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 1994 월드컵에서 한국 골문을 지켰던 최인영 ⓒ스포탈코리아
90년대 초중반, 한국 최고의 골키퍼를 꼽으라면 단연 최인영(46살, 전북 현대 코치)이었다.
최인영은 90년 이탈리아 월드컵과 94년 미국 월드컵에 연속 출장하며, 한국 대표팀의 주전 수문장으로 활약했다. 94월드컵에서 주장 완장까지 찼던 그를 두고 한국 및 해외 언론은 ‘아시아 최고의 골키퍼’라는 찬사를 던지기도 했다.

K리그에서도 꾸준한 활약을 펼쳐 1983년부터 1996년 은퇴할 때까지 총 176경기에 뛰어 174실점, 경기당 1실점도 내주지 않는 대기록을 세웠다. (1983년 국민은행 소속으로 2경기 뛴 이후 울산현대에서만 줄곧 프로 생활을 했음.)

배구 선수에서 골키퍼로

원래 최인영은 배구 선수로 활동했다. 파주 신산초등학교에 다녔던 최인영은 4학년 때부터 배구부에서 활약했다. 그런 그가 축구의 세계로 넘어온 것은 6학년 때였다. 당시 파주군에서 주최하는 초등학교 종합체육대회가 있었고, 신산초는 축구와 배구에서 출전해 모두 우승을 하는 기쁨을 맛봤다. 그리고 최인영은 축구부 골키퍼의 부상으로 잠시 땜방(?) 역할로 골키퍼를 보면서 두 종목에서 모두 우승 메달을 얻었다. 축구부로 전향하게 된 계기였다.

“배구부에서 뛰고 있었는데, 축구부에서 대타 요청을 해왔어요. 골키퍼가 다쳐서 도와달라고 했던 거죠. 아무래도 골키퍼도 배구처럼 손을 사용하는 위치라서 그런 요청을 해왔던 것 같아요. 어쨌든 그렇게 참가해서 우승을 했습니다.(웃음)”

독특한 과정을 거쳐 축구의 세계로 넘어온 최인영은 파주에 있는 광탄중에서 골키퍼 생활을 이어갔다. 사실 이 때까지만 해도 최인영에게 축구는 취미 비슷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중간에 집안의 반대로 몇 개월 동안 축구를 그만두기도 했다. 그러나 축구를 그만둬야 했던 이 몇 개월은 역설적으로 최인영에게 축구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던 기간이었다.

“골키퍼라는 포지션 자체에 대한 불만은 전혀 없었어요. 좋았죠. 그리고 광탄중은 수업을 모두 마치고, 방과 후에 훈련을 하는 형태, 즉 지금의 유소년클럽과 비슷한 형태로 운영됐었어요. 저로서는 재미있게 축구를 할 수 있었죠.”

“그런데 어렸을 때는 집이 넉넉하지 않았고, 제가 몸도 조금 약했습니다. 결국 축구를 하고 훈련을 하는 과정에서 코피를 몇 번 쏟았죠. 그러자 집에서 축구를 하지 못하게 해서 3-4개월 정도 쉬어야 했습니다. 매일 하던 축구를 하지 못하게 되니 축구가 하고 싶어서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요. 다시 축구를 시작하게 됐죠.(웃음)”

U-20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꺾는 기쁨도 맛보다.

광탄중과 서울체고를 거친 최인영은 곧바로 서울시청에 입단했다. 당시 서울시청에는 박종환 감독이 있었고, 철저한 스파르타식 훈련을 통해 최강팀으로 자리 잡았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참가하는 대회마다 좋은 성과를 올렸고, 최인영은 그 활약을 인정받아 1980년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U-19 청소년대표팀에 선발됐다.

“박종환 감독님은 잘 알다시피 스파르타식이셨죠. 지금이나 그 때나 선수들이 놀이 문화나 음주 문화 등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는 그런 것이 절대 용납될 수 없었죠. 철저하게 관리를 하셨으니까...어쨌든 그 시절에 국내대회 뿐 아니라 국제대회에도 참가해 우승도 여러 번 했었습니다. 4년 동안 있으면서 정말 우승을 많이 했던 것 같네요.(웃음)”

그리고 1981년, 호주에서 열린 U-20 월드컵에 참가하면서 첫 국제 메이저 대회를 경험하게 된다. 당시 최인영은 주전 골키퍼였고, 최순호, 김석원, 곽성호, 김삼수, 김경호, 이경남 등의 인물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탈리아, 루마니아, 브라질과 한 조에 속한 한국은 첫 경기였던 이탈리아전에서 4-1 대승을 거두면서 파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루마니아와 브라질에게 연패하면서 결국 1승 2패로 탈락하고 말았다.

