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반 명성을 떨쳤던 남대식 ⓒ스포탈코리아
‘남대식’이라는 이름은 축구팬들에게 선수로서보다는 지도자로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남대식은 1980년대 중반부터 고려대 감독으로서 홍명보, 서정원, 노정윤, 이임생 등 수많은 스타 플레이어들을 지도했고, 1991년에는 남북 청소년 단일팀의 코치로 U-20 월드컵에 참가해 8강을 달성하는 등 지도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올드 축구팬들이라면 축구선수로서의 남대식에 대해서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비록 대표팀의 주축 멤버로 활약하지는 못했지만, 1970년대 초반 꾸준히 대표팀에 선발되었던 그는 개인기가 탁월한 선수였다. 신체조건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기술로 만회했고, 특히 상대 수비수를 속이는 페이크 동작은 단연 최고였다는 평가다. 남대식 스스로도 “수비수들이 내 페이크에 거의 속았었다”며 과거를 회상하기도 했다.

채금석 선생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축구 시작

남대식이 처음 축구를 시작한 것은 전북 군산의 군산남중 2학년 때부터였다. 군산중앙초를 다녔던 남대식은 축구부가 없어 반대항 축구대회에 참가하는 정도의, 즉 취미로 축구를 하는 수준이었다. 군산남중 역시 축구부가 없었기에 그는 반대항 축구대회에서 자신의 실력을 뽐냈고, 이것이 우연히 채금석 선생의 눈에 띄었다.

채금석 선생은 전북 축구의 대부(代父)로 현 금석배 초.중.고 대회 역시 채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대회다. 채금석 선생은 그 지역의 유망주들을 데려다가 훈련을 시켰다. 요즘으로 따지면 일종의 지역 유소년 상비군이라 할 수 있겠다.

“군산에는 축구팀이 없어서 반대항 축구 정도로 만족해야 했어요. 그런데 우연히 제 경기를 본 채금석 선생님이 가능성이 있다며 발탁하신 거죠.”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한 남대식이었지만, 곧 장벽에 부딪쳤다. 신체조건이 왜소했던 탓에 채금석 선생이 축구로는 힘들겠다는 판단을 내린 것. 남대식은 좌절했지만,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주위의 추천을 받아 동북중으로 전학을 가서 계속 축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채금석 선생님이 모은 유망주들 틈에서 훈련을 했는데, 거기서 잘하는 선수들은 한양공고로 올라갔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선생님이 저를 부르시더니 축구를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는거에요. 이유를 묻자 신체적으로 너무 왜소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훈련멤버에서 빠지게 됐어요. 그런데 당시 동북고를 다니고 있던 백영식 씨(현 군산축구협회장)가 제가 쓸만 하다고 생각했는지 서울로 올라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동북중으로 전학을 갔습니다.”

동북중에서 3학년을 1년 더 다닌 남대식은 동북고로 진학했고, 축구선수로서 급속도로 성장했다. 낯선 서울생활의 어려움은 분명 있었지만, 축구로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냈다. 그리고 1969년에는 청소년대표팀에도 발탁되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사실 서울로 올라와서 힘든 생활을 했어요. 학교에 숙소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동기 4명과 자취생활을 했죠. 동북고에 올라가서는 학교에서 밥해줄 사람이 없으니까 하숙집을 마련해줘서 거기서 밥을 먹고, 잠은 학교 숙소에서 잤죠. 그런 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먹고 잘 수 있는 것 만으로도 행복한 시절이었어요.(웃음)”

“우리 축구인들이 그때는 다 그렇게 살아왔던 것 같아요. 환경이나 몸 건강 상태나 모든 것이 힘들었지만, 목표가 뚜렷했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었죠. 요즘 세대는 환경이 좋다 보니까 중간에 나태해지고 좌절하는 경우도 있는데, 당시는 목표가 뚜렷했어요. 축구만이 살 수 있는 길이었죠. 저만 해도 남들보다 두배는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덕분에 꿈에 그리던 청소년대표팀에도 선발될 수 있었죠.”

