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스포츠 중계의 전설' 이철원 선생 ⓒ김유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성동원두 서울운동장입니다. 오늘 이곳 서울운동장에서는 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 예선 한국 대 이스라엘, 이스라엘 대 한국의 경기가 펼쳐집니다. 오늘도 해설에는 주영광 씨 모셨습니다.”

‘스포츠 중계의 전설’ 이철원 아나운서 특유의 오프닝 멘트이다.
올해로 71세를 맞은 이철원 선생은 과거 축구 외에도 권투, 프로 레슬링, 농구 등 모든 종목에 걸쳐 해박하면서도 차분한 중계로 명성을 날린 전(前) MBC 문화방송 아나운서다.

국내 최초의 월드컵 중계였던 1970년 멕시코 월드컵도 이철원 아나운서의 입을 통해 중계가 됐고, 올드팬들의 기억에도 새로운 7,80년대 서독 분데스리가 중계로 유럽 선진 축구가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것도 이철원 아나운서를 통해서다.
홍수환, 염동균, 김태식, 박종팔, 김득구 등이 활약하던 한국 복싱의 황금기에도 이철원 아나운서의 세계 타이틀매치 중계를 보고 들으며 팬들은 일희일비했다.
따라서 당시 이철원 아나운서는 스포츠팬 모두의 목소리이자, 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택에서 진행된 인터뷰 내내 조용한 어조로 옛날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이철원 선생의 스포츠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열정은 필자가 예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역시 스포츠 중계의 대가(大家)다웠다. 스포츠 중계 아나운서들의 품위와 자세에 대해서도 지적해 주었는데 현역 스포츠 중계 아나운서들이 반드시 귀담아 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안녕하십니까.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개인적으로 80년대 초에 동대문 운동장에서 중계하시는 걸 뵌 적이 있습니다.

아, 그러세요? 꽤 오래 전에 저를 보셨군요. 고맙습니다.

- 건강은 어떠신지요?

괜찮은 편입니다. 크게 안 좋은 데는 없으니까요.

- MBC에서 나오신 후 평화방송에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예. 아나운서 생활을 마친 후 86년부터 3년간 전주 MBC 사장으로 있었고, 그 후에 평화방송 전무로 와서 98년까지 근무를 했지요.

- 처음에 아나운서가 되셨던 이야기부터 해주시죠.

제가 1958년에 KBS에 입사를 했습니다. 학창시절부터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던 꿈을 꾸었던 것은 아니고, 그냥 처음에는 안정된 직업을 갖고 싶어서 했죠. 그렇게 아나운서 생활을 몇 년 하다가 62년에 군에 입대를 했는데, 군대에서도 방송 요원으로 활동을 했어요. 제대 후 64년에 MBC 문화방송으로 옮기게 됐지요. 그 무렵엔 MBC가 서울 종로의 인사동에 있었습니다. 인사동에 동일가구라고 있었는데 그 건물에 세 들어 있었어요. 그 후에 정동으로 갔다가 여의도로 옮긴 겁니다.

- 스포츠 캐스터는 스스로 원하신 건가요? 아니면 방송국 측의 권유가 있으셨나요?

제가 원해서 했습니다. 당시 제 생각에 아나운서도 뭔가 하나쯤은 자기만의 특기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아나운서의 기본은 뉴스입니다. 우선 뉴스를 잘 할 수 있어야 돼요. 그래야 다른 것도 잘 할 수 있거든요.

저는 학창 시절에 직접 운동을 하진 않았어도 스포츠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스포츠 중계 쪽으로 특성을 살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지원을 하게 된 거지요. 스포츠 외에도 한때는 음악 관련 프로그램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 축구 뿐 아니라 권투, 프로 레슬링, 농구, 배구, 유도, 마라톤 등 거의 모든 종목을 중계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사실 힘든 일 아닌가요?

쉽지는 않죠. 하지만 어릴 적부터 모든 스포츠를 다 좋아하다보니 조금 지나니까 해볼 만 하더라구요.

