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그 득점왕과 도움왕을 동시에 석권했던 최상국 ⓒ스포탈코리아
K-리그 25년 역사에 있어서 ‘최상국’이란 이름 석자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최상국(47세)은 1987년 포항제철(현 포항) 소속으로 K-리그 득점왕과 도움왕을 동시에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고, 이것은 1985년 피아퐁에 이어 두번째, 국내 선수로는 유일한 기록이기도 하다. 최상국 이후로 아직까지 그 누구도 득점왕과 도움왕을 동시에 차지한 선수는 없다.

포항과 국가대표팀에서 모두 오른쪽 윙으로 활약했던 그는 안정된 볼 컨트롤을 바탕으로 드리블이나 슛, 크로스가 모두 훌륭했다. 특히 수비수를 이용하는 이동 트래핑은 그만의 장점이었다.
1992년 현역에서 은퇴한 최상국은 11년간 청주대 감독으로 재직했고, 2004년부터는 호원대 창단 감독으로 부임해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형제가 모두 축구 선수였던 축구 가족

충북 청주 출신의 최상국은 어렸을 때부터 축구 속에서 살았다. 가족이 스포츠를 좋아했었고, 그 중에서 형들이 모두 축구 선수로 뛰었다. 그 영향을 받은 최상국도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축구를 했고, 3학년부터는 정식으로 축구를 배웠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축구로 이끌었던 형들은 모두 중간에 축구를 포기했고, 최상국만이 끝까지 축구 선수로 활동했다.

“형들의 영향을 받아서 어렸을 때부터 축구를 했죠. 재미있는 것은 어느날 축구공이 머리 위에 있는 꿈을 꾸었는데, 잠에서 깨고 보니 진짜로 그 자리에 축구공이 있는 거예요. 축구가 운명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큰 형이 갖다 놓은 것이었죠.(웃음)”

“고향에서 계속 축구를 하다가 소년체전을 위해서 5학년때 옥천의 죽향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그리고 6학년 때는 소년체전에서 우승했죠. 형들은 초등학교 때까지만 축구를 했고, 제일 오래 했던 큰 형도 대신고에서 축구를 하다가 그만뒀어요. 결국 형들은 끝까지 가지 못했고, 저만 끝까지 간 셈이었죠.(웃음)”

죽향초를 졸업한 최상국은 청주 대성중으로 진학했다. 어렸을 때부터 윙 포지션에서 활약했던 그는 대성중에서 전국대회 우승 두 번, 준우승 한 번, 4강 한 번 등 좋은 성과를 올렸다. 이런 활약을 바탕으로 최상국은 청주상고(현 청주 대성고)로 올라갔다.

“초등학교 때 소년체전 우승했던 멤버들이 대부분 대성중으로 올라왔어요. 멤버들이 좋았고, 결국 3학년 때는 두 번의 전국대회 우승을 비롯해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었죠. 그런데 고교로 올라가면서 많이 헤어졌습니다. 저를 비롯해 몇몇은 청주상고로 올라갔고, 그 밖에 친구들은 다른 학교로 진학했어요. 축구를 그만둔 친구도 있었고요.”

축구를 포기할 뻔 하다.

최상국이 진학한 청주대성고는 이재희, 최순호 등의 쟁쟁한 선배들이 있어 좋은 팀을 구축하고 있었다. 여기에 최상국을 비롯해 정기동, 신상근 등이 가세해 최상의 전력을 뽐냈다. 그러나 좋은 멤버임에도 불구하고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최상국으로서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 부분.

“제가 1학년에 입학할 때 이재희 선배와 최순호 선배가 있었어요. 그 때는 4강까지는 갔었죠. 그런데 우리 때는 유독 8강에서 고배를 많이 마셨죠. 묘하게 남기영을 비롯한 후배들 세대에도 준우승까지 하는 등 좋은 성과를 올렸어요. 우리 때도 멤버가 괜찮았는데 이상하게 거기서 막히더라고요. 그 때문에 친구들도 그렇고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가고 싶었는데 무산되어 많이 실망했던 기억도 납니다.”

대성고를 졸업한 최상국은 청주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이 무렵은 그에게 있어 축구인생이 끝날 수도 있었던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실제로 최상국은 이 시기에 거의 1년 가량 축구를 거의 쉬었을 정도로 방황했다.