“호주 U-20 월드컵은 지금 생각하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 대회였어요. 선수 개개인의 기술 면에서는 우리가 절대 떨어지지 않았거든요. 다만 경험이 많이 부족했어요. 첫 경기 이탈리아전에서 대승을 거뒀기 때문에 이후에 안정적인 경기운영을 했다면 올라갈 수 있었다고 봐요. 박 감독님도 세계대회에 처음 나가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경험이 없으셔서 무리를 하셨고, 루마니아나 브라질도 모두 이기려고 하다보니까 무리가 가서 오히려 연패했던 것 같습니다.”

울산현대에서만 12년을 뛰다.

호주 U-20 월드컵을 통해 경험을 쌓은 최인영은 1983년에 슈퍼리그에서 2경기를 소화하며 프로에 첫 발을 내딛었다. 당시 서울시립대 4학년(서울시청 선수들은 서울시립대 재학생 자격이 주어졌)이었던 그는 임대를 통해 국민은행에서 2경기를 무실점으로 소화했다. 프로 선수로서 첫 기록이었다.

“당시에는 대학 4학년생이 임대로 뛰는 것이 가능했어요. 국민은행 감독님과 친분이 있어서 2경기를 뛰었던 거죠.”

이듬해인 1984년, 마침내 최인영은 본격적으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울산현대에서만 12년을 뛰며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확고히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지금은 상상할 수조차 없이 열악했던 프로 초창기의 모습부터 비교적 프로의 틀을 잡아갔던 90년대 중반까지 한국 프로축구의 변천사를 몸소 체험했다.

“초창기에는 이름만 프로지 아마추어나 다름없었죠. 연고도 없었고, 대회 규정도 없었습니다. 동대문운동장에서 개막전을 치르면 이틀 위에는 대전에서, 또 이틀 뒤에는 대구에서 하는 식으로 전국을 한 바퀴 돌고 오곤 했어요.”

“전기리그 우승팀이 결정되면 한 동안 경기가 없다가 후반에 다시 전국순회를 한번 하고...지방 소도시에서도 경기를 많이 해서 장돌뱅이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습니다.(웃음) 언제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토요일 경기를 하고, 바로 이튿날인 일요일에 또 경기를 하기도 했었죠. 지금 생각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었어요.”

“반면 제가 은퇴할 무렵인 96년에는 프로적인 면이 많이 갖춰졌죠. 지역연고도 어느 정도 정착됐고, 서포터도 서서히 생기기 시작했어요. 환경 면에서는 웬만큼 틀이 잡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선수들의 소속감이라고 해야 할까? 그 지역의 소속감이 아니라 모기업에 대한 소속감을 갖고 있는 것이 문제에요. 선수들이 지역 소속감을 갖고, 그 지역 속으로 녹아들어야 관중도 많이 찾아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울산현대맨 최인영’에게도 고비는 있었다. 1988년에 최인영은 단 4경기 출장에 그쳤다. 울산현대가 86 멕시코 월드컵에서 주전 골키퍼로 뛰었던 오연교를 유공에서 영입하면서 주전 자리를 내준 것이었다. 오연교의 영입으로 그는 트레이드를 당할 위기에까지 몰렸다. 그러나 최인영은 울산현대에서 뛰겠다는 확고한 의지로 트레이드를 거부했고, 백의종군을 선언했다. 그리고 시즌 말에 다시 주전을 되찾는데 성공했다.

“85년에 부상으로 4경기만 뛴 적이 있었는데, 88년에 또 한번 위기가 찾아왔어요. 당시 김호 감독님이셨는데, 오연교 선수를 데려오면서 제가 후보로 밀려났죠. 감독님이 여름에 저를 불러서 트레이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셨는데, 저는 ‘죽어도 여기서 죽겠습니다. 연말까지 열심히 노력해서 내년에도 못 올라서면 유니폼을 벗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죠.”

“정말 6개월 동안 머리 싸매고 열심히 했어요. 팀 훈련 외에 새벽훈련과 저녁 훈련까지 하면서 신인의 마음으로 훈련했죠. 그래서 시즌 마지막 4경기를 뛸 수 있었고, 다시 뒤집을 수 있었습니다. 자칫하면 그 때 은퇴할 뻔 했어요.(웃음)”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앞두고 열린 친선경기에서 ⓒ월간축구
국가대표 시작, 멕시코 월드컵에 대한 아쉬움

1981년 호주 U-20 월드컵을 갔다온 이후 최인영은 본격적으로 대표팀에도 합류하기 시작했다. 1982년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 참가한 한국 대표팀에 선발되면서 처음으로 대표팀에 합류했고, 1983년 한일정기전을 시작으로 1994년 미국 월드컵까지 대표팀의 수문장으로 활약했다.