처음 스포츠 중계 아나운서를 시작했을 때 저희 집이 서울 노량진이었습니다. 연습을 해야 하는데 마땅한 곳이 없어서 근처 한강에 구슬을 갖고 가서 중계방송 연습을 했어요. 구슬을 이쪽, 저쪽으로 굴려가면서 마치 스포츠 중계방송 하듯이 혼자 떠들고 그랬죠.(웃음)

스포츠는 각 종목마다 특색이 있기 때문에 그 묘미를 잘 살려야 돼요. 리듬과 흐름을 잘 타야 되는 거죠. 당시에는 텔레비전 중계보다 라디오 중계가 많았던 시절인데, 라디오 중계를 많이 했던 게 저한테는 큰 도움이 됐습니다. 라디오 중계는 청취자들이 화면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오로지 아나운서의 멘트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게 되지 않습니까.

- 그런데 야구 중계하신 것은 제가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야구는 거의 안 했습니다. 초창기에는 조금 했었는데 그 후에는 하질 않았어요. 아시다시피 라디오로 야구 중계를 하면 다른 종목보다 말을 많이 해야 됩니다. 타자가 나올 때마다 이전에 타석에 나왔던 상황이나 타율 같은 걸 소개해야 하고...그리고 야구가 정적인 스포츠잖아요. 그게 저하고는 별로 맞질 않더라구요. 그래서 안한 겁니다. 당시 MBC 야구 중계는 최승일 아나운서가 했고, 이후에는 김용 아나운서가 많이 했지요.

- 처음으로 중계하셨던 경기 기억나십니까?

예. 농구를 처음으로 했습니다. 여자 농구에서 박신자, 남자는 신동파 씨가 전성기를 구가할 때였지요.

-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 중계도 많이 하셨지요?

네. 1966년 방콕 아시안게임때 대한민국 합동 방송단이 처음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때 제가 MBC 대표로 갔고, KBS는 이광재 씨, TBC(동양방송)는 원종관 씨가 갔습니다. 그후 76년 몬트리올 올림픽, 84년 LA올림픽 중계도 현지에서 진행을 했지요. (* 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한국 불참 - 편집자)

-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중계를 선생님께서 하셨다면서요.

그렇습니다. 1970년 월드컵을 MBC에서 독점 중계를 했죠. 현지에 가서 생중계한 건 아니고, 녹화 생중계라고 해서 경기가 끝난 후 몇 시간 뒤에 화면을 받아서 바로 스튜디오에서 중계방송을 한 거지요. 해설은 돌아가신 주영광 선생하고, 장경환 선생 두 분이 번갈아 가면서 하셨습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국내에선 월드컵이 어느 정도로 대단한 스포츠 이벤트인지 국민들이 잘 몰랐습니다. 오히려 올림픽이 훨씬 더 비중이 컸거든요. 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이 8강에 들어간 것도 대회가 끝난 후에 알게 된 사람들이 많았으니까요.

아나운서인 저도 그 대회에서 북한이 이탈리아를 1대0으로 이기는 경기 화면을 국내에서 보질 못하고, 태국에 출장 갔을 때 처음 봤습니다. 그 대회 북한 축구에 관한 자세한 기사는 일본 축구 잡지를 통해서 알게 됐구요.

1960년대까지는 ‘WM포메이션’ 이런 식으로 표현을 했는데, 70년 월드컵부터 4-3-3, 4-4-2...하는 포메이션이 나온 거예요. 저 개인적으로는 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이후에 ‘월드컵’이란 것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갖게 됐는데, 그런 상태에서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을 MBC에서 독점 중계를 했으니까 무척 기뻤지요.

- 월드컵 축구 중계를 보고난 당시 국민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한마디로 대단했죠. 그 무렵은 우리 대표팀이 말레이시아에서 하는 메르데카컵과 태국 킹스컵 대회에서 우승만 해도 김포공항에서 서울 시내까지 카퍼레이드를 할 때였으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말로만 듣던 세계적인 선수들의 플레이를 안방에서 볼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축구팬들이 얼마나 기뻤겠어요. 멕시코 월드컵을 중계하고 나서 제가 길거리를 지나가면, 사람들이 저를 보고 “저기 월드컵 지나간다! 월드컵 간다!’고 말을 했습니다.(웃음)

그 대회 서독 대 이탈리아의 준결승에서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이탈리아가 서독을 4대3으로 이겼는데 서독의 베켄바워가 경기 중에 어깨가 빠지는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켄바워가 어깨에 붕대를 칭칭 감고 뛰었어요. 그 모습도 시청자들이 안방에서 볼 수 있었지요.

