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키퍼는 내 운명 - 김현태

축구 선수와 축구 지도자로서 두 가지 모두를 인정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선수시절 축구황제로 꼽히는 펠레, 마라도나는 지도자와는 거리가 있고 세계적 명장으로 꼽히는 조세 무리뉴, 히딩크 등의 감독들은 현역 시절이 화려하지 못했다. 독일의 프란츠 베켄바워, 네덜란드의 요한 크루이프, 그리고 한국의 김호, 김정남 등의 지도자들이 존경을 받는 이유도 두 역할을 모두 성공적으로 이끈 인물이 그만큼 많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 그 두 가지 역할을 모두 충실히 해낸전설이 있다. 현재 진행형인 이전설의 이력은 단순히 선수와 지도자, 두 가지로도 양분하기 힘들다. 그를 기억하는 팬들은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뉜다. 선수로서, 2002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으로서, 그리고 열악한 프로 구단을 맡은 의리파 수석코치로서.

 

고려대 시절 한 해에만 7관왕을 이끈 최고의 활약으로 럭키금성 프로축구단 (현 FC서울)에 입단해 1985 시즌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최인영, 오연교, 김풍주, 정기동, 조병득, 박철우 등 쟁쟁한 골키퍼 홍수 속에서 85, 86년 두 시즌 연속 골키퍼 상을 수상했던 최고의 골키퍼. 그리고 K리그 첫 골키퍼코치로 시작해 2002년 월드컵 당시 히딩크를 도와 골키퍼 코치로서 한국의 철벽수비의 방점을 찍을 수 있게 해주었던 골키퍼 코치. 2004, 정해성 감독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매각 위기에 놓였던 부천SK의 수석코치로 부임해 다음시즌 팀을 플레이오프 문턱까지 올려놨던 실력 있는 의리파 지도자.

 

이 많은 수식어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K리그의 전설바로 제주 유나이티드의 김현태 수석코치다.

 

키가 중학교 때 꽤 컸어요. 이 키가 중학교 때 키라고 봐야지.(현재 김현태 코치의 키는 180cm 정도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축구는 안했고 육상을 했어요. 키가 크고 그러니까 중학교를 가니 반장을 시켜놨어요. 아침에 조회를 하는데 체육선생님이 보시더니 축구를 하라고 하시더군요. 축구부가 있는건 알았지만 거기 애들은 초등학교부터 축구했던 애들이고 저는 안했으니까 축구를 안 하고 있었던 때에요. 결국 중학교 1학년 말부터 축구를 하게 됐는데 동네에서 애들이랑 볼 같고 노는 것과는 틀려요. 전문적으로 축구를 했던 애들하고 하니까 적응이 잘 안 되서 도망 다니고......”

 
동신 중학교 시절 체육 선생님의 권유로 축구를 시작하게 된 김현태. 그 역시 축구와의 인연은 늦게, 우연으로 찾아왔다. 단순히 키가 크다는 이유로 뒤늦게 합류한 김현태는 중학교 2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축구부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축구부의 동료들은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를 배워온 터라 기량이 훨씬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자신과 다른 선수들과의 실력 차이를 인정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두드러진 체격조건과 재능을 미리 알아본 김형인 체육선생님은 기어이 김현태의 담임선생님을 설득했고 두 선생님의 설득에 못 이겨 중학교 2학년부터 정식으로 축구를 시작하게 됐다

 

축구의 시작과 함께 그가 맡은 포지션은 센터 포워드였다. 빠른 발과 뛰어난 체격 조건을 갖고 있어 실력만 닦는 다면 뛰어난 스트라이커로 성장할 자질이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하늘이 먼저 골키퍼로서의 재능을 알아보고 있었는지 우연찮은 기회에 골키퍼로 보직을 변경하게 된다.

 

동북고랑 연습경기를 하는 도중에 3학년 골키퍼가 다쳤어요. 골키퍼가 없다보니 제가 키가 크니까 저한테 골키퍼를 보라고 하더라구요. 그 때부터 골키퍼를 하게 됐지요. 근데 골키퍼가 싫지 않았던게 코치 선생님이 체육 선생님이다 보니 전문적으로 축구 지도자에 대해 배운 분이 아니다보니 매일 뛰는 훈련만 반복했어요. 밤에는 줄넘기 하고 매일 뛰어야 하는게 너무 싫었는데 골키퍼를 하면 뛰지도 않더라고요.”

 

축구의 시작부터 골키퍼가 된 계기까지. 그 때까지만 해도 축구선수 김현태는 노력과 거리가 멀어보였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들의 필수 요소. 바로 승부욕과 노력 두 가지 요소를 김현태는 갖고 있었다. 현역에서 은퇴한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선수 못지않은 몸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성실함은 바로 그 승부욕에서 시작되었다.

 

다른 친구들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는데 늦게 시작하다보니 실력이 많이 떨어졌어요. 키도 크고 체격 조건도 좋은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골키퍼로서의 기술도 1학년 말 때 3학년 골키퍼가 조금 가르쳐준 것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자존심도 상하고 그 때부터 정말 개인 운동을 엄청 했어요.”

 

다른 아이들한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개인 운동밖에 없죠. 개인 운동도 공 같은 것이 없으니까 그냥 뛰고 줄넘기 하는 것 밖에는 없었어요. 여름에 한 달 동안 혼자 학교에서 합숙을 했는데 지금 하라고 하면 아마 무서워서 못 할 거예요.

