축구팀이 창단되면서 제대하고 입단을 했지만, 1년 만에 팀이 해체되자 미련 없이 홍콩행을 결정했다.

“국민은행에서 다시 오라고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외국에 한 번 나가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79년 12월에 홍콩 해봉팀에 입단했죠. 저 말고도 그 무렵에 이회택, 박이천, 김재한, 변호영 등 많은 한국 선수들이 홍콩에서 뛰었어요. 그런데 홍콩에서 사업을 했던 변호영 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1년 만에 한국으로 들어갔죠. 저는 거기서 5년간 뛰었어요. 당시 홍콩에는 네덜란드나 독일 등의 스타 선수들 중에 은퇴를 앞둔 노장들이 돈 벌려고 와서 뛰곤 했는데, 그들을 상대로 힘 좋고 슈팅 좋은 제가 휘저으니까 모두들 좋아했었죠. 그래서 오래 뛰었습니다.”

럭키금성에서 현역 은퇴

박병철은 5년간의 홍콩 생활을 접고 프로축구가 출범한 한국으로 돌아왔다. 1984년에 럭키금성(현 서울)에서 16경기에 출장했던 그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은퇴했다. 호적상으로는 30세 한창 나이지만, 실제로는 34세의 노장이었던 것이다. 은퇴 후에도 그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느니 식물인간이 됐다느니 하는 괴소문에 휩싸이기도 했다.

“85년에 은퇴하고 그 해 말에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박병철 사망’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나갔어요. 3개월 후에는 식물인간이 됐다는 기사가 나갔고요.(웃음) 은퇴한 이후이고 이야기해봤자 뭐하겠느냐는 마음으로 그냥 놔뒀죠. 그러다가 나중에 저와 친분이 있었던 기영노 기자를 통해서 1주일간 연재 인터뷰를 하면서 살아있다는 것을 밝혔습니다.(웃음)”

은퇴 후 고향 울산의 진하 해수욕장 근처에서 어장을 열어 수산 도소매업을 시작한 그는 지금까지 그 일을 계속 해오고 있다.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지금은 다시 축구계에 뛰어들어 후배들을 양성하고 싶다는 바람도 피력했다.

“가끔 축구장도 찾고, 71학번 동기생들로 구성된 동심회를 통해 조동현, 황재만 등의 친구들도 만나곤 합니다. 특히 동심회 동기생들과는 2달에 1번 정도는 모여 볼을 차곤 하죠. 이제는 저도 나이가 어느 정도 있고, 생활에 여유도 있으니 나와 같은 스타일의 후배들을 키워보고 싶은 마음도 생기더군요. 기회가 되면 후진 양성도 해볼까 합니다.”


인터뷰=이상헌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08년 10월호 '나의 선수 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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