“청주대에 입학했는데, 환경이 너무 열악했고, 축구로서의 비전이 보이지 않았어요. 축구선수로서의 내 꿈을 이루기에는 너무 힘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거의 1년 정도 운동을 하지 않았어요. 시합만 있으면 나가서 하는 정도였죠. 제 축구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네요.”
1987년 K-리그에서 럭키금성(현 서울)과 경기를 펼치는 최상국(오른쪽 2번째) ⓒ월간축구
포항제철 입단, 절망에서 희망의 끈을 잡다.

절망의 시기를 보내던 최상국에게 희망이 찾아온 것은 대학 2학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포항제철에서 테스트를 받을 수 있었고, 여기서 눈에 띄어 입단을 했던 것. 최상국은 2학년을 마치자마자 포철 유니폼을 입었고, 호화멤버를 자랑하던 포철에서 새로운 동기부여를 통해 기량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저에게는 정말 인생의 전환점이었어요. 사실 대성고 2학년 시절에 최순호 선배를 보려고 포철에서 연습게임을 요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도 경기를 뛰었는데, 당시만 해도 제가 키가 160cm 정도밖에 되지 않았어요. 워낙 조그마한 체구이다보니 주위 반응이 시원찮았었죠. 대학 들어간 이후에 키가 14cm 이상 크면서 저에게 숨겨져 있던 잠재력이 튀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포철에서도 테스트를 통해 그 점을 봤던 것이고요.”

“이런 것을 보면 포철과는 인연이 있었나 봐요. 내 꿈을 포기할 뻔한 순간에 새로운 기회가 생긴 셈이라서 저도 마음가짐이 달라졌어요. 포철은 저에게는 정말 생각하지도 않았던 거대한 산이었고, 그 팀에 간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었거든요. 그래서 새로운 꿈을 향한 의욕이 불타올랐고,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렇게 포철에 입단한 최상국은 한국프로축구 원년이었던 1983년, 데뷔 시즌에 16경기에 출장해 2골-4도움을 기록했다. 도움 2위의 호성적이었으며, 무엇보다 호화군단이었던 포철에서 신인이 주전 자리를 꿰찼다는 점에서 놀라운 일이었다.

“포철에서 동계훈련을 하면서 많이 성장했어요. 좋은 선수들이 많아서 경쟁이 치열했는데, 처음에는 경기에 뛴다는 생각보다도 포철에 입단한 것 자체로 만족했는데, 한홍기 감독님께서 기회를 많이 주셨습니다. 그 덕분에 대부분의 경기에 나갈 수 있었고,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었죠.(웃음)”
1988년 당시 포철의 김순기 코치(왼쪽)-공격 파트너 조긍연(오른쪽)과 함께 ⓒ월간축구
1987년 최고의 해를 보내다..득점-도움 동시 석권

성공적인 데뷔 시즌을 보낸 최상국은 이후에도 꾸준한 활약을 펼쳤다. 1984년에 23경기에 나와 4골-1도움을 기록한 것을 비롯해 매년 팀의 주전으로서 제 몫을 해냈다. 그리고 1987년, 최상국의 축구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순간이 찾아왔다.

시즌 초부터 호조의 컨디션을 보인 최상국은 득점과 도움 순위에서 선두로 치고 나갔고, 결국 시즌이 종료된 시점에서 30경기에 출장해 15골-8도움으로 득점왕과 도움왕을 동시에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1985년에 태국 출신의 외국인 선수 피아퐁이 득점왕-도움왕을 동시 석권한 이후 2번째였다.

“그 무렵에 결혼을 했는데, 이후로 잘 풀린 것 같습니다.(웃음) 생활이 안정되니까 축구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고, 또 프로 5년차에 접어들면서 뭔가 새로운 의욕도 솟아올랐어요. 감독님도 전폭적인 신뢰를 주셨고요.”

“멤버들도 너무 좋았어요. 최순호 선배를 비롯해 이흥실, 이길용, 윤성효, 유동관, 김상호, 박경훈 등 대단했죠. 전체적으로 팀 수준이 높으니까 저에게도 기회가 많이 왔던 것 같아요. 또한 동료들이 워낙 좋으니까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의욕을 갖고 열심히 할 수 있었죠.”