청소년대표팀의 일원으로 U-19 아시아선수권 참가

1969년, 청소년대표팀에 처음 선발된 남대식은 그 해 태국에서 열린 U-19 아시아선수권에 참가하게 됐다. 처음 참가하는 해외 원정이었고, 첫 국제대회였던 탓에 남대식은 경기 자체보다 환경에 적응하는데 더 신경을 써야 했다. 이것은 비단 남대식 뿐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처럼 어린 나이에도 많은 국제경험을 가질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청소년 대표팀은 장운수 감독님(대우 창단감독, 타계)이 맡으셨죠. 외국은 처음 나가보는 건데, 음식이나 기후 등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 정말 힘들었어요. 그 당시만 해도 외국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던 시절이었잖아요. 특히 음식은 정말 안 맞더군요. 그래서 가져갔던 김치, 고추장 등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녁에 식당에 가서 라면 끓여먹고 고추장 먹고 그랬죠.(웃음)”

결국 이러한 환경적응실패는 성적으로도 이어졌다. 한국은 조별 리그를 통과하는데는 성공했지만, 8강에서 이란에게 패하며 4강 진출에 실패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뛰니까 체력적으로도 문제가 있었어요. 거기에다가 상대에 대한 정보도 없었고, 이란이 아시아에서 강팀이기도 했죠. 이란전에서 경기내용은 대등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골 결정력이 부족했죠. 한국에 있을 때 맨땅에서만 훈련하다가 처음으로 남방 잔디를 밟게 되니까 적응이 안 되더군요. 잔디 때문에 공이 항상 떠 있는 상태인데, 맨땅에서 하던 대로 차니까 자꾸 볼이 뜰 수밖에 없었어요. 습관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하루아침에 바뀌지도 않잖아요. 지금이야 환경도 좋아졌고, 경험도 많이 쌓였으니까 선수들이 그런 것 때문에 힘들어하지는 않죠.”
고려대 선수로 활약하던 때(뒷줄 오른쪽에서 네번째)
잊지 못할 고려대 시절

1969년 동북고를 졸업한 남대식은 곧바로 대학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는 명성이 자자한 양지팀에 입단했다가 제일은행으로 팀을 옮겼다. 그렇게 1년을 지낸 뒤에 고려대에 입학했다. 남대식을 잡기 위해 연세대에서도 달려들었지만, 고려대가 더 적극적이었다.

“원래 대학을 가려고 했는데, 예비고사가 생기는 바람에 가지 못했어요. 그래서 양지팀에 입단했다가 제일은행에서 뛰었는데, 1년이 지나고 고려대와 연세대에서 입학 제의가 들어왔죠.”

“사실 고민을 했어요.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은행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동북고 선배 중에 이성철 선배(현 제주축구협회장)가 있었는데, 고려대 측의 지시를 받고 아주 적극적으로 권유를 하더군요. 부모님들도 대학을 가라고 하셨고...”

당시 남대식과 입학 동기가 바로 이차만(전 대우 감독, 현 부경고 감독)이었고, 고재욱과 차범근이 2년 후배였다. 여기에 황재만 등의 선수들이 포진되어 있어 준 국가대표팀이나 다름없었다.

“장원직 감독님(현 KFA 부회장)이 지도를 하셨는데, 그 무렵부터 고려대 축구가 다시 강호로 부상하기 시작할 때였어요. 원래 제가 미드필더인데, 고려대에서는 주로 스트라이커로 많이 뛰었습니다.”

고려대 시절은 회상하던 남대식은 이 시기에 가장 만족스럽게 축구를 했었노라고 고백한다. 축구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시기였다는 말이다.

“정말 재미있게 축구를 했었습니다. 이차만이나 차범근 같은 선수와는 눈빛만으로도 통할 정도로 호흡이 좋았어요. 차범근 감독의 경우에는 독일 가기 전에 저에게 개인기를 많이 배우기도 했죠. 제가 개인기는 좋았거든요.(웃음) 차 감독이 대단한 것은 항상 배우려는 자세를 갖고 있다는 거였어요. 다른 사람의 장점을 습득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죠.”

