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를 대표했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인 김용세 ⓒ스포탈코리아
프로축구가 처음으로 시작됐던 1983년부터 활약했던 김용세(48세)는 80년대 장신 스트라이커를 꼽을 때 단연 첫 손에 꼽히는 선수였다. 192cm의 큰 키를 자랑했던 그는 다양한 무기를 갖고 있는 스트라이커였다. 큰 키를 이용한 제공권은 물론이고, 장신임에도 순간 동작이 빠른 편이었다. 또한 페널티 박스 내에서의 슛도 강하고 정확했다.

이런 강점을 활용해 그는 1991년 은퇴할 때까지 K-리그에서 총 165경기에 출장해 53골-18도움을 기록했고, K-리그 최초로 개인 통산 50골을 돌파했던 선수로 기록에 남아 있기도 하다.

축구를 좋아했던 파주 소년

김용세의 고향은 경기도 파주다.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 지금까지 여전히 파주에서 살고 있을 정도로 고향에 대한 그의 애정은 남다르다. 파주는 최근 들어 국가대표팀 트레이닝 센터(파주 NFC)로 인해 축구의 요람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이전부터 축구 열기가 대단했다. 김용세 역시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축구를 시작했다.

“제가 어렸을 때도 파주는 축구 열기가 엄청났던 곳이에요. 자연스럽게 저도 축구를 하게 됐죠. 파주 연풍초 4학년 때였는데, 워낙 축구 열기가 있어서인지 부모님의 반대도 특별히 없었습니다. 아쉽게도 얼마 전에 학생수가 너무 적어서 연풍초 축구부가 해산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김용세는 어렸을 때부터 키가 무척 컸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에는 159cm였고, 이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신장이었다. 이후에도 그는 매년 5cm씩 크며, 키 큰 축구선수로서 관심을 모았다. 파주 연풍초와 파주중을 졸업한 김용세는 중학교를 1년 더 다니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축구 명문인 중동고로 진학했다. 파주에서 자란 그로서는 서울 입성이었던 셈이다.

“파주중을 졸업하는 시점에 중동고에서 저를 괜찮게 봤던 겁니다. 그래서 스카웃 제의가 왔었는데, 테스트 기간이 있어서 중동중에서 1년을 더 다녀야 했어요. 그런 뒤에 중동고에서 축구를 할 수 있었죠. 파주에서 계속 자라다가 서울로 혼자 나가야 해서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그렇지만 중동고는 그 무렵 전국무대에서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했고, 김용세는 고교대회 우승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 채 졸업을 해야 했다. 한일교류전에서 최우수선수상을 받은 것이 이 시절에 그가 받았던 거의 유일한 상이었다.

가정 형편으로 대학이 아닌 실업팀 선택

중동고를 졸업한 김용세에게 여러 대학팀들이 스카웃 제의를 했다. 김용세의 탁월한 신체조건과 득점감각은 그들에게 있어 큰 매력이었던 것. 그러나 김용세의 선택은 실업팀이었다. 대학에 대한 미련도 없지는 않았지만, 빨리 돈을 벌어야한다는 생각이 당시 김용세를 사로잡고 있었다.

“가정 형편도 좋지 않고 해서 일찍부터 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중동고를 졸업하고 자동차보험(현 동부) 팀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감독님께서 한국전력을 권유하셔서 거기에 입단하게 됐죠. 당시가 1979년이었습니다.”

그 해에 김용세에게는 또 하나의 경사가 있었다. 일본에서 열렸던 U-20 월드컵 참가가 바로 그것이었다. 중동고를 졸업하고 한국전력에 입단한 김용세는 이 해에 처음으로 청소년대표팀에 소집되었고, 곧바로 세계 무대를 경험하게 되었다. 디에고 마라도나의 등장으로 회자되고 있는 이 대회에서 한국은 파라과이에게 0-3으로 패한 뒤, 이태호의 결승골로 캐나다에 1-0으로 승리했다. 그리고 마지막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0-0 무승부를 기록, 포르투갈과 1승 1무 1패 동률을 이뤘다. 그러나 골득실에서 포르투갈에 1점이 뒤져 아쉽게 조 3위로 8강 진출이 무산됐다.

“첫 경기였던 파라과이전을 너무 무기력하게 졌어요. 아무래도 국제대회가 처음이다보니 그런 것이었죠. 당시 최순호나 황석근이 공격의 주축이었고, 이태호, 이길용, 이상용, 정용환, 김석원, 박윤기 등 좋은 선수들이 많았습니다. 저로서는 첫 해외 원정이라 정신없이 보냈던 것 같아요. 대회를 치른 일본 운동장의 잔디가 너무 좋았던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웃음)”
1984년에 K리그 브론즈슈 상을 받은 김용세 ⓒ월간축구
한국 프로축구의 역사와 함께 하다.

한국전력에서 1년을 지낸 뒤, 육군 팀에 들어간 김용세는 복무 기간이 끝난 1982년에 프로 팀인 유공(현 제주)과 입단 계약을 맺고 프로선수로서 생활을 시작했다. 1983년 시작한 슈퍼리그는 그와 한국프로축구에 있어 모두 뜻 깊은 무대였다.