“특히 이흥실 선수와의 호흡은 최고였어요. 이흥실 선수도 볼을 워낙 잘 차는 선수잖아요. 서로 딱 보면 움직임을 예측하고 연결해줬죠.(웃음) 그리고 최순호 선배는 고교 시절부터 포철, 대표팀에서 같이 뛰면서 호흡을 오래 맞췄죠. 헤딩도 좋고 기술과 센스도 좋아서 제가 올려주는 크로스를 잘 처리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사실 득점과 도움에서 동시에 최고의 자리에 올라선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득점을 많이 올리기 위해서는 골 욕심이 필수적이고, 반대로 도움을 올리기 위해서는 동료를 먼저 생각하는 이타심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득점-도움왕 석권은 힘든 일이고, 실제로 피아퐁과 최상국 이후 단 1명도 나오지 않았다.

“원래 저에게 마크가 들어오면 동료를 이용하는 플레이를 많이 했기 때문에 도움 기록에서는 조금 여유가 있었죠. 그런데 득점에서는 유공의 노수진, 동료인 이흥실 선수와 경쟁을 했어요. 노수진 선수와 치열하게 경쟁하다가 마지막에 제가 3골을 더 넣으면서 따돌릴 수 있었죠. 마지막 경기에서는 페널티킥 기회가 왔을 때 이흥실 선수에게 양보를 했어요. 저는 이미 득점왕이 결정된 상태에서 이흥실 선수가 2위권이었거든요. 결국 그 골을 넣고 12골이 됐지만, 경기수에서 밀려 노수진 선수가 실버슈, 이흥실 선수가 브론즈슈를 받았습니다.(웃음)”
국가대표팀에 선발된 최상국 ⓒ월간축구
대표팀에서의 최상국

K-리그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최상국은 대표팀에서도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청소년대표팀 경력이 전혀 없었던 최상국은 포철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1983년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를 앞두고 처음으로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다.

“처음 대표팀에 들어갔을 때가 만 22세였어요. 국가대표는 처음이었는데, 꿈이 실현되었다는 느낌이었죠.(웃음) 사실 모든 축구 선수들의 꿈이 대표팀에 들어가는 거잖아요. 그 때는 포철에 간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는데, 국가대표까지 가니까 정말 영광스러웠죠.”

“당시 박창선, 허정무, 조영증, 박성화, 이강조, 조광래 등의 대선배님들이 계셨고, 저는 막내뻘이었죠. 그래도 성격상 주눅이 들지는 않았었고, 선배들도 모두 좋아서 힘든 점은 없었어요.”

그리고 1984년 10월 4일, 최상국은 카메룬과의 잠실 올림픽 스타디움 개장기념 경기를 통해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주목을 받았다. 당시 한국은 최상국의 해트트릭과 박창선, 변병주의 골로 카메룬을 5-0으로 대파했다.

“대표 선수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인데, 카메룬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죠.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일 겁니다. 이후 월드컵 예선도 뛰고, 올림픽도 뛰었지만 해트트릭을 기록하지는 못했죠. 2골은 넣은 경기가 있었지만 말입니다.”

이후에도 대표팀에 꾸준히 승선했던 최상국이지만, 선배들의 그늘에 가려 크게 빛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86 멕시코 월드컵이 끝난 뒤, 대표팀이 본격적인 세대교체를 시작하면서 최상국에게도 많은 기회가 찾아왔다. 포철에서와 같이 오른쪽 윙으로 활약한 그는 김주성, 변병주, 최순호 등과 전방에서 호흡을 맞추며 대표팀에서도 전성기를 구가했다.

“아무래도 86 멕시코 월드컵이 끝난 뒤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젊은 세대들이 주축으로 올라섰죠. 저보다 2살 많은 이태호, 정해원 선배가 최고참이었으니까요.”

“대표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도 그 무렵에 나왔어요. 86년인지 87년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대통령배 대회 미국전이었어요. 상대가 공격을 하면서 수비지역으로 넘어가려던 찰나에 정용환 선수가 인터셉트를 했고, 볼이 공중으로 붕 떴어요. 그것을 보고 돌아서면서 바로 슛으로 연결했죠. 40m 정도 됐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대로 골이 되버렸어요.(웃음) 가장 기억에 남는 골이었죠.”
88 서울올림픽 미국전 라인업(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정용환-최순호-김주성-조민국-최윤겸-조병득-구상범-박경훈-최강희-최상국-변병주) ⓒ월간축구
그리고 88 서울 올림픽을 통해서도 최상국은 주전 선수로서 자신의 플레이를 마음껏 보여줬다. 87년 K-리그에서 득점왕-도움왕을 차지하며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최상국은 대표팀에서도 자신감 있는 플레이를 보여줬고, 서울 올림픽에서도 3경기에 모두 출전했다. 첫 경기였던 소련전에서는 교체 멤버로 뛰었지만, 이후 미국과 아르헨티나전에서는 풀타임을 소화했다. 그러나 한국은 2무 1패의 성적으로 조 예선 통과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소련전에서는 전반 20분 이후에 출전했고, 이후에는 주전이었어요. 우승후보였던 소련과 0-0으로 비기면서 출발이 좋았는데, 미국과의 2차전에서 0-0으로 비기고 말았어요. 후반에 저에게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 슛이 골대를 맞고 나왔죠. 아르헨티나와의 3차전에서도 1-2로 지던 후반 막판에 헤딩슛을 한 것이 골대를 살짝 넘어갔어요. 너무나 아쉬운 장면들이었죠.”