학교 축구부실이 따로 없었고, 매트리스 갖다 놓고 체육시간에 공도 갖다놓고 그런 창고를 축구부로 썼었을 때에요. 학교가 끝나면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찬합에 도시락을 싸달라고 해요. 도시락을 싸갖고 학교에 와서 밤에 라이트 켜놓고 운동하고 수돗가에서 샤워를 하고 밥을 1/3 먹어요. 그리고 학교에서 자는 거예요. 창고에 매트리스 깔아놓고 추리닝 입고.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친구들 오기 전에 새벽 운동을 하고 수돗가에서 씻고 또 1/3을 먹고 학교 수업에 들어가요. 4교시 끝나면 또 남은 밥을 먹고 운동하고 다시 집에 가서 밥 싸오고. 이런 식으로 한 달을 했어요.”

 
각고의 노력을 거듭한 김현태는 빠른 속도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당시 소년체전은 지금과 같이 단일팀 참가방식이 아닌 국가대표 선발방식이었다. 축구를 시작한지 채 1년 정도 밖에 되지 않은 김현태가 쟁쟁한 골키퍼들을 제치고 서울대표에 선발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노력과 타고난 재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케 한다.

 

골키퍼로서 갖춰야할 큰 키와 성실함에 킥 능력, 순발력 등을 키워나간 김현태. 골키퍼로서 팀을 정상에 한 차례 올려놓는 맹활약을 한 후 영등포공고에 진학하게 된다. 영등포공고에서 역시 1학년 때부터 베스트 멤버에 뽑혀 활약을 이어갔다. 총 선수가 80명 정도에 골키퍼가 4명이나 있었던 당시 영등포공고는 1, 2부제가 있어 자신보다 연배가 3,4년 더 많은 선배들도 있었다고 하니 신입생으로서 정규멤버로 경기에 나간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3년이 지나 졸업을 해야 할 시간은 다가왔다. 아직 프로리그가 생기기 전이었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다. 대학진학, 혹은 실업팀으로의 직행. 그러나 영등포공고 윤재봉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그 때는 영등포공고를 나오면 윤재봉 감독 선생님이 거의 안정된 직장을 찾아주셨어요. 프로팀도 없고 기껏해야 은행 팀, 서울시청 밖에 없었을 때니까요. 그러니까 체육 선생님을 해라. 선생님을 하면 부인도 선생님을 만나서 정년퇴임할 때까지 평생 편하게 살 수 있다. 이거였죠. 그래서 저희 동기들이나 후배들이 거의 충남 대학교, 충북 대학교, 공주사대를 가서 지금 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어요.
중학교 때 아무것도 모르고 뛰었고 고등학교 때 들어서 매년 우승하면서 이제 좀 제대로 해보려고 했는데 공부를 하라고 하니까 내가 여태껏 노력했던 것이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그래서 부모님도 오시라고 했는데 부모님도 제가 워낙 강하게 하니까 절 믿어주셨지요. 결국 선생님이 네가 학교를 선택해라. 다섯 군데 중에서 선택하라고 하셨어요
.”
 
고등학교 때 연세대학교 운동장에서 운동을 많이 했어요. 영등포공고에 운동장이 제대로 없어서 연세대 가서 거의 운동을 했으니까요. 그 때 당시 장운수 감독님이 오라고 하셨는데 이상하게 고대에 가고 싶더라고요. 연대는 3년 동안 매일 같이 운동을 해서 그런지 고대를 더 가고 싶었어요. 당시 김정남 감독님이 고대 감독님이셨어요. 김정남 감독님도 무조건 오라고 그러셔서 여러모로 판단을 했더니 골키퍼로 뛰기에는 고대에 가서 뛰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그래서 고대에 가서 1학년부터 베스트 멤버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탄탄대로를 걸어가던 김현태에게도 한 차례 위기는 있었다. 사고를 칠 뻔했던 아찔한 순간이었다고 추억하는 대략의 내용은 이렇다. 김현태가 대학교 4학년이던 1983년 대통령배에서 고려대와 연세대가 1라운드에 맞붙었다. 양교뿐만 아니라 두 라이벌의 맞대결에 많은 관심이 모아졌고 대통령배 개막전을 축하하러 전두환 대통령 내외까지도 경기장을 찾았다. 경기는 1-0. 신연호의 선제골로 고려대가 앞서나가던 상황이었다.

 

예전에는 수비수가 백패스를 해도 골키퍼가 잡을 수 있었어요. 박양하가 백패스를 해서 제가 잡았는데 윤성호가 거의 얼셈?보고 두 발로 태클이 들어왔어요. 양교가 응원하고 분위기가 고조된 상태였으니 영웅심이 앞섰다고 보는게 맞죠. 얼굴 쪽으로 들어오는걸 막아서 어깨 부근에 맞았는데 화가 많이 났어요. 얼마나 분했는지 동대문 운동장 본부석까지 쫓아가고 있었는데 선심이 깃발로 제 목을 잡는 거예요. 그래서 가다가 넘어졌지요. 만약 대통령도 다 보고 있었는데 제가 잡아서 그 친구를 때렸으면......그 분이 어떻게 보면 제 은인 이죠

 

대통령배 4강에 오른 고려대는 곧바로 12회 마라하림컵쟁탈 국제축구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인도네시아로 향했다. 지난해 대통령배에서 우승 자격으로의 출전이었다.