“프로에 입단하면서 매일 매일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뛰었어요. 훈련이든, 경기든 상관없이, 결과도 생각하지 않고 정말 정열적으로 플레이했죠.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길은 그것 밖에 없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 멤버들이 호락호락하지 않았거든요. 황석근, 김창호와 같이 입단했고, 84년에는 대학 최고 스트라이커였던 노인호가 들어왔어요. 그리고 85년에는 은행 최고의 골잡이였던 이상용(현 K리그 심판)이 들어왔고...(웃음) 치열한 프로세계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은퇴 후에 축구계를 떠났던 것도 이렇게 치열한 경쟁세계에 질린 탓도 있었죠.”

본인은 힘든 경쟁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유공에서 이뤄놓은 김용세의 업적은 대단하다. 프로축구 원년인 1983년에 16경기 출장에 2골-4도움을 기록했던 그는 이듬해인 84년에는 14골을 폭발시키며 득점 3위에 올랐다. 당시 백종철(현대)이 16골로 득점왕을 차지했고, 최순호(포철, 경기수 적어 2위)와 그가 14골로 그 뒤를 이었다.

1985년은 김용세에게 있어 최고의 한 해였다. 21경기에 출전한 김용세는 12골을 터트리며 적어도 2경기당 1골씩은 뽑아내는 폭발적인 득점감각을 뽐냈다. 충분히 득점왕을 노려볼 수 있는 페이스였고, 태국의 골잡이 피아퐁(럭키금성)만이 그의 경쟁자였다. 시즌을 마치고, 그와 피아퐁은 모두 12골이었다. 경기수도 21경기로 똑같았다. 결국 논란이 일었고, 결론은 출전시간이 적은 피아퐁의 득점왕 등극이었다.

“솔직히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당시 규정에는 출전시간까지 적용한다는 이야기가 없었거든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들려오기도 했고요. 뭐 그래도 큰 아쉬움은 없어요. K-리그 베스트11도 여러 번 수상했고, 실버슈나 브론즈슈 등 다양한 상을 받아봤기 때문에 만족합니다.”

그 이듬 해인 1986년 역시 김용세는 맹활약을 펼친다. 월드컵대표팀 차출로 인해 13경기밖에 뛰지 못했지만, 6골-7도움을 기록해 득점 뿐 아니라 도움 능력에서도 탁월하다는 것을 알렸다.
86 멕시코 월드컵 아르헨티나전에 나선 김용세(왼쪽에서 두번째) ⓒ월간축구
잊지 못할 86 멕시코 월드컵

김용세가 국가대표팀에 처음 선발된 것은 1984년이었다. K-리그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대표팀에 선발된 그는 86 멕시코 월드컵을 준비하는 팀의 일원이 되었고, 결국 멕시코 땅을 밟았다. 당시 한국의 첫 경기는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였고, 그 경기를 통해 김용세는 세계의 벽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와의 이 경기는 김용세의 기억 속에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는 경기이기도 하다.

“그 당시 대표팀은 멤버가 정말 화려했어요. 순호와는 79년 청소년대표팀 시절부터 함께 했는데, 항상 저보다 앞서 있었죠. 그리고 멕시코월드컵에는 (차)범근이 형이 합류했고요. 그래서 저는 아르헨티나전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선발출장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허무한데, 얼떨결에 무너져서 세 골을 내주고 말았죠. 특히 두번째 골의 경우 제가 막을 수 있었던 볼인데 놓쳐서 더욱 아쉬웠어요.”

“그래도 그 대회를 통해 안목을 많이 넓혔습니다. 일단 마라도나는 내 축구인생에서 가장 인상적인 선수였습니다. 도저히 막을 수가 없는 존재였죠. 김평석, 허정무, 그 외의 모든 선수들이 그에게 덤벼들었지만 속수무책이었어요. 정말 절대적인 선수였습니다. 그리고 범근이 형처럼 힘 좋고 빠른 선수도 못봤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프로선수로서 어떻게 자신을 관리해야 하는지를 보여줬기에 배울 점이 많은 선배였죠.”

이후 불가리아와 이탈리아전에는 출전하지 못했기에 아르헨티나전은 김용세에게 있어 유일한 월드컵 무대 경험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대회 기간중 세계적인 주간지 뉴스위크 아시아판 표지에 김용세와 아르헨티나 선수가 볼 경합을 하는 사진이 실려서 그를 다시 한번 유명하게 만들기도 했다는 점이다.
1989년 5월 한일 정기전에 출전한 김용세(뒷줄 왼쪽에서 세번째) ⓒ월간축구
K-리그 최초의 FA 선수로 일화 이적

86 멕시코 월드컵을 마치고 돌아온 김용세는 87년에 슬럼프를 겪었다. 18경기에 나서 1골-2도움에 그치며 많은 비난을 들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코칭스태프와의 불화-연봉 삭감 등의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났다. 결국 유공에서 마음이 떠난 김용세는 1989년, K-리그 최초의 자유계약(FA) 선수로 일화(현 성남)로 이적한다.