“재미있는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고려대나 연세대 선수들에게는 정기전만큼 비중 있는 경기가 없었어요. 제가 고려대에 입학하기 전에 축구에서는 연세대에게 많이 졌던 모양이에요. 1학년 때였는데, 이틀 뒤에는 대표팀이 킹스컵에 출전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정기전이라 나갈 수밖에 없었죠.”

“그리고 제가 3번째 골을 넣으면서 고려대가 3-0으로 이겼습니다. 그 경기에서 다리를 다쳤는데, 꼭 이겨야한다는 신념 때문에 계속 뛰었죠. 결국 정기전은 이겼지만, 부상으로 킹스컵에서는 경기를 뛰지 못했어요.(웃음) 지금도 정기전은 많은 기억이 납니다. 선수 시절에는 중간에 중지가 되어서 두번밖에 못했는데 모두 이겼고, 고려대 감독이 된 이후에도 6년 연속 이겼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개인적으로는 고려대 1~2학년 시절이 가장 만족스런 시기였어요. 그리고 대학 졸업하고 3년 정도까지는 선수로서의 의욕도 높았고, 하려고 하는 의지도 강했었죠. 그런데 그 시기가 지나고 나니 축구 자체를 조금 등한시했던 면이 있었어요. 당시에는 프로가 없었으니까 실업에서 적당히 하고, 은퇴 후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자는 생각이 강했었던 겁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후회가 되죠.”
1970년 국가대표팀 청룡시절(뒷줄 오른쪽 세번째)
아쉬움이 남는 대표팀

청소년대표팀과 고려대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남대식은 1970년에 처음 국가대표팀에 발탁됐다. 그의 나이 22세였다. 그러나 대표팀 생활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 이회택을 비롯해 이름만 들어도 주눅이 들 만한 대선배들이 버티고 있었고, 이차만, 차범근, 황재만 등의 후배들이 무섭게 치고 올라왔다.

“만 22세에 뽑혔으니까 일찍 뽑힌 셈이었죠. 그런데 대표팀에 들어가서는 몸이 좋지 않았어요. 장거리 비행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외국 음식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음식을 많이 가려서 스테이크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고 그랬어요. 체력이 안 되니까 경쟁에서도 밀렸죠.”

“우리가 중간 세대였는데, 선배들이 쟁쟁했고, 이차만이나 차범근 등 후배들이 올라오는 상황이었어요. 우리 세대가 그렇게 큰 활약은 못했다고 볼 수 있죠. 더군다나 당시에는 선배 한 마디가 곧 법인데, 서로 공을 달라고 하면 누구한테 줄지 난감했죠. 그 때는 차라리 게임에 안나가는 것이 더 편하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어요.(웃음)”

특히 이회택은 남대식에게 있어서는 큰 벽이었다. 일부에서는 ‘이회택이 버티고 있어 남대식이 대표팀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고도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남대식은 “물론 이회택 선배가 대단한 스트라이커였죠. 동북고 선배이기도 한데, 저와는 공 차는 스타일이 달랐어요. 저는 스트라이커도 보고, 미드필더도 봤기 때문에 꼭 이회택 선배 때문에 경기에 나서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라고 밝혔다.

“그 당시 대표팀 멤버들은 정말 화려했어요. 이회택, 김호, 김기복, 이세연, 김정남에다가 이차만, 차범근, 황재만 등이 올라오면서 몸도 아팠던 저는 대표팀에서 탈락하게 됐죠. 당시에는 청룡이 대표 1군, 백호가 대표 2군이었는데, 1년 정도 청룡에서 뛰면서 남미원정에도 다녀오고 했어요. 그 이후에는 주로 백호에서 뛰면서 메르데카컵 등에 출전했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선배들이 현 시대에 태어났다면 정말 대단한 인기를 얻었을 거라고 봐요. 워낙 개개인이 특징 있는 선수들이었고, 개성이 강했거든요. 지금 선수들은 고른 기량을 갖고는 있지만, 자기만의 특징이 별로 없잖아요. 뭔가 어필할 수 있는 자신만의 무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면이 부족합니다. 그 분들은 시대를 잘못 타고 난 것 같아요.”
고려대 감독으로 재직하던 때 모습
은퇴, 그리고 지도자로서의 성공

고려대를 졸업한 후에 국민은행에서 활약하던 남대식은 1977년에 29세의 나이로 현역생활을 마감한다. 은퇴하기에는 다소 이른 나이이기는 하지만, 선수로서의 동기부여가 될 만한 것을 찾지 못했던 남대식은 은행원으로서의 삶에 도전한 것이다.