“한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이고 해서 정말 준비를 열심히 했는데, 아쉽게 예선 탈락하다보니 너무 허무하더군요. 이것이 한국축구의 현실인가라는 생각도 들었고...”

88 서울 올림픽에서 아쉬움을 맛본 최상국은 90 이탈리아 월드컵에 다시 도전했다. 86 멕시코월드컵 당시 예선까지만 뽑히고 막상 멕시코행에 실패했기에 이번에는 꼭 가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이탈리아행 역시 쉽지 않았다. 월드컵 예선에서는 대표팀에 선발되었던 그였지만, 결국 월드컵 본선 최종명단에서는 탈락했다.

“월드컵 예선에서는 대표팀에 선발됐으니까 아쉬움이 더 크죠. 어쩌면 제 성격이 너무 직선적이고 자존심이 강했던 것도 문제였던 것 같아요. 경기에 나가지 못하면 나에게도 기회를 달라고 말하기도 했으니까요.(웃음) 경기를 뛰어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강했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월드컵에 꼭 한번 나가보고 싶었는데, 아쉬웠습니다.”

1991년을 마지막으로 현역 은퇴, 지도자의 길로 들어서다.

1991년을 끝으로 최상국은 현역에서 은퇴했다. K리그 9시즌 동안 통산 158경기 출전 32골을 기록한 상태였다. 당시 나이 30세로 아직 충분히 뛸 수 있는 나이였지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다. 코칭스태프와 의견이 맞지 않은 것도 있었고, 결국 여러 상황이 겹치면서 유니폼을 벗었다.

“뭐 나쁘게 말하면 제 실력이 떨어졌던 것이고, 다른 관점에서 말하면 의견충돌이 조금 있었던 거죠. 사실 그 나이 정도면 노련미가 붙어서 정말 축구를 알고 할 수 있는 나이였는데, 주위 여건이 좋지 않았어요. 구단과 이야기하고 내가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그만두겠다고 했습니다. 다른 팀에서 뛸까도 생각했는데, 여기서 인정을 못 받는데 다른 팀에서는 인정받겠냐고 혼자 생각하고 포기했어요.”

“그 때 포철의 핵심이었던 선수들이 비슷한 처지였어요. 정기동도 나와 같이 은퇴하고, 이흥실은 1년 더 뛰고 은퇴하고, 조긍연도 현대로 이적한 뒤에 92년에 은퇴했죠.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에요.”

현역에서 은퇴한 최상국은 곧바로 모교인 청주대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2003년까지 11년간 청주대 감독으로 재직했다.

“지도자보다는 교수의 꿈이 있어서 청주대에 복학했어요. 복학하는 조건으로 청주대 축구부도 맡았죠. 대학 졸업장을 딴 뒤에는 대학원에 진학해서 박사 코스를 밟고 있어요. 그리고 고향인 제천에 축구교실도 만들었죠. 나름대로 많은 인생공부를 했던 것 같습니다.”

청주대에서 11년간 머문 최상국은 2004년부터는 신생팀 호원대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청주대에 비해 여러 면에서 지원이 좋다고 밝힌 최상국은 호원대를 좀 더 높은 수준의 팀으로 끌어올리는 것과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축구학과 창설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지도하다보니까 욕심도 생기고 좋은 성과도 올려보고 싶더군요. 마침 호원대에서 좀 더 좋은 여건을 약속했고, 확실히 재정적인 면이나 여러 면에서 이전보다는 만족스럽습니다. 아직까지 좋은 성과를 올리지는 못했지만 팀으로써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일단 목표는 호원대가 좀 더 좋은 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인 목표는 축구학과를 개설하고 교수로서 새로운 길을 가보고 싶습니다. 그 길을 위해 준비 중인 단계죠.”


인터뷰=이상헌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08년 8월호 '나의 선수 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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