그런데 당시엔 방송국 스튜디오에 에어컨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한 2시간 동안 그 안에서 중계를 하다보면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됐습니다. 그렇지만 힘든 줄 모르고 중계를 했습니다.


펠레(왼쪽)와 에우제비오가 현역 시절 만났을 때 모습

- 70년 월드컵 중계를 하시면서 인상 깊었던 선수는 누구였나요?

당시 브라질에 펠레, 알베르토, 자일징요, 토스타오, 리베리노가 있었고, 서독에는 베켄바워, 게르트 뮐러, 이탈리아에는 리바, 마촐라, 파케티, 리베라, 도멩기니 같은 유명한 선수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브라질 선수들의 플레이가 참 멋지고 인상적이었습니다. 최고는 역시 펠레였구요. 펠레는 군계일학이더군요. 마치 연체 동물이 움직이는 것 같았어요. 펠레가 골을 왜 그렇게 잘 넣는지도 알게 됐습니다. 골을 넣을 때 꼭 좋은 위치에 있더라구요. 이탈리아의 도멩기니라는 선수도 인상 깊었습니다. 기가 막힌 플레이를 펼치더군요.

- 축구 중계를 오래 해오시면서 기억에 남는 선수가 있으실텐데요.

당연히 있습니다. 대표적인 선수가 포르투갈의 유세비오입니다. 에우제비오라고도 하지요. 66년 잉글랜드 월드컵 때 포르투갈이 북한에게 3골을 먼저 빼앗긴 후 5대3으로 역전승을 거둘 때 유세비오 혼자 4골을 넣었죠. 유세비오가 1970년에 벤피카 소속으로 한국에 와서 우리 대표팀과 친선경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 때 제가 직접 인터뷰를 했습니다.

유세비오는 가장 존경하는 선수가 브라질의 펠레라고 말을 하더군요. 그 이유를 묻자 “축구 선수는 유명해지기 전까지는 많은 골을 넣을 수 있다. 그런데 유명해지면 상대방의 타이트한 마크를 받기 때문에 좀처럼 골을 못 넣는다. 그러나 펠레는 유명해진 후에도 플레이의 질이 떨어지지 않았고, 득점 수도 줄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펠레를 존경한다”고 했습니다. 참 겸손한 사람이더군요.

유세비오 플레이 하는 걸 직접 보니까 확실히 일반 선수들하고는 달랐습니다. 늘씬한 체격에 걸음걸이부터가 달랐어요. 마치 고양이처럼 사뿐사뿐 걷더라구요. 그리고 슛팅의 강도와 정확도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구요.

아시아 선수 가운데는 말레이시아의 수비수 소친온이 기억에 남아요. 포지션이 스위퍼였는데 우리 공격수들이 좀처럼 뚫지 못했습니다. 상당히 차분하고 침착한 선수로, 당시 아시아를 대표하는 수비수였다고 할수 있죠.

- 국내 선수들 중에도 있을 법 한데요.

우선 故 최정민 선생이 떠오릅니다. 5,60년대에 유명한 공격수였죠. 그분 포지션이 센터포워드였는데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스트라이커’란 표현을 하지 않고 ‘센터포워드’라고 했습니다. 당시엔 ‘센터포워드만이 골을 넣을 수 있다!’고 할 정도였는데 최정민 선생은 특히 많은 골을 터뜨렸습니다. 특히 직선 슛팅이 너무도 강하고 멋졌어요.

이회택 씨도 기억에 남지요. 당시 축구 팬들은 이회택 씨를 ‘사자가 뛰듯이 뛴다’고 표현했습니다. 활동량이 많지는 않아도 찬스를 잡으면 비호와 같은 스피드로 골을 터뜨렸거든요.

수비수로는 김정남 - 김호 씨도 생각이 납니다. 김정남 씨는 차분하고 영리한 플레이를 했던 스위퍼였어요. 김호 씨는 스토퍼였는데 다이나믹한 플레이어였음에도 불구하고, 경기가 끝난 후에는 유니폼이 깨끗했던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차범근 선수는 19살 때 대표팀에 선발이 됐는데 국가대표로 데뷔할 무렵에 중계하던 때 생각이 나는군요. 엘리트 코스를 밟으면서 큰 어려움 없이 성장해서 결국 성공을 한 거지요.