 

제가 4학년 때 대통령배와 마라하림컵 스케줄이 거의 겹쳤어요. 전 해에 우승을 해서 우승 특혜로 나가야되는데 대통령배 결승에 올라가면 이 대회를 나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준결승에서 한일은행에 지고 바로 이 대회를 나갔지요. 인도네시아를 처음에 갔는데 애들이 밥도 못 먹고 토하고 그랬어요. 저는 음식을 잘 가리지 않는 편인데 동기들이나 후배들이 음식을 못 먹어서 현지에서 우리나라 쌀을 구해서 해먹고 그런 상황이었어요. 또 거기가 얼마나 더운지 독일 선수들은 덩치도 크고 그러다보니 게임 뛰다가 옆에 트랙에 나가서 구토까지 할 정도였죠.
결승에서 인도네시아 대표팀과 우리가 붙었는데 운동장이 종합운동장처럼 되어있는 구장이었어요. 트랙 앞까지 사람이 꽉 들어찼을 정도로 말도 못할 열기였어요. 골대 뒤에도 사람들이 몰려와서 슬리퍼 던지고 야유하고.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몸을 풀기 위해서 가지고 온 빨간 컬러 볼을 운동장에 내려놨는데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와서는 공을 다 가져가 버렸어요. 십 몇 명이 와서 공을 들고 달려가니까 경찰 제제도 안 되는 상황이었죠. 워밍업은 해야 하는데 공은 없고 그래서 공도 없이 몸만 풀고 경기를 뛴 거죠.”

 

동남아 경기가 텃새가 심하기로 유명한데다 그 정도로 제제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정말 이길 수 없는 게임이었는데 결국 우리가 3-1로 이겼어요. 멤버가 너무 좋았으니까요. 정용환, 조긍연, 박노봉. 신연호, 김종부, 김판근, 노수진, 함현기, 조민국, 박양하...... 멤버가 거의 대표팀 멤버였어요. 실력이 비슷하다고 하면 홈 팀 텃새라던가 이런 부분에 의해서 역전될 수 있지만 워낙 실력 차이가 나다보니 그런 상황에서도 이길 수 있었지요.”

 

독일, 일본 등을 제치고 마라하림컵 우승컵을 차지한 고려대는 이후 7개 대회에서 연속으로 우승하는 무서운 저력을 발휘하며 그 해 축구대회를 석권했다.

 

축구 입문 후 성공가도만을 달려왔던 김현태에게도 아쉬운 기억, 달성하지 못한 목표는 있었다. 그것은 국가대표 욕심이었다. 물론 기량은 출중했다. 청소년대표로서는 최종 명단까지 살아남았던 기억도 있다. 은사였던 김정남, 이차만 감독이 대표팀을 맡았을 때 역시 김현태 골키퍼를 찾았음은 당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정작 국가대표 팀에 선발되지 않은 이유는 달리 있었다.

고등학교 때 청소년대표팀 최종까지 갔었던 적이 있어요. 영등포공고 감독님이 안 보내셨죠. 왜냐면 골키퍼를 저 하나밖에 없어서 제가 대표팀을 나가면 1년 동안 시합을 나갈 수가 없어서 안 된다는 이유였어요. 네가 이해해라. 대학교 1학년 때 가면 된다 이거였죠. 대학교 1학년 때는 막상 생일이 빨라서 못 갔어요. 나이가 3개월 오버되더라고요. 그래서 최인영이 가서 뛰었는데 그 대회에서 우승하는 덕분에 최인영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지요.
대학교 때는 대표팀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연세대와 정기전 때문에 보내주지를 않았다고 하대요. 그 이야기를 모르고 있었는데 졸업하던 해에 그 이야기를 해주시는 것이에요. 대표팀에서 불렀는데 골키퍼가 없어서 안 보냈다고. 미안하고 고맙다고

프로에 와서도 그 때 이차만 감독님이 대표팀 감독님이셔서 저를 데리고 가려고 하셨는데 고재욱 감독님이 안 보내주셔서 못 갔어요. 현태 없으면 게임 안 되니까 안 된다고. 그래서 제가 대표팀에 대한 한이 많이 있었어요
.” 
 

소속팀 선수로서는 최고의 활약을, 대표 선수로서는 아쉬움을 간직해야만 했던 대학 4년의 시절은 그렇게 흘러갔다. 김현태의 선택은 새로 프로팀을 창단한 럭키금성 프로축구단이었다. 골키퍼 김현태를 비롯해 한문배, 조영증, 정해성, 강득수, 이용수 등의 선수들이 있었지만 첫 해의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할렐루야, 대우, 유공, 포항제철에 비해 선수구성도 뛰어나지 못했을 뿐더러 창단 첫 해에 좋은 성적을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베테랑을 선호하는 골키퍼의 포지션 특성상 입단 첫 해에 주전을 꿰찬 김현태는 나름의 성과를 냈지만 23경기에 출전해 37점을 실점하며 만족스럽지 못한 첫 시즌을 보냈다.


당시 대우, 할렐루야 이런 팀들은 대부분이 대표선수라고 할 정도로 좋은 선수들이 많았어요. 그에 비해 우리 팀에는 아무도 없었지요. 84년도에는 골을 많이 먹었어요. 근데 1년 지나고나니 경기를 뛰는데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86년에는 진짜 축구에 눈이 틔었다고 할까. 여유도 있어지고.”


