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급 해결사로 이름을 떨쳤던 이원식 ⓒ스포탈코리아
‘해결사’가 되는 비결이요? 베스트 멤버 이상으로 몸 관리 해야죠

2003년 7월 27일 부산 아시아드 경기장. 후반 10분까지 부산에 0-1로 끌려가던 부천의 하재훈 감독이 이원식에게 사인을 보냈다. 곧 전반전부터 몸을 풀고 있던 이원식이 벤치로 달려와 조끼를 벗고 축구화끈을 조여 맸다. 이종민 대신 교체 투입된 이원식은 그라운드에 나선지 1분 만에 샤리의 패스를 이어받아 골지역 왼쪽에서 동점골을 터트렸다.

그리고 5분 뒤. 이번에는 남기일이 아크 정면에서 골지역 오른쪽으로 스루패스를 보냈다. 상대 진영에서 어슬렁거리며 냄새를 맡고 있던 이원식은 특유의 폭발적인 스피드로 치고 들어가 오른발슛으로 골망을 갈랐다. 부천의 2-1 역전.

90분 승부가 끝나고 주심의 휘슬이 길게 울리자 부천의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한데 엉겼다. 전년도 시즌 마지막 경기부터 지리하게 이어지던 부천의 22경기 연속 무승 행진이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해결사’ 이원식 주연의 감격적인 축구 드라마였다.

2006년을 끝으로 현역 생활을 마감한 이원식(34살)은 올해부터 모교인 대구 청구고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했다.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내자 이원식은 잠시 회상에 잠기는 듯 잔잔한 미소를 보였다.

“그 때도 이기지 못했다면 팀이 K리그 최다 연속 무승 신기록을 세울 뻔 했어요. 8개월 넘도록 승리를 기록하지 못했는데 그건 공격수인 제가 제 활약을 못했다는 의미잖아요. 책임감과 부담감이 컸죠. 마침 하재훈 감독님이 막 대행 꼬리표를 떼고 나온 경기이기도 해서 선수들 모두 한 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뭉쳤어요. 그 해 시즌 첫 승의 감격은 그 어느 해 플레이오프 진출 경쟁보다 더 감격적이고 짜릿한 기억으로 남아있네요.”

‘해결사는 내 운명’

따지고 보면 ‘해결사’로의 운명은 프로 데뷔전에서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1996년 한양대를 졸업하고 신인선수로 부천에 입단한 이원식은 4월 4일 아디다스컵에서 프로 데뷔를 신고했다.
당시 천안 일화와 태백에서 경기를 치른 부천은 전반전에만 박남열과 신태용에 연속골을 허용하며 0-2로 끌려가고 있었다. 새내기 이원식은 벤치에 앉아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는 선배들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심 ‘야, 내가 팀을 잘못 왔구나’ 하고 중얼거리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원식에게 교체 사인이 떨어졌다. 후반 9분 그야말로 ‘엉겁결에’ 교체 투입되는가 싶었는데, 이원식이 일을 냈다. 후반 31분 윤정환이 띄워준 볼을 받아 골 지역 정면에서 헤딩슛으로 만회골을 뽑아낸 것. 이원식의 골로 추격의 발판을 마련한 부천은 3분 뒤 권태규의 동점골로 천안을 따라잡았다. 경기 종료를 4분여 남겨둔 시점에서는 다시 이원식의 골로 짜릿한 뒤집기에 성공했다.

“엔트리에 이름이 올라있기는 했지만 정말 뛸 수 있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냥 선배들 따라가서 경기 지켜보는 것 자체가 도움이 되니까, 편하게 앉아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출전 명령이 떨어진 거예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갔는데 만회골을 넣고 역전골을 넣으니 난리가 난 거죠. 부천은 전통적으로 수비 색깔이 강한 팀이라 역전하는 경기가 거의 없었거든요. 그날 저녁 회식 자리에서 단장님이 ‘유공(부천) 창단 이래 역전승은 처음’이라며 상당히 기뻐하셨죠.(웃음)”

데뷔전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데 성공한 이원식은 하늘 같은 선배들 틈에서 주전으로 올라서는 기회를 잡게 됐다. 첫 경기에서의 활약을 발판으로 아디다스컵에서 맹활약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그 자신도 프로 입단 후 처음으로 개인상(대회 득점왕)을 수상하는 기쁨을 누렸다.
이어 비쇼베츠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팀의 일원으로 96 아틀란타 올림픽 본선에 나가서도 활약했다.

육상 선수에서 축구 선수로

프로 데뷔 시절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축구 선수로서의 입문도 성공적인 편이었다. 대부분의 축구 선수들이 그러하듯 이원식도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축구를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운동을 좋아했던 데다 단거리 스피드에서 두각을 보여 육상부에서 활동했던 이원식이었지만, 기록을 다투는 ‘자신과의 싸움’에 금방 지쳤다. 이즈음 여러 명의 선수들이 함께 어울려 뛰는 축구부가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축구부로의 전향(?)을 결심한 것에는 질투심(?)이 작용했다.