“81년 세계 청소년대회에 갔다 온 후, 당시 국가대표팀 주전이었던 조병득 선배님이 다치는 바람에 대타로 들어가 대통령배 국제대회를 치렀죠. 사실상의 대표팀 데뷔는 83년 한일 정기전이었습니다.”

1983년 한일정기전을 통해 대표팀에서도 자리 잡은 최인영은 86년 멕시코 월드컵 참가에 대한 강한 의지를 불태웠고, 실제로 월드컵 아시아 예선 말레이시아전까지 대표팀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관문이었던 일본과의 경기를 앞두고 햄스트링(허벅지 뒷근육) 부상을 당하면서 월드컵의 꿈을 접어야 했다.

“일본전만 치르면 월드컵에 가게 되는 것이었는데, 부상이 오더군요. 결국 멕시코에도 못 갔어요. 아쉬움이야 많이 남죠. 그렇지만 나름대로 그것을 계기로 성장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만 해도 젊었을 때여서 국가관도 크지 않았고, 생활태도도 좋은 편은 아니었어요. 운동에 목매달고 그러지도 않았죠.”

“그런데 그렇게 다쳐서 중요한 기회를 놓치다보니까 생각이 바뀌더군요. 내가 몸 관리를 못해서 일어난 일이었기에 후회도 많이 했고, 그 때부터 몸 관리를 정말 철저하게 했습니다. 그 뒤부터는 큰 부상 없이 선수생활을 잘 마쳤던 것 같아요.”

이탈리아 월드컵을 통해 축구에 눈 뜨다.

86년 멕시코 월드컵을 부상으로 날려버린 최인영은 이후 한국축구를 대표하는 부동의 수문장으로 자리를 굳혔다. 그리고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통해 그는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었다. 최인영은 벨기에, 스페인, 우루과이와의 경기에서 모두 풀타임으로 출장하면서 자신의 첫 번째 월드컵을 마무리했다.

“정말 우리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당시 우리는 경기 5일 전에 도착했는데, 그러다보니 시차적응도 되지 않고 컨디션이 엉망이었죠. 경기를 보면 알겠지만, 뒤로 갈수록 선수들의 몸놀림이 좋아졌어요. 마지막 우루과이전 때가 되어서야 컨디션을 회복했습니다.”

“지금처럼 과학적이지 못했고, 상대에 대한 정보도 전혀 없었어요. 어떤 선수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 아무 것도 모르고 갔었죠. 지금 생각하면 창피한 노릇이지만, 당시만 해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었어요.”

최인영은 벨기에와의 첫 경기에서 후반에 2골을 내주면서 좌절을 맛봐야 했다. 2차전 스페인전에서도 미첼에게 해트트릭을 내주며 1-3으로 졌고, 우루과이와의 3차전에서는 선전을 펼쳤지만 후반 종료 직전에 폰세카에게 1골을 내주며 0-1로 패했다. 3전 전패로 월드컵을 마감한 순간이었다.

“벨기에전에서 후반 초반에 제 실수로 로빙골로 1골을 내줬고, 이후에 중거리슛으로 2번째 골을 내줬죠. 일단 상대 선수들의 특징을 잘 파악하고 나갔다면 그런 실점을 하지 않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정말 빠른 선수들이 많았었어요. 상대팀을 압도할 수 있는 스피드를 지녔고, 그것을 활용해서 역습 위주의 경기를 펼쳤다면 이길 수도 있었다는 아쉬움이 있죠. 결국 너무 모르는 상태에서 월드컵에 참가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물론 월드컵 경험이 없는 선수들이 대부분이라 자신있게 경기를 펼치지 못하고 긴장만 했던 탓도 있죠.”

어쨌든 이탈리아 월드컵을 통해 최인영은 최고 레벨의 세계축구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경험은 그에게 축구의 재미를 다시 느끼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월드컵을 통해 그는 축구에 눈을 떴다.