럭키금성 창단 2년차였던 1985년 시즌. 지난 시즌 하위권에 머무르던 럭키금성과 아직 어려보이기만 했던 김현태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선수층이 두텁지 않았지만 해보자는 마음만큼은 어떤 팀보다도 높았다. 요새는 중고등학교 선수들도 하기 싫어한다는 개인 훈련을 누구 하나 시키지 않아도 빼먹지 않을 정도로 선수단 내부에해보자!’는 자신감이 팽배해있었다. 아직 입단 2년차인 김현태 역시도 럭키금성의 패기 넘치는 분위기에 큰 자신감을 얻었다.

수비라인에 조영증, 한문배, 정해성 감독 등이 있었을 때였으니 제가 제일 어릴 때였지요. 선배들이 리드를 잘 해줬어요. 잘 할 수 있도록 자신감을 키워주고. 1985시즌에는 전 게임을 뛰면서 선배들 덕도 많이 봤어요. 나름대로 분위기라는 것이 있는데 당시에는 열심히 하는 분위기가 대세였어요. 저 자신을 지금 와서 돌아보면 김영광 같은 스타일 같아요. 열심히 하는 골키퍼.”

무엇보다 피아퐁의 가세는 큰 힘이었다. 84시즌 합류해 5경기에서 4골을 몰아치며 괴력을 과시한 피아퐁은 85시즌 득점왕과 도움왕을 휩쓸며 K리그 최고 선수임을 입증했다. 피아퐁의 활약은 마치 2007시즌 경남 까보레의 활약과 흡사했다. 앞에서 터져주니 팀의 사기 또한 올라갔고 덩달아 순위도 올랐다. 경남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김현태 골키퍼가 버티고 있던 수비라인 역시도 매우 안정되어있었다는 것이었다. 1985시즌 럭키금성의 경기 효율성은 매우 높았다. 팀 득점은 리그 최다, 실점은 0.9점대의 실점률이었다. 득실차가 2위 포항의 두 배에 달했으니 창단 2년차의 럭키금성이 돌풍을 어느 정도였는지를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동남아 최고 선수였던 피아퐁이 와서 득점, 어시스트를 앞에서 다 해줬으니 피아퐁의 덕이 엄청 컸었지요. 지금 경남과 비슷한 입장이었어요. 까보레, 뽀뽀가 전방으로 나가면 한 골씩 넣어주니까 다른 선수들도 없던 힘이 생기잖아요. 그런 힘이 팀으로서는 무서운 시너지를 발휘해요.”

피아퐁, 강득수, 이상래 등의 공격진과 김현태 골키퍼를 앞세운 럭키금성은 그해 2위 포항을 한 경기차로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했다. 당연히 85시즌 골키퍼 상도 김현태의 몫이었다. 리그를 통틀어 김풍주와 함께 단 두 명뿐인 전 경기 출전, 그리고 0점대 실점률, 팀 성적이 뒷받침 된 성과였다.

다음해에도 럭키금성의 돌풍은 이어졌다. 85시즌 팀의 기둥이었던 피아퐁이 17경기 2골이라는 좋지 않은 성적표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수비를 바탕으로 리그 최소실점에 최다득점 2위를 기록하며 정규리그 1위에 등극했다. 접전을 벌였던 85시즌과는 달리 이미 리그 종료 3경기를 앞두고 사실상 1위를 확정지었을 정도로 무서운 기세였다.

우승을 확정짓는데 있어 지난 시즌과 다른 점이 있다면 리그 방식의 변화였다. 또 하나의 벽, 챔피언결정전을 넘어야만 했다. 챔피언결정전의 상대는 최순호, 조긍연, 이흥실, 박성화 등이 버티고 있던 포항제철이었다. 포철의 벽은 높았다. 포철은 1차전을 1-0으로 승리한 후 다음날 열린 2차전에서는 1-1 무승부를 만들어내며 그 해의 트로피를 가져갔다.

비록 2년 연속 우승은 만들어내지 못했지만 물이 오를 대로 오른 김현태는 다시 한 번 최고 골키퍼 자리에 이름 석자를 새겨 넣었다. K리그 24시즌 동안 사리체프와 김현태 단 두 명만이 이룩했던 2년 연속 골키퍼상 수상. 뛰어난 실력을 바탕으로 팀 성적과 기여도 등이 모두 뛰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성과였다.

“85년 들어 자신감이 생겼고 86년에는 진짜 축구에 눈이 뜨였다고 할 정도로 자신감이 생겼어요. 86년 후반기에는 나가면 이겼을 정도에요. 그 때 정말 쟁쟁한 골키퍼들이 많았죠. 조병득 선배, 최인영, 정기동, 오연교 다 대표선수였고 지명도는 다 저보다 위였어요.”


골키퍼로서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최고의 반열에 오른 김현태였지만 아쉽게도 그 기간이 길지는 못했다. 늦은 축구 입문 후 큰 탈 없이 성공가도를 달려왔다는 자부심도 뒤로한 채 부상의 악령이 엄습해오고 말았다. “86년에 어깨를 다쳤어요. 지금도 금침을 박아서 어깨가 가끔가다 아플 정도에요.
 
이것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어요. 거의 6개월을 쉬었으니까요. 한 번은 손목도 부러져서 1년 정도를 쉬었어요. 게임 나갔다가 유공에서 뛰던 차희철 선수와 부딪쳐서 손목뼈가 부러졌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쪽 뼈가 부러진 줄 모르고 다른 뼈로 알고선 깁스를 한 것이에요. 열심히 재활해서 부러진 줄 알았던 그 뼈는 다 붙었지요. 그래서 운동을 다시 시작했는데 손목이 자꾸 아프더라고요. 저는 손목 깁스를 오래해서 잘 구부러지지 않는 줄 알고 매일 찬물에 담그고 무리해서 구부리곤 했었는데 너무 아픈거에요. 다시 가보니까 의사가 오진을 내렸던 것이었어요. 손목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지요. 지금도 손목이 아파서 팔 굽혀펴기 같은 것을 할 때도 잘 꺾지 못해요
.”