“모교가 대구 반야월초등학교인데, 교장 선생님이 유독 축구부를 좋아하셨어요. 간식 하나라도 축구부에 더 가니까 은근히 부럽더라고요.”

뛰어난 스피드를 보유하고 있었던 이원식은 축구부로 옮긴 뒤에도 그 특기를 살려 금세 주전으로 자리잡았다. 5학년 때 이미 6학년들과 함께 뛰면서 팀의 전국대회 우승을 이끌었고 득점왕도 수상했다.

“처음엔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어요. 그런데 전국대회에서 좋은 결과를 낸 이후로는 가장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주셨죠.”

이후 대구 협성중으로 진학해서 뛸 때까지는 축구의 매력에 푹 빠져 즐겁게 지냈다고.
그가 축구 때문에 처음으로 방황한 것은 고교 진학 문제로 갈등을 겪으면서부터다.
당초 협성고로 진학이 예정돼 있었지만, 협성중 선수들에 대한 다른 고교들의 스카우트가 과열 양상을 보이면서 협성고 축구부가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이원식을 포함한 동기들은 삼삼오오 찢어져 각각 다른 고교로 진학했다. 이원식의 행선지는 청구고로 결정됐다. 그런데 새로운 문제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기존 선수들의 텃세가 심해 힘들었어요. 청구고 부장 선생님과 감독님이 특별히 저를 챙겨주신 탓인지 왕따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축구를 그만둬야겠다고 수 차례 생각했죠. 하지만 넉넉지 않은 형편에 제 뒷바라지에 열성이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차마 그만 둘 수가 없었어요. 이를 악물고 참았습니다. 훈련에만 매진했더니 결국 나중에는 인정을 받게 되더군요. 1학년 때 3학년 형들과 함께 전국대회에 나가서 득점왕이랑 MVP도 수상했어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기는 이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96 아틀란타 올림픽대표팀 시절의 이원식 ⓒ 베스트일레븐
‘교체 선수? 폭발력으로 승부하라’

프로 선수 이원식의 이름 앞에는 ‘해결사’라는 별칭 외에 ‘후반전의 사나이’, ‘특급 조커’라는 수식어가 번갈아 붙었다. 언뜻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 ‘반 게임짜리 선수’라는 의미가 내포된 말이다.

청구고, 한양대를 거치는 동안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던 이원식은 자신이 교체 선수로 인식되는 현실이 싫었다. 경기에서 항상 좋은 활약을 보였다고 생각했지만, 다음 경기 엔트리를 확인해보면 자신의 이름은 어김없이 교체 명단에 올라있었다.

“체력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량에도 자신이 있었는데 왜 나는 선발이 아니라 교체 선수인가, 고민이 많았죠. 이 생각을 고쳐주신 분이 조윤환 감독님이에요. 제 고민을 눈치채셨는지 어느 날 저를 부르셔서는 ‘원식아, 너는 우리 팀에 꼭 필요한 선수다. 나도 널 쓰고 싶다. 그런데 너의 폭발력을 살리고 팀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려면 네가 후반에 뛰는 게 낫다. 후반에 나간다고 해서 절대 나쁘게 생각하지 마라’는 요지였어요. 감독님의 신임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걱정이 사라지더군요.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찾게 됐죠.”

이후 훈련에 임하는 이원식의 태도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전반전 출장을 목표로 무리해서 운동하지 않고 후반에 출장한다는 생각으로 컨디션을 조절했다. 대신 선발 출장하는 선수들과 똑같은 운동량을 소화하려 애썼다. 팀에서 달리기를 하면 늘 선두에서 뛰었고, 모래사장에서 뛰거나 스피드를 다툴 때도 뒤지는 법이 없었다.

한층 날이 선 그의 공격력은 상대 수비수들의 체력이 급격히 저하되는 후반전에 폭발적인 힘을 발휘했다. 그의 질주에 상대 수비는 나가 떨어졌고, 그 즈음이면 어김없이 그의 발끝을 떠난 볼이 상대 그물을 출렁였다. K리그 통산 270경기 출장을 기록한 이원식은 이중 233경기에 교체 출장했다. 짧은 시간 출전만으로 73득점-18도움을 기록했으니 그 누구보다 순도 높은 활약을 보였던 셈이다.
부천SK에서 활약하던 모습 ⓒ KFA
부족한 운동량을 개인 훈련으로 보충한 것이 성공 비결

예나 지금이나 교체 선수로 뛰면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이는 많지 않다. 이원식이 독보적인 활약을 펼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이원식은 ‘정신력’과 ‘훈련량’을 키워드로 제시했다.