- 당시 선수들과 친분은 좀 있으셨습니까?

여러 선수가 있지만 김정남, 허정무와 가까웠습니다. 김정남 씨는 현역 시절 외국에 다녀오면 저한테 벨트 선물도 해주고 그랬죠. 지금 전남 드래곤즈 감독으로 있는 허정무는 80년에 네덜란드에 진출하느냐 마느냐 할 때 저한테 연락을 해와 자기 고민도 이야기하고 상담도 했던 게 기억이 납니다.

- 7,80년대 서울운동장(현 동대문 운동장)에서 한국팀 경기를 중계하실 때 선생님께서는 오프닝 멘트 때 항상 ‘여기는 성동원두 서울운동장입니다’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성동원두’가 무슨 뜻인가요?

서울운동장이 세워지기 전부터 그 곳을 성동원두라고 불렀습니다. 일제시대 때는 군사 훈련도 하던 그런 동네인데 상당히 의미있는 곳이라서 그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나란히 입장하는 주영광(왼쪽)과 헝가리의 푸스카스(오른쪽앞)

- 스포츠 중계에서 이철원 선생님이 독보적이었다면, ‘축구 해설의 전설’은 주영광 선생님이라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합니다. 중계 때 호흡은 잘 맞으셨나요?

네. 아주 좋았죠. 주영광 선생은 한 마디로 ‘말이 없는’ 해설자셨어요. 즉, 필요한 부분에서만 해설을 해주신 거지요. 이게 진정한 해설이라고 봅니다. 해설자는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부분만 해설을 해주면 되는 거예요. 잡다한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주영광 선생은 고향이 이북이신데 좋은 집안에서 자라신 분이예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했구요. 축구인으로서도 그렇고 인격적으로도 그렇고 대단히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축구에 관한 해박한 지식도 갖고 계셨구요.

- 주영광 선생님으로부터 옛날 이야기도 많이 들으셨을 것 같습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때 우리 대표팀 주장이 주영광 선생이셨고, 골키퍼가 지난해 돌아가신 홍덕영 선생이셨습니다. 그 대회에서 한국이 헝가리에게 9대0으로 대패를 당한 기록이 있지 않습니까. 그 때 헝가리에 푸스카스라고 하는 전설적인 선수가 있었지요.

주영광 선생께서 생전에 저한테 직접 해주신 이야기인데, 당시 푸스카스와 직접 맞붙어보니까 너무너무 축구를 잘 하더랍니다. 마크가 불가능하더래요. 그래서 주영광 선생이 푸스카스와 심하게 부딪혀서 같이 실려 나가려고 마음을 먹었답니다. 그런데 푸스카스가 워낙 빨라서 도대체 부딪힐 시간이 없었대요. 도저히 잡을 수가 없더랍니다.(웃음)

주영광 선생께서 암으로 58세에 돌아가셨는데, 가족들조차도 암에 걸린 지 몰랐답니다. 본인이 말씀을 안하셨대요. 저한테도 일체 내색을 하질 않으셨거든요. 그 정도로 강직했던 분입니다. 너무 일찍 돌아가신 게 참 마음이 아파요.

- 팬들은 이철원 선생님이 1970년대 중반부터 서독 분데스리가를 방송할 때 캐스터 맡으신 것을 많이 기억합니다.

그렇더군요. 70년대 초반만 해도 국내 축구팬들이 유럽 축구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MBC가 당시 세계 최고의 리그인 분데스리가를 방송해준 거지요. 그 방송을 보면서 국내 축구팬들의 안목이 많이 높아졌다고 할수 있습니다. 분데스리가 방송은 축구팬들 뿐 아니라, 선수들도 많이 시청을 했다고 하더라구요. 그에 관해서는 개인적으로 큰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분데스리가를 방송하기 전까지는 MBC에 스포츠국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중계도 방송국내 영화부에서 기획을 했어요. 그런데 스포츠국이 생겨나면서 분데스리가 방송을 해보자고 기획을 한 겁니다. 당시 서독의 트랜스텔이라는 제작 회사에서 분데스리가 경기 테이프를 전세계로 공급을 하고 있었는데, 그 테이프를 MBC가 서독 대사관을 통해서 수입을 한 거예요.