84
시즌 신인시절 29경기 중 23경기 출전, 85시즌 21경기 전 경기 출전 후 우승 및 GK상 수상, 86시즌 37경기 중 30경기 출전해 정규리그 우승 후 GK상 수상. 1987김현태는 이제 막 20대 중반을 넘긴 나이였다. 그러나 부상으로 경기 출전시간이 점점 줄어들자 그 자리를 차상광 골키퍼가 맡는 일도 점점 늘어났다. 88시즌에는 7경기 출전, 89시즌 9경기 출전, 90시즌 2경기로 출전시간은 계속 줄어만 갔다
.
 
그러던 어느 날.......

당시 저는 고참이었고 정해성 감독은 고재욱 감독님 아래서 수석코치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정해성 감독이 올림픽대로 빗길에 미끄러져서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예전에는 코치의 일이 지금보다 훨씬 광범위했어요. 당장 일을 수행해야 할 사람은 있어야 하는데 코치가 없으니까 고재욱 감독님이 고참인 절 데리고 다니셨어요. 일단 임시로 선수 겸 코치를 하라는 거였지요. 경기 끝나면 선수 분석. 개인 평가, 전체 평가 등등 지금이야 컴퓨터를 갖고 하지만 그 때만 해도 일일이 손으로 써야하다 보니 밤새도록 쓰고 지우고를 반복했어요. 훈련 준비 같은 것은 기본이고 지금이야 구단 직원이나 주무가 연습구장을 빌리지만 그 때만 해도 구장을 빌리는 것까지 코치가 했었어요. 행정적인 부분, 선수 훈련, 분석 글 등 3개월 정도를 하다 보니 너무 힘들더라고요.

고재욱 감독님께서 이제 그만 은퇴하고 코치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시즌 중반에 덜컥 은퇴를 했어요. 9월경에
.

돌아 보건데 분명 미련이 있기도 있어요. 고재욱 감독님도 지금에서는 제가 너무 일찍 은퇴한 것 같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지만 어차피 지도자의 길을 가려고 했으니 빠른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지금 제가 이 정도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도 공부를 빨리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화려했던 선수생활을 뒤로 한 채 김현태는 지도자의 길로 입문했다. 지도자로서의 처음 출발도 나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골키퍼 코치역할이 그에게 주어졌다. 지금이야 프로 구단뿐만 아니라 학원축구에서도 골키퍼 코치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당시 한국에서 골키퍼 코치는 미개척분야였다. 전문화 된 코치가 없다보니 승패와 가장 밀접한 연관이 있는 포지션임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코칭을 받지 못했다. 쉽게 표현하자면알아서 훈련하고 알아서 운동하는포지션이 바로 골키퍼였다.

선수가 끝나고 은퇴를 전후해서 독일에 갔다 왔어요. 정해성 감독이 독일에 한 번 갔다 오라고 추천을 해서 연수를 다녀왔죠. 3주 정도를 휴가내서 골키퍼 스쿨을 곳을 처음 가봤는데 얼굴이 반쪽이 돼서 나왔어요. 유학 중이던 최강희 감독이너 얼굴이 왜 그러냐?’고 했을 정도니까.

네덜란드 아약스 팀에서 뛰다가 은퇴한 선수가 코치들 10명 정도를 데리고 순례를 하는 골키퍼 스쿨인데 전체 90명 정도가 저와 같이 배웠어요. 여자 선수도 30명 정도 되는데 그 중에 동양인은 저 하나밖에 없었어요. 처음에는 우습게보더라고요. 동양에서 왔지, 독일인들에 비해 키도 작지. 근데 막상 시켜보니까 오른발, 왼발 킥 좋지, 키핑도 좋지 곧 잘하니까 왜 은퇴했냐고 물어보더군요. 그 때부터 조교 역할을 저한테 맡겼는데 정말 그 때까지 배웠던 것과는 다른 차원의 교육을 받았어요. 다른 선수들에게 시범을 보여야 할 때 항상 저를 시키니까 힘들긴 정말 힘들었지만 내가 여태껏 제대로 못 배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예전에는 볼이 두렵고 그럴 때도 있었는데 볼이 완벽하게 보이니까 자신감도 생기고. 현역으로 복귀할까를 심각하게 고민했을 정도에요
.