“이탈리아 월드컵을 갔다 오면서 축구에 눈을 떴습니다. 그 전에는 단지 축구를 열심히만 했지 잘 몰랐던 것 같아요. 이탈리아를 다녀오면서 축구가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했고, 축구가 정말 재미있고, 축구화 신는 것이 행복하고, 운동장에 나가는 것이 즐겁더군요.(웃음) 좀 더 일찍 알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아무래도 이런 것은 20대 후반이 되어야만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1993년 미국 월드컵 예선전에서(맨 왼쪽) ⓒ월간축구
94 미국 월드컵, 독일전 3실점의 아픈 추억

한번의 월드컵을 경험한 최인영은 더욱 노련한 골키퍼가 되어 있었다. 93년에 열린 '94 미국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도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아시아 최고의 골키퍼’라는 칭호까지 받았고, 팀의 주장으로서 팀을 이끌었다. 2번째 월드컵 출전과 33세의 베테랑으로서의 경험은 한국 대표팀에게 큰 힘이었다. 김호 감독의 절대적인 신임 속에 미국 월드컵에서 다시 한번 한국의 골문을 지켰다.

“아무래도 첫 월드컵 때보다는 훨씬 안정되고 좋았죠. 개인적으로 제 플레이에 대해서도 만족한 편이었습니다. 선수들에게도 항상 질 때 지더라도 자신있게 하자고 주문했어요. ‘우리가 아시아에서는 제일 잘하지만, 여기는 세계에서 제일 잘하는 선수들이다. 져봐야 본전이니까 어이없게 지지만 말자. 우리는 쟤들보다 빠르다. 죽기 살기로 뛰면 누가 욕하겠냐. 멋있게 하자’고 강조했죠.”

“사실 대회를 앞두고 주장으로서 김호 감독님과 대화를 많이 했는데, 스페인과 비기고, 볼리비아에 이겨서 1승 1무 1패로 16강에 간다는 목표를 세웠어요. 그리고 실제로 스페인과 2-2로 비기면서 실현이 되는 듯 보였죠. 그러나 볼리비아전에서 몇 차례 완벽한 득점기회를 놓치면서 계획이 틀어졌습니다. 마지막 독일전에서 선전을 펼쳤지만, 승리하지는 못했죠. 그래도 최선을 다했고, 만족스런 대회였다고 평가합니다.”

무엇보다 독일전은 최인영에게 잊을 수 없는 경기였다. 이 경기에서 그는 전반에만 3골을 내주면서 많은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후반 시작과 함께 이운재로 교체되기까지 했다. 물론 그 교체는 김호 감독이 최인영을 배려했기 때문에 이뤄진 것이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꽤나 비판적이었다.

“3골을 내줬지만, 개인적으로 크게 비난받을 만한 실수를 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해요. 클린스만에게 내준 골의 경우 어떻게 보면 실수라고도 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클린스만이 워낙 감각적으로 잘 찬 것이었어요.”

“저는 그 독일전을 치르기 전까지 제 축구인생에서 그런 슛을 경험해본 적이 없어요. 일반적으로 우리 선수들은 슈팅을 할 때 골키퍼와 맞서거나 정면을 보고 때립니다. 그런데 클린스만의 슈팅 타이밍은 정말 교묘하고 독특했어요. 그런 슛에 대한 경험이 있었다면 예측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저로서는 처음 접해본 슛이었거든요. 당황했죠.”

“남들이 볼 때는 저런 평범한 슛을 못 막나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 제 생각은 ‘저런 슛도 있구나’ 하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역시 축구는 큰 무대에서 놀아야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됐죠. 지도자가 된 이후에는 선수들에게 이런 부분에 대해 가르칠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저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전반 끝나고 감독님이 교체를 해주셨는데, 아마도 제가 심리적으로 압박을 많이 받을 거라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배려해주신 거죠. 개인적으로는 위축감이나 그런 것은 없었어요. 우리 실력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구나 생각만 들었죠. 후반에 2골을 따라붙으면서 기적을 희망했지만, 사실은 전반에 0-3이 된 시점에서 뒤집기는 힘들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어요. 단지 지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부딪쳐야만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는 마음이었을 뿐이죠.”
전북 현대의 GK코치로 활동하고 있는 최인영 ⓒ스포탈코리아
이운재, 김병지에게 뒤를 물려주다.

한국축구사에 있어서 최인영의 뒤를 잇는 골키퍼는 역시 이운재와 김병지였다. 그리고 최인영은 두 선수 모두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선배 골키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이운재와는 94 월드컵에 같이 출전하면서 여러 노하우를 가르쳐줬고, 독일전에서는 전반과 후반을 각각 나눠 뛰는 인연을 맺기도 했다.