70년대 분데스리가 함부르크 : 슈투트가르트 경기 모습. 현재 바이에른 뮌헨 감독으로 있는 마가트(왼쪽)의 모습도 보인다

- 당시 MBC의 분데스리가 방송은 90분 경기를 50분 정도에 압축해서 보여주었는데, 사전에 풀타임 화면을 보시고 나서 중계를 하신 겁니까?

아닙니다. 아예 처음부터 트랜스텔에서 50분으로 제작/편집한 화면을 우리한테 보내왔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비디오 테이프 안에는 각 팀에 대한 기본적인 자료와 선수들의 신상명세가 들어 있었습니다.

처음엔 그걸 참고해서 중계를 했는데 나중에는 안보고 중계를 할 수 있게 됐지요. 샬케04에 어느 선수가 있고, 슈투트가르트 감독은 누구고..등등을 다 알고 있었으니까요.

서독에서 제작한 원본 테이프는 해설자 없이 아나운서 혼자서 중계를 하는데 너무도 명쾌한 중계를 하더군요. 화면 구성도 그렇고, 카메라 위치도 그렇고 확실히 수준이 높았습니다.

- 그런 꿈의 무대에 한국 선수가 진출할 걸로 예상하셨습니까?

아뇨, 전혀 생각하질 못했습니다. 그때는 한국 축구가 월드컵이나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서도 번번히 탈락했던 시절이라 감히 한국 선수의 유럽 진출은 꿈도 꾸지 못했지요. 그런데 1979년에 차범근 선수가 분데스리가에 진출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 때 참 기뻤죠.

- 주영광 해설위원은 당시 함부르크 SV의 케빈 키건(잉글랜드)을 좋아하신다는 게 느껴졌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느 선수를 좋아하셨습니까?

저는 바이에른 뮌헨의 칼 하인츠 루메니게를 좋아했습니다. 당시 루메니게는 유럽 최고의 공격수였지요. 경기의 맥을 짚을 줄 아는 선수였지요. 바이에른 뮌헨에서 루메니게와 콤비를 이루었던 파울 브라이트너도 좋아했습니다. 브라이트너의 기동력은 정말 일품이었습니다.


이철원 선생이 가장 좋아했던 선수 칼하인츠 루메니게

- 당시 세계 최고였던 분데스리가를 중계하시면서 많은 걸 느끼셨을텐데요.

66년 월드컵은 개최국인 잉글랜드가 우승을 했고, 70년 멕시코 월드컵은 브라질이 우승을 했지 않습니까. 그리고 74년 월드컵은 서독이 우승을 했구요. 흔히들 잉글랜드는 힘의 축구, 브라질은 기술 축구라고 말을 하는데 서독 축구는 힘과 기술을 합친 축구였습니다. 잉글랜드와 브라질의 장점을 섞어 놓은 듯한 느낌이었거든요. 게다가 그들의 조직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습니다. 특히 공수 전환이 무척 빠른 게 인상적이었어요.

- 85년 10월과 11월에 벌어졌던 86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예선 한국 대 일본의 1,2차전 중계를 선생님께서 하셨던 걸로 기억됩니다.(KBS 중계는 원종관 아나운서) 그 경기는 32년 만에 한국 축구가 월드컵 본선 진출을 결정짓는 경기였는데 기분이 어떠셨습니까?

솔직히 불안한 마음을 갖고 중계를 했습니다.(웃음) 조금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그때까지 한국 축구가 월드컵이나 올림픽 예선에서 늘 탈락을 했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질 않고 중계를 했어요.

- 그런데 왜 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때는 중계를 안 가신 겁니까?

86년 초에 제가 아나운서직에서 물러나 전주 MBC사장으로 가게 됐습니다. 그래서 멕시코 본선에는 후배인 송재익 아나운서가 가게된 거지요. 월드컵 대회에 직접 가서 우리 팀 중계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서운함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동안 중계는 할 만큼 했기 때문에 크게 아쉬워하지는 않았습니다.

- 중계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으시다면?

음, 글쎄요. 워낙 중계를 많이 했기 때문에 어느 경기를 하나 집어서 말씀드리기가 어려운데...