끝날 때는 골키퍼 스쿨 감독이 같이 일을 하자는 제안도 했는데 언어의 장벽 때문에 성사되지는 못했지요. 유럽 전역을 돌아다녀야 되니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 정도는 할 줄 알아야 되는데 안 되니까 그냥 고맙다. 하고 성사되지는 못했어요.”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코치를 시작하면서부터는 골키퍼 트레이너로 시작을 했어요. 그 때 우리나라에는 골키퍼 코치라는 개념이 없었을 때에요. 감독, 코치, 트레이너가 전부였으니까. 인식 자체가 골키퍼는너宙褥?알아서 운동해.’ ‘골키퍼는 아무것도 아냐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낙후돼 있었어요. 어떻게 보면 제일 중요한 포지션인데. 우승을 하는 팀을 보면 골키퍼의 활약이 상당히 두드러져요. K리그 3연패를 했던 일화도 사리체프가 있었죠. 히딩크 감독은 자기는 팀을 맡으면 가장 우선적으로 골키퍼를 중심으로 해서 선수 구성을 짠다고 하더군요. 근데 그 자리를 처음으로 고재욱 감독님이 만들어 주신 거죠. 그래서 은퇴하자마자 골키퍼 트레이너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98년까지 순탄한 골키퍼 트레이너 생활은 계속됐다. 간간히 후배 골키퍼들과 함께 전국에 흩어져있는 중고등학교 선수들을 모아 골키퍼 축구교실을 열기도 하는 등 한국에서 제대로 된 골키퍼 교육을 하고픈 열망도 놓지 않았다. 1996 시즌에는 은퇴 후 5년 만에 선수 명단에 이름을 다시 올리는 해프닝도 있었다. 여유 골키퍼가 없어 몸놀림이 현역 못지않은 몸 관리를 해온 김현태 코치가 선수등록을 했던 것이었으나 경기 출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98 10, 김현태 코치에게 새로운 도전 과제가 주어졌다. 국가대표팀과 올림픽대표팀을 동시에 맡게 된 허정무 감독이 정해성 코치와 김현태 코치를 불러들인 것이었다. 선수들이야 당연히 소속팀과 대표팀을 병행할 수 있지만 감독과 코칭스텝의 경우 대표팀을 맡게 되면 한 곳에만 집중을 해야 하니 지금까지 누려왔던 안정된 삶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내 결정은 내려졌다. 선수시절 정복하지 못했던 국가대표의 꿈을 실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허정무 감독님이 국가대표 감독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가끔 전화를 드렸어요. 그런데 오히려 국가대표 취임하시고 나서는 집에 사모님께만 축하전화를 드리고 직접 전화를 안 드렸어요. 그런 자리가 되면 평소 찾아오지 않던 사람들이라도 같이 일하고 싶어서 연락을 많이 하잖아요. 괜히 그렇게 보일 수도 있고 부담스러우실까봐 오히려 전화를 안 하고 있었죠. 그런데 감독님이 한 편으로 서운하셨는지 정해성 감독을 그 때 코치로 선임했는데 저랑 친하니까왜 걔는 전화 안하냐?’고 물으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전화 드렸죠. ‘축하드린다.’. ‘괜히 감독님께 전화 드리면 이상하게 생각하실까봐 안했다. 그랬더니같이 한 번 하자.’고 하시더군요. ‘감독님 고맙죠. 열심히 해야죠.’ 대답은 했지만 프로팀에서 계속 생활을 하다가 대표팀 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결정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선수시절 대표팀에 대한 한을 정해성 감독이 잘 알고 있으니까한 번 해봐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허정무 감독, 정해성 코치, 최진한 트레이너와 함께한 국가대표팀, 올림픽대표팀 통합 운영은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2000시드니 올림픽에서는 비록 예선 통과에 실패했지만 모로코와 칠레를 꺾고 올림픽 본선사상 첫 2승을 거뒀고 이어 참가한 아시안컵에서는 96 2-6 수모 패를 안겼던 이란을 누르는 등 3위에 올라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뒀다. 김현태 골키퍼 코치는 김용대, 이운재를 올림픽대표팀과 국가대표팀에 불러들여 한 차원 높은 골키퍼로 발돋움 시켰다.

하지만 2002한일월드컵을 눈앞에 둔 한국 축구팬들은 이에 만족하지 못했다. 우리가 염원하던 16강 진출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금껏 과는 다른 무언가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결국 2001 1, 비쇼베츠 이후 5년 만에 외국인 감독 선임이 확정됐다. 바로 한일월드컵 4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거스 히딩크 감독이었다.

정해성, 김현태 두 코치는 허정무 감독의 퇴임과 함께 대표팀 자리에서 물러나 있었다. 히딩크 감독을 보좌할 코치로 많은 이들이 물망에 오른 가운데 이용수 기술위원장은 박항서, 정해성, 김현태를 낙점했다. 기술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박항서, 정해성 두 코치가 승낙을 해 언론에까지 보도되었지만 재미있게도 김현태 본인은 그 결정을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정해성 감독과 제가 98년부터 대표팀 코치를 했으니까 현 상황을 잘 알고 있다는 판단이었죠. 그렇게 결정이 됐는데 전 모르고 있었어요. 김현태정해성한테 얘기하면 다 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저녁에 술 한 잔 먹고 있는데 김학범 감독한테 전화가 왔어요. 너 축하한다고. 그래서 뭐가 축하 하냐니까 뉴스에 나왔다는 거예요.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코치로 결정됐다고.

당장 드는 생각은 오해를 살 것 같더라고요. 허정무 감독님은 그만둔 상태였고 저 같은 경우는 허 감독님 덕분에 대표팀 코치를 시작할 수 있었는데 그 중에 정해성 감독이랑 저만 슥 다시 하면 오해를 하실 것 아니에요. 그래서 다음날 찾아갔어요. ‘기사가 났는데 전 들은바가 없습니다. 안하겠습니다.’ 라고 했더니 허 감독님께서네 마음은 충분히 아니까 해라.’고 하시더군요. ‘나는 월드컵을 선수 때나 트레이너, 코치로 다 가봤다. 네 인생에서 한 번은 꼭 해봐야할 일이고 또, 이번에 우리나라에서 하니까 꼭 해봐라.’ 그래서 2002 월드컵 코치로 참여하게 된 거죠.”