“교체 선수들은 베스트 멤버들보다 컨디션 조절에 훨씬 애를 먹습니다. 베스트 멤버는 경기만 온전히 소화해도 운동량을 유지하는데, 교체 선수들은 따로 운동량을 채워야 돼요. 그런데 대부분의 선수들이 이 부분을 간과한다는 게 문제죠. 5분을 뛰든 10분을 뛰든, 자신이 교체로 뛰었다면 나머지 모자란 부분에 대해서는 베스트 멤버 이상으로 운동량을 채워야 해요. 그래야 다음 경기에서 최상의 컨디션으로 대기할 수 있는 법이거든요. 감독이 교체 선수를 쓸 때는 뭔가 기대하는 부분이 있는 건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로 들어가면 결국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하고 나올 수 밖에 없어요. 그럼 결국 교체 인생을 벗어나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 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소리 없이 운동장을 떠나는 거죠.”

때문에 이원식은 2군 훈련에 합류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2군 경기에 뛰어서라도 운동량을 채우고 개인 훈련을 통해 부족한 운동량은 반드시 보충했다. 물론 스스로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교체 선수들은 대부분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다가 자신감을 잃어갑니다. 저도 처음에는 화가 났죠. 그런데 초점을 내가 아닌 팀에 맞추니까, 후반전에 폭발력을 보일 수 있는 쪽으로 훈련을 집중하다 보니까, 컨디션 조절이 훨씬 쉬워졌어요. 그러니까 후반에만 뛰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기량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후배들에게도 자신있게 조언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원식 스스로 세운 원칙은 아내가 병상에 있을 때조차 흔들림이 없었다. 이원식의 아내 강은화 씨는 불치병으로 알려진 근무력증과 투병 중이었다. 2001년 1월 중국 전지훈련을 떠났을 때는 이원식이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아내의 병세가 악화됐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귀국해서 보호자 수술동의서를 작성하는 고비를 맞기도 했다.

아내의 병간호로 동계 훈련을 소화하지 못한 이원식은 시즌 초반 극도의 부진을 보였다. 그러나 계속해서 출장 기회는 주어졌다. 야간 훈련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는 그의 노력이 조윤환 감독에게 믿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동계 훈련을 소화하면서 열심히 준비한 동료들의 기회를 제가 뺏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다른 선수들에게 미안해서라도 무너지면 안되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힘들수록 운동을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꾹 참고 혼자 야간 훈련을 했습니다. 나름대로 안 보이는 곳에서 한다고 한 건데, 감독님이 한 번씩 숙소를 돌아다니시다 저를 보셨나 봐요. 제 사생활에는 일절 간섭하지 않으시더군요. 그게 저한테는 큰 힘이 되었죠. 아, 지금은 아내의 병세가 많이 호전돼 일상 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부천 시절 은사들 골고루 닮고 싶어

이원식은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황금의 미드필드’를 자랑하던 부천 시절을 가장 그리워한다. 러시아 출신 발레리 니폼니시 감독이 심어놓은 패스 플레이가 조윤환-최윤겸-하재훈 감독으로 이어지면서 훨씬 더 조직적이고 역동적인 경기력으로 빛을 발했던 시기다.

“그 시절만큼 선수들이 잘 단합됐던 적도 없는 것 같아요. 선수들 사이에 벽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작은 분열조차 없었습니다. 경기장에서도 우리가 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한 골을 내주더라도 언제든 엎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죠.”

“미드필드에서의 지원은 또 얼마나 좋았는데요. 제가 스피드로 빠져나가는 스타일이니까 적절한 패스 지원이 있으면 플레이가 살거든요. 윤정환, 윤정춘, 김기동, 전경준 같은 선수들과는 말 그대로 눈빛만 봐도 호흡이 척척 맞았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읽힐 정도였으니까요.”

이제 막 초보지도자로서의 걸음을 떼기 시작한 이원식이 모델로 삼고 있는 지도자들 역시 부천 시절 은사로 모셨던 이들이다. 전술적인 맥은 같지만 스타일은 조금씩 다른 감독들이었다. 이원식은 은사들의 장점을 자기 것으로 소화해 끊임없이 발전하는 지도자가 되겠다고 다짐한다.

“니폼니시 감독님이 당시로는 생소했던 자율축구 문화를 심어줬다면 조윤환 감독님은 자율축구 안에서 기강을 잡으셨던 분이에요. 선수단 체계를 잡아나가면서 팀 성적이 좋아졌죠. 최윤겸 감독님은 선수단을 묶는 인화력이 최고였어요. 하재훈 감독님은 학구파인데,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세 자체가 선수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습니다. 감독님들의 장점을 잘 조화시켜 제 것으로 만드는 게 과제입니다. 한 자리에서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발전하는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곧 다시 좋은 지도자의 모습으로 경기장에서 뵐 수 있겠죠.”


인터뷰=배진경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07년 11월호 '나의 선수 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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