“지금이야 프로무대가 있으니까 자기 몸 관리 확실히 해서 가능한 오랜 기간 선수생활을 해서 돈을 버는 것이 좋지만, 당시만 해도 목적의식이 없었어요. 빨리 은행 업무를 배워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은행원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던 남대식은 1984년, 모교인 고려대로부터 감독 제의를 받았다. 전임 이차만 감독이 대우 로얄즈(현 부산) 사령탑으로 가면서 감독 자리에 공백이 생겼던 것이다.

“서울 남대문 지점에서 대리로 열심히 근무하고 있었죠.(웃음) 고려대 감독 제의를 받았을 때도 은행을 그만두지 못해서 겸직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학교 측에 요청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졌어요. 한 동안 겸직을 하면서 생활했는데, 김종부 파동이 터지면서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하는 상황이 됐어요. 결국 내가 좋아하는 것이 축구이고, 지금까지 해왔던 거라 은행을 사직하고 지도자로서만 전념했죠.”

고려대에서 성공적인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남대식은 1996년까지 13년간 고려대를 지휘했다. 이후 KFA에서 기술위원장을 하기도 했으며, 전북현대 기술고문과 감독 대행도 거쳤다. 2003년에는 베트남의 빈둥 클럽을 맡아 팀을 정상급 팀으로 끌어올리기도 했다.

여기에 1991년 남북 단일팀 코리아의 코치로 포르투갈에서 열린 U-20 월드컵에 참가한 것은 남대식에게 소중한 추억이다. 당시를 회상하며 남대식은 “그렇게 짧은 시간에 운동만 같이 하는 상황에서 팀이 하나로 합쳐져 8강까지 올랐던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라며 “서로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양보도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회상한다.
1991년 남북 단일 U-20 대표팀 코치 시절 북한의 안세욱 감독(왼쪽)과 함께
제자 홍명보와 김병수

남대식은 가장 기억에 남는 제자로 홍명보(현 올림픽대표팀 코치)와 김병수(현 영남대 감독)를 꼽았다. 많은 스타 선수들을 키워낸 남대식은 미드필더였던 홍명보를 수비수로 포지션 체인지한 것을 가장 뿌듯하게 생각했으며, ‘비운의 천재’로 알려진 김병수에 대해서 가장 안타까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자신의 개성을 살릴 수 있도록 지도했어요. 명보의 경우 원래 미드필더였는데, 특성을 살펴보니 리베로가 좋을 것 같더군요. 그래서 명보에게 포지션 변경을 제의했어요. 처음에는 본인도 섭섭해하고, 특히 부모님이 섭섭해 하시더군요. 워낙 머리가 좋은 선수라 그 위치가 맞다고 설득을 했죠. 그런 과정을 거쳐 결국 오늘날의 홍명보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겁니다.”

“병수는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아까운 선수였어요. 그 선수는 고려대에 입학할 때부터 이미 몸이 망가져있는 상태였습니다. 지나친 혹사와 상대팀의 거친 견제 때문이었죠. 발목이 워낙 안좋아서 인조잔디인 효창운동장에서 경기할 때는 아예 내보내지를 않았어요. 거의 정기전 때만 출전했죠. 기량이 너무 아까워서 일본 스쿠바 대학에 보내서 치료도 받게 하고, 나중에는 일본 코스모 석유팀에 추천해서 선수생활을 계속 하게 했죠.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한국축구에서는 견딜 수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재능으로 봤을 때 가장 안타까운 선수였습니다.”


인터뷰=이상헌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08년 6월호 '나의 선수 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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