“1983년에 슈퍼리그가 창단됐는데, 당시에는 할렐루야와 유공만이 프로팀이었어요. 대우와 포철 등은 84년부터 프로팀이 되었죠. 당시에는 6년이 지나면 아무 조건 없이 FA로 풀릴 수 있었는데, 83년 유공에서 뛰었던 18명 중 저만 남아 있었어요. 당시 유공에서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긴 했지만, 박종환 감독님과의 약속도 있고, 유공에 섭섭했던 점도 있고 해서 일화로 옮겼습니다. 그래서 제가 K-리그 1호 FA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겁니다.(웃음)”

일화로 옮긴 첫 해에 김용세는 21경기에서 6골을 기록했고, 이듬 해인 1990년에는 24경기에서 7골-1도움을 기록했다. 고참이었던 그는 유공에 이어 일화에서도 주장을 맡으며 팀의 리더로서의 역할에도 힘썼다. 그러나 리더로서의 역할이 어찌 보면 그의 은퇴를 앞당기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당시 박종환 감독은 ‘호랑이 감독’이라는 소문답게 스파르타식 조련을 했고, 여기에 김용세는 후배들을 위해 반기를 들었던 것.

“일화에서 3년 있다가 은퇴했는데, 단장님까지 나서는 등 주위에서는 모두 말렸죠. 그렇지만 선배로서 제가 해야할 일들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원만하게 해야 하는 부분도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아마 제가 지도자였어도 용서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됐을텐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박종환 감독님과는 이후에 만나서 서로 쌓였던 것들을 모두 털어냈습니다.”
인터뷰 중인 김용세 ⓒ스포탈코리아
김용세를 괴롭혔던 수비수들

현역 시절 김용세는 가장 막기 힘든 공격수 중 하나였다. 높이와 세기를 갖춘 스트라이커였기 때문. 그러나 반대로 김용세가 껄끄러워했던 수비수들도 존재한다. 그가 첫 손에 꼽는 선수는 바로 최경식(현 KBS 해설위원). 최경식을 언급하면서 그는 미안함도 느낀다고 했다.

“예전 스토퍼들은 과격하고 거칠었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어요.(웃음) 가장 아쉬웠던 것은 동료였던 최경식입니다. 당시 아주 촉망받는 선수였는데, 연습게임 도중 저와 공중볼을 다퉜어요. 그 과정에서 저는 기절했고, 최경식은 무릎을 다쳤죠. 결국 은퇴해야 했습니다. 너무 마음이 안 좋았어요.”

“그리고 최기봉(현 FC 서울 강화부장) 역시 한국전력 시절부터 함께였는데, 아주 끈적끈적한 수비수였습니다. 같은 팀이었다는 게 다행스러울 정도였죠.(웃음)”

“또 하나 기억나는 것이 84년 챔피언결정전 대우와의 경기에서 강신우(현 KFA 이사) 선수와 맞대결을 펼쳤던 겁니다. 그 당시 강신우가 내 전담마크맨이었는데, 경합 과정에서 제 이빨을 부러뜨렸고, 강신우 선수는 턱이 부러졌어요.(웃음) 정말 치열했던 경기였죠. 나중에 서면으로 화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공격수라면 페널티 박스에서 논스톱으로 처리해야

마지막으로 김용세는 후배 공격수들에게 조언을 했다. 현역 시절 큰 키에도 불구하고 날카로운 골 감각을 자랑했던 그는 슈팅 기회에서의 논스톱 처리를 최우선 과제로 꼽았다.

“페널티 박스 안에서 공격수에게 기회가 왔을 때 볼을 잡는 것은 이해가 안 됩니다. 그 타이밍에서 논스톱으로 처리할 줄 알아야 골키퍼를 이길 수 있어요. 훈련 과정에서 여러 각도에서 오는 볼을 바로 처리하는 슈팅훈련을 많이 해야 합니다. 거의 본능적으로 논스톱 슛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훈련이 필요해요. 일단 페널티 박스 안에서 볼을 잡으면 수비에게 템포를 빼앗긴다고 생각해요.”

1992년에 은퇴한 김용세는 이후에 축구계와는 거리를 둔 채 생활했다. 이태호(현 신한고 감독)를 비롯해 옛 친구들의 부탁으로 잠깐씩 선수 지도를 한 적은 있지만, 본격적인 지도자 생활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다시 축구계에 복귀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은퇴한 뒤에 지도자 제의도 많았어요. 그러나 은퇴할 때 축구는 다시 하지 않겠다고 했죠. 이후에 친구들이 지도자를 하라고 권유했지만, 내 자신과 약속한 부분이 있었기에 사양했었습니다. 이제 세월도 어느 정도 흘렀고, 만약 좋은 기회가 온다면 다시 축구계로 뛰어들 생각도 있습니다.”


인터뷰=이상헌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08년 7월호 '나의 선수 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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