김병지와는 더욱 인연이 깊다. 김병지가 입단한 1992년까지 최인영은 울산현대의 주전 수문장으로서 활약했었다. 그러나 이듬 해인 93년부터 서서히 출장 기회를 잃었고, 그 자리를 김병지가 대체했다.

“병지가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탄력은 있었지만, 실력 면에서는 많이 부족했었죠. 그런데 훈련하는 태도나 행동 등이 정말 빠릿빠릿하고 열심히 하더군요. 그 당시 대표팀이든 프로팀이든 골키퍼 코치가 따로 있지는 않았어요. 94 미국월드컵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골키퍼 코치가 생겨났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병지한테 많이 가르쳐줬는데, 받아들이고 흡수하는 것이 정말 빨랐어요. 놀라울 정도였죠.”

그 즈음에 최인영은 코칭스태프와 마찰이 있었고, 주장까지 반납하는 상황이 이르렀다. 결국 팀에서는 잠재력이 보이는 김병지를 주전으로 키우기로 마음먹었고, 최인영은 후보로 밀리는 상황이 되었다.

“팀에서 병지를 키우기로 결정하면서 경기를 못 뛰게 됐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94월드컵 대표팀에는 뽑혔어요.(웃음) 김호 감독님께 ‘팀에서도 후보인데 뽑으시면 괜찮으시겠냐?’ 말씀드렸더니 ‘그래도 네가 필요하다. 선수들도 컨트롤해야하지 않겠느냐’ 하시더군요.”

결국 94년 6게임을 뛰는데 그친 최인영은 95년에는 1경기 출장에 그치고, 마지막 해인 96년에는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사실 그 무렵부터 최인영은 선수보다는 플레잉 코치의 개념에 가까웠다. 본인이 경기를 뛰는 것보다는 김병지를 비롯한 후배 골키퍼들을 조련하는데 더 큰 비중을 둔 것이다.

“사실 95년에 은퇴하려고 했는데, 구단이나 차범근 감독님은 1년만 더 해달라고 하더군요. 제가 병지에게 상황에 따른 대처방법이나 골키퍼로서의 요령 같은 것을 자세하게 가르쳐줬거든요. 후보 명단에는 계속 올랐지만, 그보다는 선수들을 가르쳐주는 일에 더 많이 신경을 썼어요. 지도자로서 좋은 경험을 한 셈이지요.”

울산 코치로 지도자 생활 시작

1996년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정식으로 은퇴한 최인영은 곧바로 울산에서 골키퍼 코치를 시작했다. 당시 울산에는 전문적인 골키퍼 코치가 없었고, 당연히 최인영을 적격자로 꼽았다. 2003년까지 울산에서 골키퍼 코치 생활을 했던 그는 2004년에 브라질과 잉글랜드에서 6개월씩, 총 1년간 지도자 연수를 떠났다.

이후 경일대에서 수석코치 겸 골키퍼 코치로 활동하던 최인영은 2006년, 최강희 감독의 러브콜을 받아 전북현대의 골키퍼 코치를 맡게 됐다. 프로팀의 골키퍼로 복귀한 그이지만, 언젠가는 어린 골키퍼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 자신이 현역 시절에 골키퍼 코치 없이 힘들게 성장해왔기 때문에 다음 세대의 어린 선수들에게는 제대로 된 교육을 시켜주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어떻게 보면 제 세대가 골키퍼 1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때만 해도 전문적인 골키퍼 코치에게 교육을 받지 못했어요. 만약 유청소년 시기부터 제대로된 골키퍼 교육을 받았다면 더 좋은 선수가 될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이 있죠. 그렇기 때문에 어린 선수들을 많이 가르치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2년 전에 AFC에서 주최한 골키퍼 인스트럭터 코스를 이수했습니다. 현재는 여건상 어쩔 수 없지만, 여유가 생기면 어린 선수들을 기초부터 잘 가르치고 싶어요. 프로팀에 있으면 고작 3-4명의 선수만을 가르쳐야 하거든요. 언젠가는 폐교 같은 곳에 인조잔디를 깔아서 골키퍼 학교를 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기회가 있겠죠.”


인터뷰=이상헌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07년 12월호 '나의 선수 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Posted by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BLOG main image
by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공지사항

카테고리

전체보기 (125)
사진으로 보는 한국 축구 (4)
K리그 역사 바로 알기 (9)
K리그의 전설 (42)
K리그 꿈의 구장 (2)
축구인 인터뷰 (68)
K리그 역대 순위표 (0)
K리그 역대 수상 내역 (0)
K리그 역대 엠블럼 (0)

최근에 받은 트랙백

Total : 137,822
Today : 2 Yesterday :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