굳이 뽑아 본다면 축구는 아니지만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여자 배구 남북대결 중계가 기억납니다. 당시 경기 전, 예상은 북한의 압도적 우세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조혜정을 비롯한 우리 선수들이 너무도 잘 해줘서 북한을 이겼어요. 정말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아마 이 경기는 기억하시는 분들 많을 텐데, 82년도에 프로복싱 WBA 라이트급 세계 타이틀매치 김득구와 레이 맨시니전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미국 라스베가스의 시저스 팰리스 호텔 특설링에서 벌어졌던 그 경기도 제가 중계를 했는데 김득구 선수가 14회전에 KO패 당한 후에 세상을 떠났지요. 그 당시 제가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그 경기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도 웬만해서는 잘 안합니다.

축구 중계 가운데에는 역시 국내 최초였던 70년 멕시코 월드컵 중계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현지에 가서 생중계를 한 건 아니지만 참 의미있는 방송이었거든요.

- 선생님께서는 대단히 냉정한 톤(목소리)으로 중계를 하셨습니다. 급박한 상황이라도 절대 흥분을 안 하셨는데 원래 대담한 성격이신가요?

아나운서는 자기 절제를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절대 분위기에 휩쓸려선 안 된다는 거지요. 스포츠 중계 아나운서는 일정한 톤으로 시청자들을 감동시켜야 돼요. 운동장(혹은 체육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시청자와 청취자들에게 자세히 알려주는 사람이 중계 아나운서잖아요. 그런 사람이 관중들과 같이 흥분을 하면 되겠습니까?

과거에 제가 전국체전 승마 중계할 때 제 눈앞에서 말이 사고로 죽은 적도 있습니다. 그럴 때도 아나운서는 평정심을 잃지 말고 중계를 해야 돼요. 그리고 객관적으로 중계를 해야 됩니다.

- 요즘 시대가 변해서 그런지 스포츠 중계가 엔터테이먼트화 되고 있는 것 같고, 아나운서들도 중계 때 조금 오버 액션을 하는 경향이 있는 듯한데 이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제가 보수적인 편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저는 그게 좋게만 보이질 않습니다. 스포츠 중계도 뉴스와 마찬가지로 보도입니다. 보도는 진실해야 하잖아요. 스포츠 중계도 진실해야 하고, 또 진지해야 됩니다. 그리고 치밀해야 되구요. 그렇게 한다고 해서 스포츠가 재미가 없거나 박진감이 떨어지는 건 절대 아니거든요.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스포츠 중계 아나운서는 자기 절제를 할 수 있어야 되고, 자기 견제도 할 줄 알아야 돼요. 중계 아나운서가 응원단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 마지막으로 현재 스포츠 중계를 담당하고 있는 후배 아나운서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으시면 한 말씀 해주십시오.

스포츠 중계 아나운서는 시청자들이 알아듣기 쉽게 풀어서 중계를 해야 됩니다. 중계할 때 어려운 단어를 사용한다던가 쓸데없는 멋을 부려선 안 돼요. 또 아나운서라고 해서 무조건 말을 많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필요한 말만 하면 되거든요. 그러기 위해선 해설자와 호흡을 잘 맞춰야 됩니다. 중계 때 아나운서가 해야 할 말을 해설자가 하고, 해설자가 해야 할 말을 아나운서가 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시청자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돼요.

그리고 아나운서는 중계 때 정확한 표현을 써야 합니다. 예를 들어 축구 중계 때 간혹 아나운서들이 ‘페널티박스’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페널티 에어리어’라고 정확히 표현을 해야 돼요.

평소에 스포츠에 대한 공부도 많이 해야 합니다. 해설 없이도 혼자서 중계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스포츠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 돼요. 그래야 시청자들이 만족을 합니다.

끝으로, 이건 아나운서에 관한 내용은 아니지만 한 마디만 할께요. 제가 한 가지 바람이 있는데 한국의 스포츠 역사에 관련된 책이 출간됐으면 좋겠습니다. 축구, 야구, 권투, 농구 등 각 종목마다 세세한 역사를 담은 책 말입니다. 그런 책은 반드시 출간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러한 걸 누가 계획한다면 저도 힘닿는 데까지 돕고 싶습니다. 한국 스포츠사는 꼭 정립이 되어야 돼요.

-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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