 

2002월드컵 골키퍼 코치로서의 에피소드들은 너무나 유명해 자세한 언급은 필요 없을 것 같다. , 김현태 코치는 이 것 하나만큼은 당부했다. 항간에는 이운재를 좋아한다, 김병지를 싫어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두 선수 모두 나름대로의 장단점이 있는 훌륭한 선수이고 절대로 오해만큼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

월드컵 첫 경기가 열리기 얼마 전. 히딩크 감독은 김현태 코치를 따로 불러 어떤 골키퍼를 쓰면 좋겠는지를 물었다. 당시 김병지와 이운재는 김현태 골키퍼가 개인훈련을 말릴 정도로 온 몸을 불태우고 있었다. 월드컵 직전 히딩크 감독이 선수단에 2 3일 휴가를 줬고 휴가 복귀 후 김병지의 컨디션이 약간 다운된 모습이 나타났다. 미세한 차이였지만 아무래도 3년 터울 아래인 이운재의 컨디션이 워낙 좋았기 때문이었다. 히딩크 감독의 물음에 김현태는 답했다. “경험 면에서는 98월드컵에 참여했던 김병지가 앞서지만 현재 컨디션은 이운재 쪽이 조금 더 나아 보인다
.”

히딩크 감독은 김현태 코치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자신의 생각과 같다는 의미였다. 만일 해외에서 열리는 월드컵 이었다면 경험을 중시해 김병지 골키퍼가 중용되었을 것이다. 반대로 2002년에는 한국 국민들의 절대적인 성원이 뒤따를 수 있어 경험보다는 현재의 컨디션이 우위였다. 히딩크 감독은 그런 판단 하에 이운재에게 월드컵 기간 동안 골문을 맡겼고 이운재 골키퍼는 탁월한 선방으로 이에 보답했다.

월드컵 직후 김현태 코치는 히딩크 감독과 함께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어딜 가든 환호와 박수 그리고 영웅 대접이 뒤따랐을 정도. 히딩크 감독은정말 제대로 된 골키퍼 코치를 만났다.’는 찬사를 그에게 남긴 채 네덜란드로 돌아갔고 김현태 코치도 이내 그리운 둥지였던 LG로 귀환했다.
 

히딩크 감독 밑에 있으면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코치로서 현장에서의 노하우, 훈련 방식, 선수를 대하는 방법 등등. 남들에게는 말하지 않아도 저희들에게는 코치들이기 때문에 이해를 시켜주세요. 예를 들어 체력 훈련을 해도 3:3 경기, 4:4 경기, 5:5 경기 이런 것들을 통해 많이 올렸어요. 그냥 시키는 것이 아니라 3일을 주기로 이틀은 60정도를 시킨 후에 하루 다운시키고 또 다음 이틀 동안은 70을 시키고 하루 다운시키고 다시 다음 날에는 80을 하는 식으로 조금씩 단계를 밟아 나가면서 체력을 강하게 만들었지요. 이런 훈련을 하더라도 항상 같은 방식으로 하면 질리는데 매번 메뉴를 달리 해주는 거죠.

2002
월드컵 전까지는 지도자들이 선수보다도 더 긴장을 했어요. ()명보도 하는 말이 예전에는 감독, 코치들이 1주일 전부터 긴장했다고. 근데 요즘은 시합에 나가는 것 같지가 않다고. 정말 호주, 러시아 가서도 잘하고 계시지만 성공할 이유가 분명히 있는 분이에요. 저는 어디 가서 몇 억을 주고서도 배울 수 없는 가치 있는 것을 배운 거죠
.”


선수와 지도자로 골키퍼가 맞볼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을 두 번이나 맛 본 김현태 코치. 그리고 LG로의 귀환. 이 정도로 아름다운 동화가 막을 내렸으면 좋았으련만 이내 도전은 다시 찾아왔다.

2002
월드컵의 열기가 아직도 남아있던 2003년 겨울이었다.

한 기자한테 전화가 왔어요. ‘()해성이 형하고 간다면서요?’ 무슨 말인지 몰라서 정해성 감독한테 전화를 했어요. 묻지는 않고 전남이 FA컵을 치르러 서울에 왔기에 그냥 안부전화만 했었죠. 근데 어느 날 갑자기 전화가 와서는 계약을 했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코치로 같이 일 하자고.”

정해성 감독은 김현태 코치의 오랜 선배이자 동기였다. 고려대 선후배 사이로 만나 친한 선후배로 지나다가 럭키금성 시절에는 같은 팀에서 선수로 활약했다. 코치가 된 계기에도 정해성 당시 코치의 사고가 연관되어 있었고 대표팀에서도 오랜 기간 동안 코치로 동고동락?절친한 선배였다. 그런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당시 매각설이 피어오르던 부천 SK의 열악한 환경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정을 쌓아온 LG와의 인연도 중요했지만 어려운 상황에 처한 선배의 제안은 더욱 중요했다.

 “정말 고민을 많이 했어요. LG에 정말 미안했으니까요. 사장님께서도 많이 서운하다 하시고. 계속 거기 있었으면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는데 이쪽으로 오는 것은 모험이기도 하고. 근데내가 지금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중에 이런 기회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어려울 때 도와줘야지 지금 아니면 언제 도와주겠어요. 어차피 나도 축구인이고 축구로 같이 가는 건데.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는 생각으로 결정을 했습니다.”

정해성 감독과 함께 수석코치로 새 길을 걸은 김현태는 이듬해 SK를 후기리그 2위에 올리는 등 2년 만에 승수를 세 배까지 끌어올리는 엄청난 상승세로 코칭스텝의 찰떡 호흡을 과시했다. 그는 정해성 감독과 함께했던 시간을 너무 해피(happy)하다고 표현했다.   

"정해성 감독과는 28년간을 같이 지냈으니까 같은 생각을 갖고 산다고 봐도 되죠. 감독과 코치의 연령차가 크면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어렵게 여기다 보니 해야 할 말을 못해요. 그렇게 되면 감독의 귀가 점점 닫히게 돼요. 역으로 코치가 감독의 역할에 월권을 해도 안 돼요. 코치는 감독에게 설득력 있게 사실만을 얘기하고 딱 잊어야지 감독 결정에 가타부타 하면 월권이 되는 겁니다.

감독과 코치의 쿵짝이 잘 맞아야 되는데 우리 팀 같은 경우는 감독 스타일을 잘 알고 있으니까 제가 악역을 많이 맡아요. 전반 경기가 끝나고 분위기가 안 좋을 경우에는 먼저 들어가서 선수들 쥐 잡듯이 잡고. 오히려 그러면 감독이 열 받아 들어오다가야야~ 괜찮아.’ 하고 지나갈 수 있고. 선수들은 감독한테 혼나고 제가 위로하는 것보다는 감독한테 위로를 받는 것이 훨씬 힘을 낼 수 있어요. 그래서 제가 악역을 많이 맡아요.”

물론 악역을 많이 맡는다고 선수들에게 미움을 사는 것은 아니다. 생일날 선물을 챙겨주지 못했을 때, 문자 하나라도 따뜻하게 보내줄 수 있는 배려심. 그런 배려심과 선수들을 끝까지 신뢰하는 믿음이 스타 하나 없는 SK가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코칭스텝과 선수들의 유대감이 곧 경기장에서의 조직력이기 때문. 2003년과 2004년 두 해 연속 정규리그 최하위를 기록했던 SK는 이후 중위권정도의 실력으로 K리그 다크호스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선수로서, 지도자로서 최고의 순간을 맛봤던 김현태 코치에게 앞으로 이루고 싶은 소망은 무엇일까?

대표팀을 하면서 절실히 느낀 것은 대학교, 실업, 프로 할 것 없이 팀마다 골키퍼들이 천차만별이에요. 누구한테 배웠냐고 물어보면 방법이 다 틀리고 안 배웠다는 선수도 있고. 너무들 다른 거에요. 일관성 있게 가르쳐야 하는데 너무들 다르니까 대표팀에서 가르칠 때도 문제가 많죠. 내가 데리고 있는 선수들이 저 팀으로 갈 수도 있고 저 팀 골키퍼가 우리한테 올수도 있는데 일관성이 있어야 그런 상황에서도 빨리 적응을 할 수 있잖아요. 코치들의 자존심 때문에 자기가 갖고 있는 부분을 고수하는데 우리 후배들만이라도 노하우들을 오픈시켜 놓고 일관성 있는 프로그램을 토론했으면 해요.”

사실 골키퍼 학교를 만들고 싶었어요. 근데 아직 현실상 골키퍼 학교를 만들어놓고 골키퍼 수업을 받으러 와라. 이건 힘들 것 같고. 각 지역마다 운동장을 빌리고 코치 일곱, 여덟 명 정도를 데리고 다니면서 전국 순회를 하는 것이에요. 1년에 두어 번 정도 방문으로 서울,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그리고 각 도시들을 돌면서 참가한 선수들에게 수료증을 만들어 주는 방식으로 구상 중이에요.

김현태 골키퍼 교실 1기를 수료하면 수료증을 주고 다음번에 참여했을 때는 코치를 배분해서 한 단계 높은 부분을 가르쳐주고, 처음 참여하는 선수들은 기초부터 가르치고. 이런 식으로 해서 우리가 직접 찾아다니면서 수준 높은 교육을 해줄 수 있는. 공짜로 해주면 오히려 마음가짐이 달라지니까 최소한의 참가비를 받고 스폰서를 받아서 그런 부분을 물질적인 것으로 보상해줄 수 있는 그런 프로그램을 해보고 싶어요. 지금 차범근 축구교실을 비롯해서 많은 유명한 축구교실은 있는데 골키퍼 축구 교실은 없어요. 누군가 해야 되는데 어느 한 곳에 정착해서 하기에는 한계가 있고, 직접 찾아 다녀야죠.”

축구가 예전에는 정도 있고 많이 따뜻했는데 요즘은 많이 없어진 것 같아요. 이다음에 김현태 그 사람 정말 깨끗한 사람이고 좋은 사람이다. 열심히 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어요.”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구웹사이트
편집 :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저작자 표시
신고

'K리그의 전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K리그 레전드 - 최영준  (0) 2012.01.09
K리그 레전드 - 유대순  (0) 2012.01.09
K리그 레전드 - 김현태  (0) 2012.01.09
K리그 레전드 - 김동해  (0) 2012.01.09
K리그 레전드 - 최대식  (0) 2012.01.09
K리그 레전드 - 임종헌  (0) 2012.01.09
Posted by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BLOG main image
by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공지사항

카테고리

전체보기 (125)
사진으로 보는 한국 축구 (4)
K리그 역사 바로 알기 (9)
K리그의 전설 (42)
K리그 꿈의 구장 (2)
축구인 인터뷰 (68)
K리그 역대 순위표 (0)
K리그 역대 수상 내역 (0)
K리그 역대 엠블럼 (0)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Total : 117,625
Today : 13 Yesterday : 82